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2화
참 이상하지.
제게 향하는 미소가 아님에도 이상하게 심장이 간질간질했다.
‘뭐지?’
아직 얼굴만 봐도 설레는 사이라고 하지만 평소와는 무언가 미묘하게 달랐다.
에블린은 조용히 체이서를 응시하다가 무심결에 질문을 던져 버렸다.
“체이서, 제리와 지내는 건 좀 어때요? 괜찮아요?”
“음.”
체이서는 심각한 얼굴로 고민에 잠겼다. 쉽게 나올 법한 대답이 아님을 알기에 에블린의 얼굴에 긴장이 어렸다.
체이서는 에블린과 제리를 생각 이상으로 배려해 주고 있었다.
‘애초에 고위 귀족들은 보통 육아에 참여하지는 않으니까. 훈육이라면 모를까.’
체이서는 귀족의 교육을 받으며 자라 왔고, 원래 아이와도 가깝지 않은 이기에 제리가 불편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처음 데려올 때는 친해지지 못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였는데 체이서가 일방적으로 조금 어색해할 뿐이지 둘은 생각 외로 잘 지냈다.
‘블러드윈이랑 데몬스야 삼촌이니 부담감이 덜 하겠지만. 아무래도 부모의 무게는 조금 다르지 않나.’
그는 연기를 잘하는 사람이었고, 제리가 불편해도 일부러 자신을 위해 함께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에블린이 침을 꿀꺽 삼키며 체이서로부터 답을 기다렸다.
어떤 부정적인 말이 나와도 웃으며 받아들이겠다 마음을 먹었건만 한참의 고민 끝에 체이서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녀의 예상에는 없던 말이었다.
“생각보다 어려운데…….”
체이서는 슬쩍 손을 뻗어 제리의 오동통한 뺨을 살짝 건드렸다. 뺨이 쏙 들어가자 뭐가 좋은지 그의 입가에 다시 시원스러운 미소가 퍼졌다.
“또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아.”
좋다, 싫다 확실하게 떨어진 대답은 아니었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대답이어서 더욱 진심같이 보여 신뢰가 갔다.
“제법 즐거워.”
체이서의 대답은 에블린이 아는 체이서 같기도 하고, 아닌 것도 같았다.
보지 못한 모습을 엿본 것 같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런 생각들은 낯선 감정을 일깨우게 했다.
그저 제리를 보며 웃고 있을 뿐인데 이상하게 심장이 빨리 뛰기 시작했다.
“이만 자자. 피곤할 텐데.”
체이서는 가볍게 에블린의 입술에 입을 맞추더니 그대로 누워 눈을 감았다.
‘큰일이다.’
신혼에 서로 떨어지지 못해 안달 난다는 기분, 마야가 말했을 때는 참 아리송한 감정이라 생각했는데 조금 전의 그가 보여 준 미소로 단번에 이해해 버리고 말았다.
***
그날 밤 이후 며칠이 지났지만, 그 마음은 사그라지기는커녕 더욱 활활 불타올랐다.
‘나만 이러는 건가?’
체이서를 만나기 전까지 누구에게도 설레 본 적이 없었고, 성적인 욕구도 가져 본 적이 없었다.
처음으로 가진 욕망은 생각보다 쉽사리 떨쳐 내기가 어려워 여간 곤혹스러운 게 아니었다.
‘내가 문제인 건가?’
그런 에블린과 달리 체이서는 평소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언제나 한 침대에 같이 잘 때에도 편히 잠을 취했고, 아쉬운 모습 하나 보이지 않았다.
‘자기 전이나 일어나서 다정히 입을 맞추는 거야 언제나 해 주지만…….’
예전에는 만족했었다면 이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방법이 없을까?’
마야의 말대로 제리를 다른 침실로 내보낸다면 괜찮아질까도 고민해 봤지만, 그것 또한 쉽지 않았다.
‘너무 노골적인 것 같잖아.’
부부 사이에 뭐 어떻냐 이야기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망설여지니 이것 또한 문제였다.
‘그냥 내가 문제네. 이것도 망설여지고, 저것도 망설여지고. 그런데 하고는 싶고.’
절로 한숨이 나왔다.
‘색욕의 화신이라도 내렸나? 하지만 그때 체이서가 너무……!’
에블린은 그날 밤 체이서의 모습을 떠올렸다가 고개를 떨구었다.
‘진짜 내 모든 것을 받아 준 것 같아 기뻤던 걸 어떻게 해.’
에블린은 고개를 뒤로 숙여 소파에 기대고서는 다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신혼여행을 다녀왔었더라면, 그곳에서 나름의 거사를 치르고 왔다면 이렇게 끙끙거리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여행이라도 가면 좀 괜찮으려나…….”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고민에 빠져 있던 그녀는 몰랐다.
근처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던 제리가 그 말을 똑똑히 들은 것을 말이다.
***
“있죠, 아빠.”
막 목욕을 마치고 나온 체이서는 침대에서 저를 부르는 제리의 목소리에 물기를 채 닦다 말고 침대로 다가갔다.
“왜?”
“우리 여행 가면 안 대여?”
“여행? 가고 싶은 곳이라도 있나?”
제리가 목을 한껏 치켜올려 저를 보는 것에 체이서가 침대 옆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움, 구니까 이건 비밀인데…….”
