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F 외전 2화
냉정한 축객령에 방에서 나온 두 사람의 뒤로 에블린이 따라 나왔다.
“괜찮아요, 오라버니?”
에블린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체이서의 이마를 닦아 주려고 했다.
하지만 체이서는 그녀의 손을 거부했고, 손수건은 바닥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에블린은 거칠게 내쳐진 제 손을 바라보았다. 여린 손등이 어느새 붉게 달아올라 있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마라.”
서늘한 목소리에 세 사람을 둘러싼 공기가 주위보다 한층 낮아졌다.
기분 나쁜 것이 분명함에도 체이서의 얼굴은 평온했다.
잘 관리된 표정에 에블린 또한 입가에 미소를 지우지 않고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가 화가 많이 나기는 했나 봐요. 여기가 어딘지도 벌써 잊었나.”
그녀의 시선이 그들의 앞에 있는 가주의 집무실로 향했다.
그를 못 마땅히 여기는 더스틴이 아직 안에 있는데 이따위로 소란을 일으키다니.
‘아무래도 단단히 화가 난 것 같지?’
에블린은 내쳐진 손을 다른 손으로 감싸 쥐더니 사르르 녹아내릴 것 같은 미소를 지었다.
모르는 이가 보면 아름답다고 감탄할 얼굴이었으나 그 모습을 지켜보는 사용인들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그런데 나한테 이따위 동정 받기 싫으면 알아서 잘하면 되었던 것 아닌가?”
빈정거리는 목소리에 고요하던 체이서의 얼굴이 더욱 딱딱히 굳었다.
“알아서 해결한다고 해서 두었더니 이게 뭐예요. 감염병이 퍼질 뻔해서 내가 직접 나설 수밖에 없었잖아.”
“잠시만, 에블린. 일단 진정하고…….”
심각해지는 분위기에 블러드윈이 나서서 두 사람 사이를 중재하려고 했으나 이미 두 사람 사이에 오가는 감정은 싸늘하다 못해 서로를 향한 분노가 담겨 있었다.
“아무것도 해내지 못한 주제에 자존심만 세우는 거 여기서 용납 안 되는 것 알잖아요? 아는 사람이 왜 자꾸 이러는지 나는 정말 모르겠네요.”
에블린의 시선이 바닥에 떨어진 그녀의 손수건에 닿았다.
“동정과 호의도 구별 못 할 만큼 한계에 몰렸다고 생각해야 할까요? 그런데 한 게 뭐 있다고? 실제로 일을 해결한 건 나잖아요. ”
체이서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지만, 에블린은 그의 기분이 나빠진 것을 느끼며 말을 마무리했다.
“오라버니, 이런 소리 듣기 싫으면 제발, 부디 잘해 주세요. 내가 나서지 않고 조용히 살 수 있게.”
그녀는 일부러 마지막 말에 강조하고는 더는 상대하기 싫다는 듯 휙 몸을 틀었다.
뒤에서 시선이 느껴졌으나 에블린은 굳이 돌아보지 않았다.
그녀의 하녀들이 후다닥 뒤를 따라붙으며 물었다.
“아가씨, 의사를 불러올까요?”
“고작 이 정도로 무얼.”
“하지만 혹시 흉이라도 나면 어찌합니까. 고운 손에 상처라도 나셨으면 이 넬라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플 겁니다.”
“넬라, 내가 괜찮다잖아.”
막 방 앞에 도착한 에블린은 귀찮게 달라붙는 그녀를 싸늘히 바라보다 움찔하는 그녀의 모습에 다시 빙긋 미소를 지었다.
“괜찮으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 요새 능력을 과도하게 사용했는지 많이 피곤하더라고. 혼자 쉬고 싶으니 내가 부를 때 와 주렴.”
“예, 그럼 식사는 어떻게 해 드릴까요?”
“오늘 저녁은 생각 없어. 이 기분으로 가족들 얼굴 마주하며 먹고 싶은 생각은 더더욱 없고.”
이런 대답을 예상했는지 넬라가 알겠다 답하며 고개를 숙였다. 답을 들은 에블린은 그대로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아 버렸다.
그리고 꼿꼿이 세웠던 몸을 무너트리고선 흐느적거리며 힘겹게 침대로 걸어가더니 그대로 제 몸을 침대 위로 던졌다.
‘힘들다.’
성격에 맞지도 않는 연기를 하려고 하니 이렇게 방에만 들어오면 언제나 온몸의 진이 빠지고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조금 전처럼 누군가와 대척하고 빈정거리며 신경질을 내는 건 에블린의 성격과는 너무 멀어 연기하기가 힘들었다.
그럼에도 살아가기 위해서 해야 했고, 그녀가 그리는 미래를 위해서는 완벽한 모습을 연기해야 했다.
‘그런데 우리 사이가 어쩌다 이렇게 되었더라.’
에블린은 밀려오는 잠에 눈이 가물가물 감기는 것을 느끼며 이곳에 처음 왔을 적을 떠올렸다.
지금껏 마주한 적 없는 화려한 저택,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많은 사용인 그리고 그들의 중심에 서 있는 태산같이 거대하고도 두려운 사내.
