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5화
기껏 즐기러 온 휴가인데 더는 체이서가 신경 쓸 문제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아쉽네요. 황후 폐하께서 새로 시녀를 들일 계획이라 하셔서 이번에 영지에 내려온 김에 좋은 이가 있다면 추천해 볼까 하였는데…….”
에블린은 일부러 체이서에게 다가가던 발걸음을 멈추고서는 고개를 반쯤 돌려 멍하니 있는 그들을 바라보았다.
“이곳에 모인 영애들은 모두 결혼이 목적인 것을 보니 시녀 직으로는 어울리지 않겠어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지요.”
그 말 끝마치자마자 에블린은 망설임 없이 뒤를 돌았다. 등을 지고 있음에도 모인 여인들이 모두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당황스럽겠지. 황후 폐하의 시녀라면 공작의 첩보다는 더 좋은 권력을 붙잡을 수 있을 테니. 무엇보다 곁에 있다가 황후 폐하께서 직접 좋은 혼처도 정해 줄 텐데 훌륭한 남편감을 직접 발로 찼으니 꽤나 당황스러울 거야.’
그래도 제가 귀족으로서 적응하기는 했나 보다.
이렇게 바로 없는 거짓말도 생각나는 것을 보면.
“저 부, 부인…….”
어머니가 나설 때는 부끄러운 표정으로 조용히 있던 영애들이 뒤늦게서야 말을 붙여 보았지만, 에블린은 그들에게 조금의 시선도 주지 않았다.
“벌써 해가 저물고 있네요. 그대들도 더 늦기 전에 저택으로 돌아가도록 해요. 우리는 다음 일정을 소화해야 하니.”
에블린은 체이서의 앞에 도착하자 당당하게 그에게 손을 내밀었다.
체이서 또한 고민하지 않고 그대로 손을 받아들고서는 그녀의 손등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간지러운 촉감과 함께 조금 전과 달리 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퍼져 나갔다.
“급한 일은 모두 끝냈으니 남은 휴가는 함께 즐길 수 있을 거야. 기다려 줘서 고마워.”
“고맙긴요. 아내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인걸요. 그보다 조금 추운 것 같지 않나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체이서가 자기 외투를 벗어 에블린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감기에 걸릴지도 모르니 어서 들어가도록 하지.”
체이서는 안타까운 얼굴로 서 있는 이들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고 그대로 에블린을 이끌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
어느새 해는 지고 어둠이 복도에 얕게 깔렸다. 벽에 걸린 은은한 랜턴의 연노랑 불빛만이 복도에 따스한 빛을 비춰 주고 있었다.
그리고 이 조용한 복도에는 두 사람의 발소리만 울리고 있었다.
체이서는 평소와 달리 무표정으로 앞을 보고 걷는 에블린의 모습이 퍽 당황스러운 상태였다.
‘화가 났나?’
다행히 이상한 오해를 한 건 아닌 것 같았지만 대놓고 자신을 무시하고, 모욕하는 말을 들었으니 기분이 나쁜 게 당연했다.
‘그래서 벌을 주려고 했던 건데.’
사교계의 법도 때문에 직접 나선 모습이 당차게 여겨지다가도 홀로 상처받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미안할 뿐이었다.
‘자꾸 미안한 말만 하게 되네. 이러려고 여행을 온 게 아닌데.’
체이서는 처음 공작령에 도착했을 때 에블린이 보인 표정을 떠올렸다.
볼에 옅은 홍조를 띤 채 마차 창밖 너머 비치는 호수를 보며 환히 웃던 기쁨에 찬 모습은 충동적으로 여행을 결정했음을 후회하지 않게 해 주었다.
그간 힘든 일을 많이 겪으며 고생하였기에 이 여행이 에블린에게 편안함을 안겨 주기를 바랐다.
여행 내내 즐겁고 행복한 미소만 짓게 해 줄 것이라며 굳게 다짐했건만 어째 공작령에 도착하고서부터 계획이 삐걱거리는 것 같다.
‘가신들도 그렇지. 설마 그렇게 죽치고 기다리고 있을 줄 몰랐고.’
적당히, 융통성 있게 꼭 필요한 서류만 보내라 했더니 그들이 서류를 직접 들고 찾아와 기다리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또 귀부인들이 몰려와 급히 드리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며 긴히 청하길래 들어 주었더니 첩에 관한 이야기를 꺼낼 줄 누가 알 있겠냔 말이다.
‘에블린에게 파티를 주최해 달라 부탁이나 해 달라 할 줄 알았더니.’
이럴 줄 알았으면 모두 다 무시하고 가족끼리 즐거운 시간만 보낼 것을 그랬다.
즐겁게 해 주고자 싶어 떠나온 여행이 에블린에게 실망과 아쉬움을 안겨 준다면 그건 그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뜻했다.
“미안해, 에블린.”
침묵을 깨고 나온 사과에 앞서 걷던 에블린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뭐가요?”
“나 때문에 듣지 않아도 될 소리를 들었잖아.”
“……그게 왜 체이서 때문이에요? 그런 생각을 한 것도 그 사람들, 그 말을 내뱉은 것도 그 사람들인데?”
하지만 다정한 말과 다르게 그녀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답하고 있었다.