제리가 욕실 쪽을 슬쩍 보더니 몸을 일으켜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엄마가 여행 가구 시퍼해.”
“에블린이?”
“웅. 혼자 한숨도 쉬고 그래써요.”
“……한숨까지 쉴 정도였다고?”
처음 듣는 소식에 체이서의 눈이 크게 뜨였다.
그간 에블린이 그런 모습을 보여 준 적이 없었고, 그런 고민을 한다고 들려온 소식도 없었기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집에만 이쓰니까 재미없어서 그런 걸지도 몰라.”
“……그런가.”
갑작스러운 말이었지만 이해는 되었다.
에블린은 모든 일이 끝나고 푹 쉬고 한 뒤로 저택에서 조용히 지내고 있었으나 재판으로부터 꽤나 긴 시간이 지났으니 슬슬 이런 생활이 지겨울 법도 했다.
체이서가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에 빠졌다.
‘여행이라. 당장 떠날 수 있는 곳이 있나?’
기사단이야 슬슬 그만둘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 일로는 문제 될 것 없었다.
기사단을 그만두더라도 책임져야 할 일이 많은 것이 문제였다.
“공작령이라도 다녀올까.”
공작성이 있는 도시에는 해안가도 깔려 있으니 제법 신혼여행 분위기를 내기도 좋을 것이다.
‘어차피 일 처리 때문에 한번 다녀오기는 해야 했지.’
가신들이 내려와 달라 사정하는 것을 미루고 있었던 것까지 떠오르니 여행지로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둘만 가도 좋겠지만 제리와 함께 가면 에블린은 분명 더 즐거워할 것이다.
“제리, 바다 좋아하니?”
“바다? 동화책에서 본 적 이써요.”
“바다를 보러 다녀올까?”
“…….”
당연히 뛸 듯이 기뻐할 줄 알았던 제리의 반응이 영 시원치 않았다.
“나는 괜차나요. 그냥 여기 있을래.”
“바다를 본 적 없다면서? 가고 싶지 않아?”
“우움. 움.”
제리는 무어라 말은 하지 못하고 그냥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나 크고 동그란 눈동자 안에는 아쉬움이 한가득하였다.
‘혹시 주변에서 눈치라도 줬나?’
아무리 직계에 입양되었다고 해도 방계는 방계, 후계자로 생각하지 않는 이들이 둘 사이를 방해하지 말라며 안 보이는 곳에서 훈계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르자 절로 기분이 나빠졌다.
‘경고를 좀 줘야겠군.’
체이서는 가벼운 마음으로 제리를 입양한 게 아니었다.
만약 제리가 공작위에 오를 가능성이 있다면 얼마든지 후계자로 지지할 생각도 있었기에 후계자로 삼은 것이었고, 제 의견에 반기를 든 이들이 있다는 사실에 더더욱 불쾌함이 일렁였다.
“가고 싶으면 고개 끄덕여 줄래?”
하지만 체이서는 능숙하게 불쾌한 감정을 숨기고서는 앞에 있는 제리에게 집중했다.
제리는 머뭇거리더니 살짝 고개를 끄덕였고, 그는 잘했다는 듯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럼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가야겠는걸. 언제쯤 가는 게 좋으려나…….”
체이서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고민에 빠져 있을 때, 욕실에서 고민을 안겨 준 이가 나왔다.
따뜻한 물로 목욕했는지 하얀 피부가 살짝 붉게 달아오른 게 보였다.
에블린은 체이서와 제리가 앉아 있는 침대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가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틀었다.
“옷 안 입어요?”
“아.”
그제야 체이서는 그가 대충 매 놓은 로브가 풀려 상반신이 활짝 드러난 것을 발견했다.
“감기 걸려도 몰라요.”
“이 정도로 걸리면 기사단장직 반납해야지.”
체이서는 미소를 짓고서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리, 조금 전 이야기는 우리 둘만의 비밀로 하는 거야. 알겠지?”
“와! 웅!”
마치 두 사람이 작당 모의라도 한 것 같은 모습에 에블린이 이상함을 느끼고 다가왔지만 이미 두 사람은 딱 입을 다문 뒤였다.
***
‘설마 이런 건지는 몰랐지.’
에블린은 마차 앞에 한가득 쌓인 짐들과 신나 어쩔 줄 몰라 하는 제리, 그리고 그런 제리를 안아 들고서 뿌듯하게 미소를 짓고 있는 체이서를 보며 어이없어 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여행 소식을 당일 아침에 알려 줘요?”
“깜짝 놀래켜 주려고.”
“그것뿐?”
에블린의 눈이 새초롬해지자 체이서는 빈손으로 그녀를 품에 끌어안고서는 이마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기쁘게도 해 주고 싶어서. 여행 가고 싶어 했다면서.”
“……내가요?”
“제리가 그러던데?”
“엄마가 그랬잖아! 여행!”
설마 얼마 전 혼자 중얼거렸던 걸 제리가 들었던 걸까?
‘이럴 줄 알았으면 그날 밤 둘이서 무슨 이야기 했냐고 물어보는 건데.’
반쯤 헐벗은 체이서의 모습에 정신이 아찔해 차마 더 캐묻지도 못했던 제 잘못이 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