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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 외전 4화 (145/159)

IF 외전 4화 

저들에게 악역이 되는 것은 에블린이 스스로 선택한 일이었고, 선의를 베풀어도 그에 대한 감사의 인사도 대가도 없을 것임을 누구보다 그녀가 잘 알고 있었다.

‘잘 알고 있는데…….’

에블린은 방으로 돌아가다 말고 멈춰서 한숨을 내쉬었다.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데 왜 이렇게 오늘따라 짜증이 나는 걸까.’

에블린은 낮보다 더욱 부어올라서 욱신거리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너무 얄밉게 굴었나……. 그래서 화가 난 걸까.’

지금껏 에블린을 무시하며 상대하지 않던 체이서가 처음으로 적의에 가까운 행동을 보였던 것이 상처라도 되었던 것일까.

적당히 상대할 걸 하는 후회에 뒤이어 불쑥 억울함이 치밀어 올랐다.

체이서가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지만.

“……아무것도 모르면서.”

형제들의 목에 또 다른 족쇄를 채우기 싫어 아등바등하는 제가 바보같이 느껴지면서도 이제 와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그들이 얼마나 힘들게 자라 왔는지 옆에서 빌어먹을 편애를 받으며 지켜보았으니까.

‘역겨운 더스틴 루이사.’

언제쯤이면 도대체 그를 없앨 수 있을까.

막막함이 밀려오니 한숨이 절로 나오는데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너 여기서 뭐 해?”

어디선가 열심히 뛰어다니기라도 했는지 땀에 흠뻑 젖은 블러드윈이 그녀를 멈춰 세운 것이다.

에블린은 순간 놀라 눈을 크게 떴다가 재빠르게 표정을 관리했다.

“……그건 내가 물어봐야 할 것 같은데. 꼴이 그게 뭐야? 아무리 저택 내라지만 너무 편히 다니는 것 아닌가?”

“그럴 이유가 있어서 그래.”

“빨리 방으로 돌아가. 아버지께서 아시면 경을 치실 거야,”

“너답지 않게 걱정해 주는 거야? 웬일이래.”

놀란 블러드윈의 목소리에 에블린은 아차 싶었다.

평소처럼 빈정거리거나 무시하고 지나간다는 게 실수로 하고 싶은 말을 해 버린 것이다.

“걱정? 내가? 너를?”

에블린은 쓰라린 손을 주먹 쥐며 피식 웃었다.

“간신히 조용해진 저택이 또 시끄러워지는 건 싫은지라.”

“그래, 네가 우리 걱정을 할 리가 없지. 됐어, 나 대화할 시간 없어.”

그리 말하며 블러드윈은 인사도 하지 않은 채 그녀가 걸어온 방향으로 다시 뛰어갔다.

조금 전보다 더욱 빨라진 뜀박질에 에블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뭔가 숨기고 있나 본데?’

에블린은 입가의 미소를 지우고서는 블러드윈이 걸어온 방향을 보았다.

체이서의 방이 있는 방향의 복도, 그리고 마치 누군가를 찾는 듯 열심히 뛰어다니는 블러드윈.

이 상황 속에서 그가 찾는 거라면 딱 한 명밖에 없다.

체이서가 사라진 것이다.

***

아니나 다를까.

에블린의 추측대로 체이서의 방은 비어 있었다. 그가 자주 사용하는 연무장도 그리고 이능력을 연습하는 훈련실도 인기척이라고는 없었다.

‘내일 당장 떠나야 하는데 갑자기 사라졌다는 건 분명 무슨 일이 있다는 거겠지.’

갈 만한 곳을 모두 찾아봤으니 남은 곳은 단 한 곳이었다.

에블린은 앞을 비추는 불빛 하나 없이 어디론가 조용히 발걸음을 옮겼다.

정원을 열심히 걷고 있으니 어느 순간 주변의 공기가 바뀌었다.

‘여기일 줄 알았지.’

에블린은 조금 전까지 잘 관리된 정원과 다르게 엉망으로 수풀이 어질러진 것을 보며 어이없는 감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더스틴은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 또한 중요시했기에 공부, 이능력 훈련 외에도 산책과 운동 등은 꾸준히 시켰다. 

특히나 유일한 딸인 에블린에게는 정원을 가꾸는 일도 관여해야 한다며 정원 관리를 넘겼기에 아무리 넓다고 한들 정원에 이렇게 엉망인 곳은 없어야 하는 게 맞았다.

숨겨진 공간이 있는 게 아닌 이상.

달이 구름에 가려 어둠이 자욱이 가라앉은 수풀을 조금 걷고 있자니 어디선가 숨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고통을 참는 듯 억눌린 숨소리에 에블린은 발소리를 죽이고 천천히 소리가 들리는 나무로 향해 갔다.

그녀가 발걸음을 멈추자 곧 구름 뒤에 숨어 모습을 감췄던 달이 드러났고, 그녀의 앞을 비추었다.

어둠이 가시자 그 속에 숨어 있는 거대한 사내의 모습이 나타났다.

“……가지가지 하네.”

에블린은 남들의 눈을 피해 홀로 쓰러져 있는 체이서의 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뱉었다.

“배짱 한번 두둑하단 말이야.”

정적이나 다름없는 이가 관리하는 곳에 이리 몰래 공간을 숨겨 둘 생각을 하다니.

블러드윈도 모르는 장소인 것을 보면 작정하고서 홀로 있을 공간을 만들어 낸 듯 싶었다.