평소와 달리 눈을 마주쳐 주지 않는 모습은 꼭 선을 긋는 것 같은 태도라 체이서는 억울함이 물씬 들었지만, 그럼에도 잘 참아 내고선 뒷말을 이었다.
“즐겁게 해 주고 싶어 데려온 여행인데 어째 하나같이 다 별로인 것 같아서 하는 말이기도 해.”
목소리에 속상함이 가득 담겨 있었다.
에블린은 슬쩍 뒤를 돌아 그를 살펴보다가 눈이 마주침과 동시에 다시 고개를 빠르게 원위치시켰다.
“……오고 싶었던 여행인데 쓸데없는 짓이었던 것 같네. 가신들부터 시작해서 말이지.”
답지 않게 자신감 없는 태도를 보니 평소보다 많이 미안함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가신들 이야기가 나와서 묻는 건데요. 남은 이들 중 가문의 비밀에 대해 아는 이는 없었나요?”
“트렐로니 백작을 처리하며 모두 깔끔히 정리했어. 혹시나 하고 주의 깊게 살펴봤지만 그런 기미는 보이지 않았고.”
“그렇다면 된 거죠. 영지 일도 하고, 빌어먹을 루이사의 비밀 건도 다시금 확인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이렇게까지 위로했음에도 체이서의 풀 죽은 모습이 떠나지 않았다.
매번 넘어지지 않을 것처럼 강인한 사내가 저리 기운 없어 하니 자꾸만 눈길과 마음이 그리로 쓸렸다.
‘당장 가서 위로해 줘야 할 것 같은데…….’
문제라면 에블린에게 있었다.
붉은 러넌큘러스 꽃다발을 들고 있는 그의 모습이 너무도 아름다워서, 제가 선물해 준 꽃다발을 소중히 품고 있는 모습이 귀여워서, 그대로 덮쳐 버릴 것 같은 마음이 불쑥 치솟아서 말이다.
“원래 충동적으로 했을 때 생기는 불편함도 어느 순간부터 재미가 되거든요.”
에블린은 눈을 마주치지 않은 채 최대한 따뜻한 위로의 말들을 진심 가득 담아 던졌다.
“무엇보다 아직 남은 기간도 많으니 그때 좋은 추억 쌓고 돌아가면 되잖아요?”
“…….”
“왜 답이 없지? 싫은가?”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반응이 없자 에블린의 목소리가 살짝 올라갔다. 그런 그녀와 달리 체이서는 평소보다 조금 더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싫은 건 너 아니고?”
“네? 안 싫다니까요?”
“그런데 왜 고개도 안 돌리는 거지? 화가 났으면 화가 났다고 솔직히 말해 줘. 그래야 내가…….”
체이서의 말은 채 이어지지 못했다.
고개를 돌린 에블린이 그대로 체이서의 품에 얼굴을 묻은 채 와락 안긴 탓이었다.
“……뭐 하는 거지?”
“고개 돌려 달라면서요.”
“이게 고개를 돌린 건가?”
“눈만 안 마주쳤을 뿐이지 어쨌든 돌린 거예요.”
맞닿은 가슴 사이로 빠르게 두근거리는 소리가 울려왔다.
‘화난 게 아닌가?’
체이서는 당황하면서도 그대로 에블린의 등에 팔을 둘러 그녀를 끌어안았다.
따스한 온기와 더불어 익숙한 몸 냄새에 절로 마음이 편안해지고, 품에 안은 보물을 놓고 싶지 않아졌다.
“있죠, 이 여행은 충동적이지만…….”
조용히 그의 품에 얼굴을 묻고 있던 에블린이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제야 마주친 눈 안에는 뜨거운 열기가 담겨 있었다.
“꽃 사 온 건 충동적 아니에요.”
“…….”
두근거리는 소리가 몸을 타고 귓가까지 타고 들어왔다.
아니, 이 소리는 에블린의 심장 소리가 아니라 빠르게 뛰기 시작한 체이서 본인의 소리였다.
그는 그제야 에블린이 왜 저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는지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설마 부끄러워서 뒤돌아 있었던 건가?”
“비슷해요.”
“갑자기?”
“이러고 싶어서.”
에블린은 까치발을 들고 그대로 체이서의 입에 입을 맞추었다.
그녀의 얼굴은 옅은 분홍빛만 맴돌고 있었지만, 귀는 터질 것처럼 빨갛게 불타고 있었다.
“그리고 또 이러고 싶어서.”
눈을 마주치고 나니 두려운 것이 없는지 에블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체이서의 셔츠 자락을 붙잡았다.
그리고는 가볍게 단추를 풀고서는 그의 어깨를 가볍게 물었다. 잠시 후 그녀가 입술을 떼니 물었던 부분이 티 나게 붉게 물든 것을 보고 만족스럽게 웃고 있었다.
“꽃을 든 모습은 왜 이렇게 잘 어울려서 사람의 마음을 막 안달이 나게 해요?”
뿌듯한 미소도 잠시, 에블린은 억울한 목소리를 내었다.
“나만 안달 나는 것 같…….”
하지만 그녀의 말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그대로 에블린의 머리와 등을 휘감은 커다란 손이 그녀를 그의 품으로 당겨 안았고, 그대로 입술을 훔쳐 버렸다.
달뜬 숨 너머 체이서의 눈으로 공작령에 도착 전 마차에서 보았던 욕망이 다시금 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