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4화
돌아오는 길만 해도 기분이 좋았다.
꽃을 전해 주고, 휴가임에도 서로 하하 호호 웃으며 함께 어울리지 못한 만큼 남은 하루는 그의 시간을 온전히 제 것으로 할 생각이었다.
남은 휴가는 절대 뺏기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까지 하고 왔건만,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마주한 광경에 에블린의 미소는 그대로 굳어 버리고 말았다.
‘여자?’
멀지 않은 곳, 우뚝 서 있는 체이서의 옆으로 아리땁게 치장한 여인들이 몰려 있었는데, 그들 곁에는 제법 나이가 있는 귀부인들도 함께 있었다.
‘내가 왔는데 눈치도 못 채?’
주변에서 어찌나 말을 자꾸 거는지 체이서는 에블린이 온 것도 모르는 것 같았다.
‘기사단장직 내려놓으셔야겠네.’
못마땅한 상황에 불쑥 화가 치밀어 올랐지만, 여자들과 이야기하는 모습에 질투 났다며 일방적으로 화낼 수는 없었다.
그저 제 기분이 조금 상할 뿐이지.
에블린은 감춰도 스멀스멀 흘러나오는 질투를 최대한 차분히 숨기고서는 입가에 미소를 만들었다.
“제리, 먼저 방에 돌아가 있으렴.”
“웅?”
금방이라도 체이서에게 달려갈 기세인 제리의 옷을 붙잡고서는 호위로 따라온 기사에게 제리를 안겨 주었다.
“잠시 아빠랑 할 이야기가 있어서. 금방 돌아갈 테니 씻고 같이 맛있는 저녁 먹자?”
“알게써요.”
제리는 빙긋 웃고 있는 에블린과 멀리 여자들에게 둘러싸인 체이서를 번갈아 보더니 아직 어린 나이임에도 무언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모인 여자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져 있었고, 분위기는 화기애애해 보였다.
체이서도 웃음을 짓고 있었지만 가식적인 미소였다.
예전에 에블린에게 착한 척하며 세상 다정하고 친절한 척했던 그 모습 말이다.
공작령에 주인이 방문했으니 이런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것은 어느 정도 예상했었다.
‘이런 자리에 젊은 영애들과 귀부인들이 모여 있다면 이유는 하나뿐이지.’
걸음 소리를 죽이고 등을 보이는 체이서 쪽으로 다가가니 아니나 다를까 에블린의 예상대로 뻔한 이야기들이 오가는 게 들렸다.
“이 아이가 제법 교육을 잘 받아 공작님을 모셔도 불편하지 않을 겁니다.”
“대대로 내려오는 공작님들께서는 첩을 두지 않으셨지만, 그거야 모두 후계자가 있었을 때 이야기가 아닙니까.”
“예, 그러니 혹시 모를 때를 대비하여 이리 말씀드리는 겁니다. 제 딸아이는 공작 부인 또한 잘 모실 거고요.”
“어머, 렉센 영애는 아직 너무 어리죠. 공작 부인에게 새로운 딸이 생겼다는 소문이 돌지 않겠어요?”
“그런 미트리 영애는요? 얼마 전 약혼자가 일방적 파혼을 요구했다던데 평판에 문제가 있지 않겠어요?
네 명의 귀부인은 사르르 녹아내릴 것 같은 미소를 지으며 사근사근 말하고 있었지만, 서로를 깎아내리기 정신이 없어 보였다.
“제 아이는 산파가 아이를 잘 낳을 몸이라 하더군요. 분명 공작가에 큰 보탬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귀부인들의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뒤에 있는 영애들의 표정은 점점 더 어두워져 갔다.
‘아무렴. 누군가의 첫 번째 부인도 아니고 첩으로 데려가 달라고 저러고 있으니 얼마나 속이 타겠어.’
심지어 체이서와 에블린은 세기의 사랑으로 유명했으니 찬밥 신세가 될 것을 그들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부모님은 딸들과 달리 명예와 권력만 챙기면 된다고 생각하겠지만.’
참 이런 걸 보면 귀족 사회는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바이아르도 가에서 자라 오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길 정도로 말이다.
그때, 조용히 미소 짓고 있던 체이서의 입이 열렸다.
“그대들은 내가 그저 종마로밖에 안 보이나 보군.”
미소진 얼굴로 내뱉은 차가운 목소리에 제 딸자식을 자랑하던 이들의 말이 뚝 하고 멈추었다.
“미리 방문 요청도 없이 일방적으로 찾아와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길래 무엇인가 잠자코 들었더니. 하, 첩을 들이라고?”
기가 찬다는 듯 짧게 터진 실소에 단번에 분위기가 낮게 가라앉았다.
체이서는 이 상황이 너무도 어이가 없었다.
기껏 휴가라고 왔더니 밀린 일을 들이미는 가신들이야 영지를 위한 일이네 감수할 수 있었다.
가신들을 받아 주었더니 용기라도 났는지 감히 루이사 공작에게 연락 한 통 없이 찾아와 예의 없이 제 여식을 들이미는 이들의 모습이라니.
수도와 거리가 멀어서 그런지 좋게 말하면 귀족치고 순진했고, 나쁘게 말하자면 매우 어리석었다.
앞에 있는 이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였으니 말이다.