“마도구이려나.”

1기사단에는 이능력자들도 많고, 마도구와 접근하기도 쉬울 테니 저택으로 몰래 반입하는 거야 어렵지 않았을 것이다.

체이서는 어지간히 아픈지 에블린이 가까이 다가갔음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몸을 괴롭히는 고통에 못 이겨 기절한 것 같았다.

‘이쪽도 필사적이었는데.’

에블린이 마물화라는 병을 막아내기 위해 밤낮을 이능력에 매달려 그들을 조정한 것처럼 체이서 또한 제 이능력을 과도하게 사용하며 혼란을 막아냈다.

결과가 없기에 더스틴은 절대로 알아주지 않을 노력이었지만.

‘망할 더스틴. 고통스럽게 유병장수 해 버려라.’

에블린은 다시금 속으로 더스틴을 욕하는 것밖에 할 수 없었다.

조금 더 가까이 가서 관찰하니 데몬스와 같은 증상이었다. 이런 몸으로 잘도 더스틴 앞에 섰고, 그의 폭언과 폭행을 받고 있었다.

‘아프면 방에서 쉴 것이지.’

가주가 되기 위해서 부족한 모습을 보일 수 없기에 이런다는 것 알지만 제 몸과 정신을 갉아먹는 우둔한 행동이나 다름없었다.

‘이러다 진짜 폭주하면 더 큰 일인 걸 모르는 것도 아니고.’

체이서의 옆에 앉으려니 그의 주변으로 빈 약병이 늘어진 것이 보였다.

슬쩍 들어 냄새를 맡아 보니 이능력을 억제해 주는 물약이었다.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고통을 어떻게든 잠재우려 했다 이거지.’

도대체 가주가 뭐라고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에블린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이해하고 싶지 않은 그의 모습에 가슴이 쓰렸다.

그녀는 대충 약병을 치우고서는 그의 옆에 앉았다.

그리고서는 체이서의 손목을 붙잡고서 천천히 힘을 불어넣었다.

조금 전 데몬스에게 많은 힘을 쓰고 온지라 힘겨웠지만, 체이서의 증상을 아는 이는 없으니 더스틴의 눈치를 살피며 이능력을 조절할 필요 없었다.

훅하고 몸에서 거대한 힘이 빠져나가는 게 느껴짐에 눈을 뜨니 체이서의 얼굴이 조금 전보다 편안해 보였다.

그제야 찡그린 이마가 펴진 것을 보며 에블린은 자기도 모르게 푸스스 웃어 버렸다.

이렇게 경계 없는 체이서의 모습을 보는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멍청이.”

돌아오는 답이 없다.

에블린은 무릎을 모아 그 위에 팔을 얹은 뒤 머리를 묻었다.

힘을 너무 써서 일어날 힘도 없었다. 조금만, 아주 조금만 모두의 시선이 닿지 않는 조용한 이곳에서 쉬어 가고 싶었다.

“아프지 마, 바보야. 네가 아픈 건 싫단 말이야.”

어째서 체이서가 이렇게 아무도 없는 곳을 만든 것인지 조금 이해가 갔다.

이런 곳에 도착하고서야, 타인에게 보여 주고 싶지 않은 자신을 편히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 미로 속의 나약한 에블린이 된 것 같았다. 

나약하고 멍청하고, 남에게 기댈 수밖에 없던 한심한 에블린.

분명 자신을 뒤따르는 부정적인 수식어가 한가득한데 그때로 돌아가고 싶은 이유는 왜일까.

“지친다.”

에블린은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무릎에 고개를 묻은 채 눈을 감았다.

이 순간만이라도 아무런 생각하지 않고 편히 쉬고 싶었다.

바람 하나 없는 고요한 숲속, 몸을 타고 흐르는 서늘한 온기, 고른 두 사람의 숨소리.

마음을 편안하게 해 주는 것들에 집중하던 에블린은 순간 주변을 감싼 공기가 바뀐 것을 눈치챘다.

미세하지만 옆에서 들려오는 숨소리가 변한 것이다.

‘휴식 끝이구나.’

에블린은 너무 풀어졌던 제 몸뚱이를 탓하며 고개를 들어 올렸고, 곧 숨을 죽인 채 저를 응시하는 체이서를 마주하였다.

두 사람은 한참이고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

평소처럼 날 선 기운도, 비아냥거리는 시선 또한 없이, 누구의 관심과 시선도 닿지 않는 이곳에서야 서로 솔직해지기라도 한 듯이.

‘깊다.’

체이서의 눈을 가까이서 마주하고 있으니 무언가 알 수 없는 힘에 목이 졸리는 것 같았다.

황금색 두 눈동자는 무언가 강렬한 열망을 품고 있었다. 

그것이 권력을 향한 욕심인지 혹은 적을 향한 살의일지 그녀가 상상할 수 없는 또 다른 감정인지 감히 판단을 내릴 수가 없었다.

짙게 다가오는 압박감이 부담스러워 시선을 피하니 그제야 다물려 있던 체이서가 입을 열었다.

“왜 그런 한심한 꼴로 앉아 있는 거지?”

“뭐?”

기껏해야 왜 여기에 있느냐, 어떻게 여기를 찾아왔느냐, 혹은 제 모습을 비웃으러 왔느냐. 

이런 비아냥이 쏟아질 줄 알았던 에블린은 예상치 못한 질문에 크게 당황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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