IF 외전 5화
“쓸데없는 오지랖을 부리는 건 어릴 때나 지금이나 똑같나 보군.”
갑작스럽게 과거를 들먹이는 이상한 발언에 에블린이 고개를 휙 돌렸다.
“뭐?”
언제나 여유롭게 웃던 그녀의 얼굴은 못 들을 소리를 들었다는 듯 잔뜩 구겨져 있었다.
평소 나긋나긋하지만 얄밉게 내뱉는 에블린의 목소리에 짜증이 어리는 것이 즐겁기라도 한지 그의 입가에 자세히 봐야 보일 정도의 옅은 미소가 번졌다.
“나를 찾아온 거잖아. 아닌가?”
“무슨 헛소리야?”
“그게 아니라면 굳이 내 옆에 청승맞은 꼴로 앉아 있는 이유는 뭐지?”
뒤늦게 그녀가 예상했던 질문이 나왔지만 이미 한껏 당황한 에블린은 말할 타이밍을 놓치고 말았다.
체이서는 그것 보라는 듯 한쪽 입꼬리를 살짝 끌어 올렸다. 명백한 비웃음이었다.
“나는 내가 걱정되어 옆을 지켜 주고 있나 싶었지.”
여유로운 목소리에 에블린이 기가 찬다는 얼굴로 헛웃음을 내뱉자 오히려 기분이 좋아진 듯 입가에 지어진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실제로 그런 것 같고.”
이대로 체이서의 말에 휘둘릴 수 없어 에블린이 다급히 입을 열었다.
“내가?”
들켰다는 민망함을 숨기고 까칠한 태도로 대하자 체이서는 더는 에블린이 회피하는 걸 보지 않겠다는 듯 사실만 콕콕 집었다.
“뻔하지. 네가 나를 보러 내 방에 직접 찾으러 올 리 없을 테고. 아마 복도에서 나를 찾는 블러드윈이라도 만났나 보지? 당연히 블러드윈은 내 부재에 대해 말을 하지 않았을 게 뻔하고, 이상함을 느낀 네가 내 방에 찾아왔다가 내 부재를 확인했을 거야.”
마치 직접 본 듯 자세하게 말하는 것에 에블린의 두 눈동자가 얕게 흔들렸다.
“내일 당장 임무를 떠나야 하는 내가 자리를 비웠다니 이해가 안 갔을 테고, 일단 무작정 찾아봤을 거야. 연무장, 서재, 훈련실 등등 내가 있을 법한 곳을. 그럼에도 안 보이니까 마지막으로 정원에 와 봤겠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찾아온 정원이 이상한 걸 발견하고 결국 날 찾아낸 걸 테고.”
“내가 왜? 굳이?”
애써 떨리는 목소리를 감춰 봤지만 소용없었다.
“굳이 그랬을 거야. 너는 내가 걱정되었을 테니까. 지금 여기에 온 것처럼.”
에블린이 이곳에 올 것을 다 예상했다는 듯 태평스러운 말에 그녀는 행동을 읽혔다는 불쾌함을 느꼈다.
에블린은 직접적으로 물었다.
“마치 내가 너를 찾아낼 거라 예상이라도 한 모양이네?”
“단둘이 있다고 이제 가식적인 호칭도 떼고 부르는 건가?”
“원한다면 오라버니라고 친절히 불러 주고.”
“됐어. 내가 호칭에 목매는 멍청한 사람도 아니고.”
체이서는 얄밉게 어깨를 으쓱였다. 낮보다 컨디션이 좋은지 까칠했던 모습은 어디 가고 여유롭기 짝이 없었다.
그 모습에 에블린은 다시금 헛웃음을 지었다.
괜히 제 잘못을 되돌아보며 실수를 되짚었던 것이 저 얄미운 모습 하나에 이토록 후회될 줄 몰랐다.
‘애초에 나는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거야.’
아무래도 오늘 가장 감정적인 사람은 본인인 것 같았다.
‘내가 속 박박 긁는 소리 했을 때 체이서도 이렇게 짜증이 났으려나.’
저렇게 이죽거리는 놈이 뭐가 예쁘다고 피곤한 와중에 이리 바삐 움직였는지 한숨이 절로 나왔다.
에블린이 그대로 자리에서 일어나자 체이서의 시선이 그녀를 따라갔다.
처음에야 당황해서 어리숙한 모습을 보여 주었지만 적어도 이런 어정쩡한 상태로 퇴장할 수는 없었다.
제게 향하는 시선을 피하지 않으며, 에블린은 조금 전 그가 했던 것처럼 가소롭다는 듯 웃었다.
“쓸데없는 사족 붙여도 소용없어. 체이서, 네가 이렇게 정원에 은신처를 만든 이유를 내가 정말 모를 것 같아? 루이사 내에서 유일하게 더스틴의 손에 닿지 않는 곳이 이 정원이니 그보다 만만한 내 눈을 가려 보고 싶었나 본데 너무 쉽게 봤어.”
“그래서? 이제 가주한테 쪼르르 달려가서 조금 전의 본 장면을 이르려고?”
“무슨 모습? 네가 능력 사용 때문에 끙끙거리며 아파하던 모습?”
피식 웃어 주자 체이서의 입가에 지어진 미소가 서서히 사라지는 것이 보였다.
이상하게도 묘한 쾌감이 지어지는 것은 왜일까.
‘이제는 연기를 하는 건지, 이게 내 원래 모습인지 모르겠네.’