그들의 건방진 작태는 체이서의 분노를 일으키기 충분했다.
“언제부터 공작가를 모시는 이들이 건방지게 훈수를 두었는지 모르겠군. 누가 보면 그대들이 내 어머니인 줄 알겠어.”
체이서의 얼굴에는 어느새 미소가 사라진 상태였으며, 서늘한 눈빛으로 그들을 응시하며 경고했다.
“내 어머니도 이리 유난을 떨지는 않았을 텐데. 우습지 않나? 황후 폐하께서도 하지 않는 말을 감히 그대들이 하다니.”
그가 무엇보다 더 화가 난 이유는 따로 있었으니 바로 뒤에서 느껴지는 익숙한 기척 때문이었다.
작은 보폭, 일정한 속도로 가볍게 내딛는 발소리. 익숙하고도 언제나 끌어안고 싶은 욕망을 일으키는 향기까지.
분명 에블린이 등진 그의 주위에 있었다.
뒤돌고 있는 체이서와 달리 똑바로 마주하고 있는 주제에 공작 부인이 도착한 것도 알아차리지 못한 이들은 계속해서 어리석은 소리를 지껄였다.
차라리 적이었다면 단번에 베어 버리기라도 했겠다만 아쉽게도 체이서가 이 자리에서 할 수 있는 건 단순한 경고뿐이었다.
“조금 전의 이야기는 그대들의 남편들도 아는 이야기인가?”
귀부인들로부터 답이 없었다.
“썩은 물을 빼냈더니 새로 들어온 물이 이렇게 빨리 썩을지 몰랐는데.”
부인들이 답하지 않아도 상황은 변치 않았다. 그녀들은 이미 입에 담아서 안 될 말을 내뱉었고, 그걸로 공작 내외의 기분을 상하게 했으니 마땅한 벌을 받게 될 것이다.
가신들의 대부분을 내쳤던 것을 알고 있는 그녀들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계속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문 그녀들의 모습에 체이서는 더 화가 치밀어 올랐다. 다가오던 에블린의 발걸음이 멈추었다.
이대로 멀리서 상황만 지켜보고 이상한 오해를 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조급해졌다.
“제 집안의 사람들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는 이들이 영지는 어떻게 관리하겠다는 건지. 과분한 자리를 지고 잇느라 집안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는 모양이야.”
그제야 부인들이 우물쭈물하며 무어라 답변하려 했지만, 그는 더 이상 들어 줄 여유가 없었다.
“공작 부인 앞에서 할 소리가 있고, 못할 소리가 따로 있지.”
체이서의 말에 순간 부인들의 눈에 의아함이 서렸다. 그건 에블린 또한 마찬가지였다.
‘뭐지?’
에블린이 이상함을 느낀 순간 체이서가 뒤를 돌아보았고, 에블린은 그가 자신이 도착한 것을 알고 있었던 걸 깨달았다.
“도착했으면 말을 하지 뭐 그리 좋은 말이라고 다 듣고 있어.”
“제가 온 걸 알고 있었어요?”
“내가 네 기척을 못 느낄 리가 없잖아.”
‘기사단장직 반납은 취소.’
에블린은 속으로 내뱉은 발언을 취소하고서는 슬쩍 지어질 뻔한 미소를 참았다.
이 상황에서 미소를 짓는 것만큼 멍청한 행동은 없을 것이다.
에블린의 시선이 굳어 버린 여인들에게로 향했다.
이 상황에서 사이좋은 모습을 보여 준다면 저들의 마음은 좀 편안해질 것이다. 하지만 모욕적인 말을 들은 그녀가 그것까지 신경을 써 줄 필요가 있을까?
‘없지.’
“휴가를 왔으니 조용히 지내고 가려고 했건만. 당신 주위는 조용해질 틈이 없네요.”
“부인, 저희는 그런 것이 아니라…….”
에블린은 입을 뗀 여인을 차갑게 쏘아보았다.
“이 상황에서 꺼낼 변명이 있던가요? 이리 눈치 없으니 그런 말을 직접 꺼낸 건가 싶기도 하고.”
“……아닙니다. 무례를 보여 죄송합니다, 부인.”
에블린은 사과하는 그녀에게 시선 하나 주지 않고 뒤로 숨겼던 꽃다발을 꺼내었다.
“당신 주려고 사 온 것이니 줄게요.”
붉은 러넌큘러스를 받은 체이서의 표정에 순간이지만 당황이 스쳐 지나갔고, 이내 기쁨이 번졌다.
이 꽃의 꽃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이기에 에블린이 무슨 마음으로 이 꽃을 사 온지도 이해했을 것이다.
하지만 에블린은 체이서에게 시선을 주지 않고 꽃다발을 건네고선 나서지 말라는 듯 그의 손등을 톡톡 두드리고는 그대로 쓱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는 옹기종기 모여 있는 여인들을 조용히 응시하더니 이내 고개를 돌렸다.
여인이 일으킨 문제는 같은 여인이 해결하는 것이 사교계의 암묵적으로 행해진 법이나 다름없었다.
이 문제를 체이서가 직접 해결하게 하면 사교계에 소문이 떠들썩하게 날 것이다.
좋게는 애처가, 나쁘게는 여인의 문제인데 유난이라고.
‘그건 가만두고 볼 수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