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3화 (138/159)

외전 13화

“우리 어디로 가는 거예요?”

“가 보면 알아.”

“가 보면 아라!”

에블린의 물음에 체이서가 답하니 그걸 제리가 그대로 따라 했다.

서로 마주 보며 씨익 미소를 짓는 것은 두 사람이 사이가 퍽 가까워진 것을 보여 주었다.

‘언제 저렇게 친해졌담.’

에블린 몰래 공모까지 하고 여행 계획을 세우다니. 살짝 질투까지 날 정도다.

‘그보다 여행이라.’

수도를 빠져나오니 마차 밖이 조용해진 게 느껴졌다. 정말로 멀리 여행을 떠난다는 현실에 기분이 살짝 들뜨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기는 하지만 이왕 가는 여행, 좋은 추억 쌓고 와야겠다.’

이번 생에 제대로 여행도 가 본 적이 없었다 보니 작게 피어난 기대감이 서서히 부피를 키워 갔다.

‘겸사겸사 머릿속의 음흉한 생각은 좀 털어 내고.’

욕망에 물들어 괴로워하던 자신과 달리 이리 건전한 계획을 세우는 체이서를 좀 본받고 말이다.

***

목적지도 모른 채 무려 사흘을 이동하여 도착한 곳은 해양도시 밀레니아였다.

루이사 령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곳으로 해양도시이자 관광지, 휴양지이자 바로 루이사 공작성이 있는 도시기도 했다.

“당신은 일 귀신이 붙기라도 했어요?”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제 허벅지를 베고 잠든 제리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던 체이서가 고개를 들고 물었다.

“기사단 휴가 내고 여행을 왔나 싶더니 공작령이라니. 오래간만에 공작성에 왔으니 해야 할 일이 잔뜩일 것 아녜요.”

“훌륭한 가신들이 알아서 잘해 주고 있는데 내가 뭣 하러?”

무책임한 말 같지만 분명 진심이 가득 담겨 있었다.

“가신들을 효율적으로 움직이기 위해 내가 무슨 짓까지 했는지 누구보다 네가 잘 알잖아.”

“아아, 깜박 잊고 있었는데 누구 덕에 생각났네요.”

에블린이 체이서를 가볍게 흘겨보니 그의 표정이 평소보다 미세하게 어두워졌다.

“…….”

“괜한 말 했다고 생각하고 있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에 에블린은 창문에 턱을 괸 채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서 깔끔히 정리한 뒤로 가신들이 잘해 주고 있어요?”

“제법 쓸만해.”

말을 돌리니 굳은 표정이 풀리는 게 보였다.

“잘하나 보네요. 당신이 그런 칭찬을 하는 걸 보면.”

도개교 아래로 바다와 연결된 넓은 호수가 햇빛에 비추어 반사되며 제 존재감을 과시했다.

‘예쁘다.’

부서질 듯 아름답다는 말이 확 이해될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에 에블린은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다가 물었다.

“이곳에서 얼마나 머물 거에요?”

“일주일 정도 예상하지만…….”

에블린이 창밖에 시선을 뺏긴 것을 발견한 체이서는 미소를 지으며 마저 덧붙였다.

“더 있고 싶으면 더 있다 가도 돼. 여기는 호수도 아름답지만 바다가 유명해. 물론 추운 날씨라 바다에는 못 들어가겠지만 겨울 바다도 제법 멋지다고 하니까.”

“당신은 겨울에 바다에 와 본 적 없어요?”

“내가 올 시간이 있었을 리가.”

대수롭지 않게 답했지만, 그가 보낸 어린 생활이 고통스러웠을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에 괜한 질문을 던진 것 같았다.

“그럼 우리 같이 바다에 가요. 바다에 못 들어가도 해안가는 걸을 수 있잖아요. 차가운 바닷바람도 맞아 보고, 감기도 걸려 보고 그러죠 뭐.”

“네가 감기 걸리는 걸 두고 보고 있으라고?”

“왜 당신은 안 걸릴 거라고 생각하죠?”

“난 원체 체온이 높아서 감기 걸릴 일 없어.”

“그럼 당신 옆에 딱 붙어 있으면 되죠. 감기 안 걸리고 좋게.”

창문에서 시선을 뗀 에블린이 살짝 허리를 굽혀 체이서의 얼굴 가까이 다가갔다.

“그리고 옮길 수도 있고요.”

촉 하고 가벼운 소리가 날 정도로 입을 맞추니 그의 눈이 살짝 크게 뜨였다. 이내 사르르 짓는 미소는 조금 전 보았던 호수보다 아름다워 다시금 에블린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제리도 잠들었으니 조금 더 깊게 입을 맞춰도 되지 않을까?’

체이서 또한 에블린과 비슷한 생각을 하는지 그의 얼굴이 가까워져 갔다.

에블린은 천천히 눈을 감았고, 그대로 제 입술에 닿는 따뜻한 온기에 만족스럽게 미소를 지었다.

‘큰일이다.’

음흉한 생각을 좀 털어 내려고 왔는데 이상하게 오히려 닿으면 닿을수록 부족하게 느껴진다.

‘나만 이러는 걸까?’