‘왜긴 왜야, 더스틴 루이사 때문이지.’
현 루이사 공작인 더스틴 루이사는 루이사의 시험에서 합격한 세 명의 아이를 자신의 아이로 받아들였다.
공작이 아이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직접 직계 아이들의 이능력 교육을 맡겠다는 것이었으며, 이를 통해 차기 루이사 공작을 결정하겠다는 큰 의미가 담긴 행동이었다.
그리고 본격적인 교육이 시작함에 앞서 그는 루이사의 이름을 받은 세 아이에게 목줄을 채웠다.
‘내 허락 없이 능력을 함부로 사용한다는 게 어떤 결과를 일으킬지 먼저 배워야 할 필요가 있겠지.’
그는 루이사의 시험장을 불태운 세 사람을 용서하지 않았고, 그들에게 저주를 내렸다.
힘을 쓸 때마다 이성을 잃어버리는 것은 기본이었고, 훈련에서 힘을 과도하게 사용하면 능력의 폭주가 이를 정도로 서서히 미쳐 가도록!
능력에 대한 거부감을 심어 줌과 동시에 몸과 정신을 괴롭히는 고통을 조절해 줄 수 있는 이는 더스틴뿐이라는 두려움도 함께 각인시켰다.
하지만 여기에 숨겨진 비밀이 있었으니.
‘에블린, 이 저주는 너에게는 사용하지 않을 거란다. 너는 내가 가장 믿는 아이니까.’
저주는 에블린을 제외한 체이서와 블러드윈에만 내려진 것이었으며, 그는 자신의 속마음을 그녀에게만 알려 주었다.
‘나는 네가 다음 후계자가 되었으면 좋겠구나. 폭력적이고 야만적인 방법이 아니라 진정으로 가문을 포용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이가 되었으면 해.’
‘왜 하필 저인가요? 제 이능력은 가문의 성장에 전혀 도움이 안 될 텐데요.’
‘그럴 리가. 네 이능력이야말로 아주 훌륭하고 멋있단다! 그러니 자신감을 가지렴. 너는 할 수 있단다.’
믿음, 신뢰, 그리고 있어서는 안 될 애정.
매번 보여 주던 감정적인 모습이 아니라 멀쩡한 성인의 모습에 어린 에블린은 혼란스러웠다.
그러면서도 어린 마음에 조금 기뻐하기도 했다.
별것 아니라 여긴 이능력이 인정받았고, 앞으로 정말로 체이서와 블러드윈의 옆에 당당히 설 수 있다는 것에 설레기도 했었다.
언제나 이능력을 어려워하며 풀 죽어 있는 에블린을 향한 위로라 생각하였다.
하지만 그건 순진했던 에블린의 착각이었다.
그때부터 시작된 편애는 은연중에 이루어지다 이내 체이서와 블러드윈을 앞에 두고서도 대놓고 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더스틴이 그녀를 가까이 두면 둘수록 두 사람과는 거리가 멀어져 갔다.
에블린이 돌아가는 상황이 이상해진 것을 알아채고 관계의 개선을 위해 노력했으나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두 사람을 감싸면 감쌀수록 더스틴의 적의는 더욱 커졌고, 훈련이라는 이름의 학대가 이루어졌다.
에블린이 두 사람을 안타까워하고, 슬퍼하면 할수록 그들의 고통은 늘어날 뿐이었다.
차마 왜 그러느냐고 묻지도 못하고 괴로워하고 있는 에블린을 향해 더스틴은 친히 직접 자기 행동에 관해 설명해 줬다.
‘네가 못하니 내가 해 주는 것이다.’
‘루이사의 이름을 받은 이들은 어차피 모두 적이란다. 머지않아 그들도 너를 적대시하고, 가주가 되기 위해서 너를 죽이려 들것이다.’
‘그러니 에블린, 마음을 굳게 다지렴. 너는 가주가 되어 이 가문을 이어받아야 할 이니까.’
에블린은 그의 바람과 다르게 가주가 되고 싶지 않았다. 조용히 두 사람과 가족이 되어 평화롭게 살고 싶었을 뿐.
위로해 주는 말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모두 그의 진심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에블린은 뒤늦게 더스틴의 뜻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였으나 결국 상황은 그의 의도대로 흘러갔다.
두 사람의 눈에 에블린을 향한 원망이 서리자 그녀는 자신이 다정히 대하면 대할수록 그들에게 가해지는 고통이 커지는 것을 깨달았다.
더스틴은 참으로 잔혹한 방법으로 에블린에게 교육을 시킨 것이다.
자신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네가 소중히 여기는 저 두 사람은 영원히 괴로울 거라고.
에블린은 두 사람의 원망과 증오를 버틸 자신이 없었다.
심지어 가혹한 더스틴의 감시 아래 원래의 성격대로 사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에블린이 두 사람을 적대하지 않는다면 더스틴의 적대가 더욱 커졌으니 말이다.
그 후로 에블린은 자신의 원래 모습 위에 가면을 씌워 연기를 하며 살아야 했다.
더스틴의 뜻대로 가주가 되기 위해서.
가주가 된 후 체이서에게 자리를 돌려주고, 더스틴에게 얽힌 그들의 속박을 풀어 주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