“하, 그래. 네가 언젠가 찾으러 올 걸 알고서 설치했어. 생각보다 빨리 발견했지만.”
의외로 체이서는 빠르게 인정했다.
“너무 다행이지. 덕분에 네가 골골거리는 장면도 구경했으니.”
“구경만 한 건 아닌 것 같은데.”
체이서의 지긋한 시선이 와 닿았다.
또다, 그는 조금 전처럼 모든 것을 다 안다는 듯 눈빛으로 에블린을 응시했다.
‘설마 내가 능력을 써 낫게 해 준 걸 들킨 건가?’
등 뒤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적어도 적대하는 누이를 계속해서 연기해야 하는 상황에서 이런 모습을 들키면 곤란했다.
‘내가 아니라 네가 곤란해진다고. 더스틴에게 새로운 표적이 되고 싶은 거야?’
차마 말로는 내뱉지 못하고 한껏 미간을 찌푸리고 있으니 어둡게 가라앉은 눈빛에 반짝하고 흥미가 가득한 빛이 어렸다.
“이상하지. 분명 너는 날 싫어하는데 왜 나를 치료해 줬을까.”
‘……눈치챘구나.’
바닥에 굴러떨어진 약병들이 있으니 괜찮다고 생각하며 너무 성급히 행동에 옮긴 것이 실수였다.
‘나도 평소였다면 그대로 두었을 거야. 괴물 같은 체력을 가졌으니 금방 회복할 거로 생각했을 거라고. 하지만 내일 임무를 가니까 어쩔 수 없던 건데!’
스스로를 합리화시키는 생각은 다시금 그녀를 부르는 목소리에 강제로 끝났다.
“혹시 생각보다 나를 좋아했던 건가?”
“헛소리.”
이번에는 고민할 틈도 없이 빠르게 답할 수 있었다. 잔뜩 일그러진 에블린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하던 체이서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같은 형제끼리 좋아할 수도 있는 거지. 그렇게까지 질색할 일인가?”
그가 천천히 다가오기 시작하자 에블린은 그가 다가온 만큼 뒤로 물러났다. 가까워지고 싶지 않다는 의도가 다분한 행동에 체이서는 픽 웃더니 단번에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가볍게 에블린의 허리를 낚아채고는 제게로 끌어당겼다.
“뭐 하는 거야? 미쳤어?”
에블린이 날 선 비명을 질렀으나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은 팔은 조금 더 단단하게 옭아맬 뿐이었다.
아무리 벗어나려고 애써도 체이서의 악력을 이기기는 무리였다.
그의 가슴팍에 손을 얹고서 한참을 끙끙대며 밀어내던 에블린은 제 손목이 더 아파져 오는 것에 깔끔히 포기하고 그대로 몸에 힘을 뺐다.
‘진짜 왜 이러는 거야?’
운동을 한 것도 아닌데 벅차오른 숨을 고르고 있자니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분명 그녀의 앞에 있는 체이서는 평소와는 달랐다. 무시하던 때와 달리 퍽 친근하게 구는 것 같달까?
그 생각에 도달하기 무섭게 에블린은 빠르게 이유를 깨달을 수 있었다.
“……여기 진짜 우리밖에 없나 보네? 아무나 못 들어오는 곳인가 보지?”
제법 쌀쌀한 바람이 에블린의 뺨을 스쳐 지나갔지만 맞닿은 체온이 따뜻해서 그런지 춥게 느껴지지 않았다.
에블린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리자 계속해서 저를 내려다보고 있는 체이서와 눈이 마주쳤다.
아무도 없는 곳이기에, 감시하는 이 없이 둘만이 남아 있는 장소니 지금껏 보이지 않던 모습을 가감 없이 보이는 것이었다.
“왜 평소랑 달리 나름 친근하게 말을 거나 싶었더니. 주변에 아무도 없어서였어?”
“너도 마찬가지지 않나? 아무도 없다고 나를 치료하고, 꼬박꼬박 붙이던 오라버니라는 호칭도 저 멀리 치워 버리고.”
“하.”
비아냥거리는 것 같지만 분명 체이서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서려 있었다.
‘퍽 즐거워 보이네.’
그에 에블린은 팍 짜증이 일렀다.
마치 자신이 제 손바닥 위에 올려진 것처럼 구는 체이서의 오만한 모습에 화가 났고, 빌어먹게도 그가 제게 화가 난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끼는 자신도 싫었다.
“그래서 이러는 이유가 뭔데? 내가 아픈 널 고쳐 줘서 고맙다는 인사라도 하려고?”
“내가 해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고맙다고 해야 할 이유가 있나?”
“그럼 놓아주지 그래? 누구 덕분에 더 이상 널 상대해 줄 힘도 없는데.”
지친 기색이 가득한 모습에 체이서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더니 빙긋 웃었다. 가식적인 미소에 몸에 오소소 소름이 돋는 찰나, 그가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꺼내었다.
“언제까지 더스틴의 개로 살 생각이지?”
“……뭐?”
상상도 해 본 적 없는 헛소리에 에블린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그녀가 어이없어하는 것도 모르는지 체이서는 제 할 말만 이어갔다.
“더스틴의 꼭두각시로 사는 삶을 언제까지 이어 나갈 생각이냐 묻는 거야.”
하지만 이어진 말에도 혼란이 가시지를 않았다.
“……너 지금 나 훈계하려고 붙잡은 거니? 왜? 이제 와서 오라비 노릇이라도 해 보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