문득 그런 걱정을 하며 눈을 떴을 때, 에블린은 마주한 체이서의 눈빛을 읽고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무언가 강렬히 열망하는 눈빛은 금방이라도 에블린을 잡아먹을 것처럼 거세게 불타고 있었다.

“젠장…….”

낮게 끓는 목소리에는 숨길 수 없는 열기가 느껴졌다.

“한 번 더 해 주면 안 돼요?”

“너는 내가 무슨 마음인지 모를 거야.”

너무 빠르게 떨어져 아쉬움에 꺼낸 말이었으나 조금 전보다 더 깊은 입맞춤이 이어졌다.

숨을 쉬기가 어려워 달뜬 숨을 내뱉고 있었지만 괴롭기는커녕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저만 이런 마음을 품은 게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에 느껴지는 안도감, 괜한 고민을 해 왔다는 아주 작은 후회 그리고 앞으로의 여행이 미치도록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마차가 공작성에 도착하기 전까지 조용히 서로의 입술을 탐하며 서로의 눈에 서린 욕망을 읽었다.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두 사람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무언의 확신을 하며.

***

‘마음이 맞으면 무얼 하나.’

햇살이 펼쳐진 해안가의 한 카페, 에블린은 창가에 앉아서 속으로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가신들이 있어 괜찮다고 말했던 체이서의 말은 모두 거짓말이었다.

체이서가 공작령에 방문한다는 소식에 근처의 가신들이 모두 모여 그를 반기기 위해 모였다며, 일거리를 잔뜩 들고 왔더라.

공작의 확인과 서명이 필요한 서류가 잔뜩이라는 말에 차마 거절도 하지 못하고 휴가의 ‘휴’자도 겪기 전에 일터로 반강제로 끌려가 버렸다.

졸지에 덩그러니 남겨진 에블린과 제리는 단둘이 먼저 여행을 즐기게 되었다.

눈은 즐겁지만, 마음은 한구석이 불편한 그런 여행을 말이다.

‘그것도 벌써 이틀째…….’

일주일의 1/3 가까이가 지나가고 있었다. 이러다 기껏 온 여행이 출장 여행이 될까 봐 무섭기까지 했다.

“엄마, 이것 좀 봐요!”

카페에 앉아 주스를 마시다 갑자기 바닷가 근처로 뛰어나갔던 제리가 볼일을 다 보았는지 와다다 달려왔다.

제리의 뒤로 공작가의 기사 두 명이 다급히 뒤따라왔다.

‘제리가 언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아이기는 하지.’

자신들이 돌보겠다며 당당하게 말했던 기사들의 얼굴은 잔뜩 지쳐 보였다.

‘기운도 넘치고.’

잠시라도 한눈팔면 저 멀리 사라져 있는 게 한두 번 경험하는 일이 아니기에 저 당황한 표정과 진이 빠진 모습이 공감이 가서 웃음이 나왔다.

“기사 형아가 알려 줬는데 조금만…….”

숙여 보라는 제스처에 에블린이 의아해하며 살짝 몸을 기울였다.

그러자 무언가 차가운 게 귓가에 닿았다.

쏴아아 하고 파도가 치는 것 같은 소리가 들려옴에 신나 하며 들고 온 물건이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소라?”

“웅! 저기서 들리는 파도 소리랑 똑같아여!”

“소리가 너무 듣기 좋다. 색도 예쁘네.”

제리는 자기 주먹만 한 상앗빛 소라껍데기를 들고서는 이가 보이게 헤헤 웃었다.

“조금 있다가 아빠도 들려줘두 대요?”

“그럼. 좋아하실 거야.”

에블린은 차가운 제리의 볼을 매만지다가 푸스스 웃고 말았다.

“볼이 빨개져서 사과 같네. 이대로 깨물어도 모르겠어.”

“깨물 거여요?”

“깨물면 아플 텐데? 아주 세게 깨물 거야. 와아앙 하고.”

“그럼 시러요.”

일부러 볼 가까이 입술을 가져가자 새침하게 고개를 돌리며 피하려는 모습이 정말 깨물어 주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에블린은 제리의 볼을 깨무는 대신 오동통한 볼에 몇 번이고 입을 맞춰 주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 그만 돌아가자. 아무리 바빠도 아빠랑 같이 저녁은 먹어야지.”

“우웅.”

해도 지기 시작했으니 그나마 일이 좀 끝났으면 좋으련만.

넓게 펼쳐진 해안가 너머로 붉게 물들어지고 있는 석양이 보였다. 

‘호수와는 또 다른 아름다움이네.’

이 장면을 체이서와 봤다면 더더욱 좋았을 것이다.

에블린은 아쉬움을 삼키고서 돌아가기 위해 마차에 올라탔다. 아니, 타려다 문득 근처에 작은 꽃집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꽃집 바로 앞에 있는 붉은색 러넌큘러스를 말이다.

‘매번 받기만 했으니 내가 먼저 주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사 갈까 말까 고민한 것이 무색하게 에블린의 발걸음은 꽃집을 향해 있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꽃을 사고 품에 안아 들고 있더라.

‘요새 체이서 한정으로 정신을 빼놓는 때가 많단 말이지. 이런 게 사랑인가 봐.’

낯간지러움에 혼자 입을 가리며 웃고 있을 때는 몰랐다. 

성에 들어가자마자 여자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체이서를 마주할 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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