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0화
제리는 선대 루이사 공작이었던 더스틴의 아우, 제라드 루이사가 잃어버렸던 자식으로 공표되었다.
제라드 루이사는 젊은 나이에 실종이 되었는데 그의 흔적을 찾은 루이사에서 추적하니 그가 사고로 목숨을 잃은 것을 알게 되었다.
어린 손자만 남겨 두고 세상을 떠난 슬픈 사정을 알게 된 체이서가 직접 제 아들로 입양한 것을 가신들에게 알리며 제리의 루이사 입성이 마무리되었다.
그 후로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제리는 정말로 루이사 공작저가 자기 집인 양 가문에 빠르게 스며들었다.
“아냐, 이쪽 말고 저쪽!”
“아, 여기 꽃이 더 예쁘지 않아. 저쪽 꽃보다는 여기 붉은색이 더 예쁘잖아!”
“아냐! 나는 이 색보다 조금 더 연한 게 조아!”
활짝 핀 동백꽃 나무 앞에서 두 사람이 투닥이고 있었다.
소란의 주인공은 블러드윈과 그의 어깨에 올라 목마를 탄 제리였다.
“사이가 좋네.”
에블린은 따뜻한 차 한 잔의 여유를 즐기며 두 사람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말리지 않아도 괜찮을까요?”
곁을 지키던 로피가 걱정스럽게 물었지만, 에블린은 고개를 저었다.
“저러다가 금방 화해할 거란다.”
두 사람이 처음부터 저렇게 투닥거리고 있던 건 아니었다.
에블린과 제리가 함께 정원으로 산책을 나왔고, 두 사람을 발견한 블러드윈이 함께 따라 나왔다.
제리가 꽃을 보며 예쁘다고 감탄하자 블러드윈은 삼촌으로서 모범을 보일 수 있음에 신이 나서 먼저 목말을 태워 주겠다며 제리를 손수 제 어깨에 얹었다.
그리고는 마음에 드는 꽃을 꺾으라며 동백나무 앞으로 갔고, 저 대치가 20분째 이어지고 있었다.
아무리 건장한 사내라고 하나 블러드윈은 본격적으로 몸을 쓰는 기사단 소속도 아니었고, 두뇌파였기에 체력이 저하되는 건 금방이었다.
하지만 먼저 나서서 목마에 태웠기에 힘들다는 이유로 포기하고 제리를 내려 주기에는 삼촌으로서의 자존심이 상했나 보다.
결국 블러드윈은 제리가 빨리 꽃을 고르도록 유도하는 중이었다.
“아니, 솔직히 다 똑같이 생겼는데!”
“저쪼옥!”
결국 지친 블러드윈이 제리의 의견을 무시하고 눈앞의 꽃을 꺾으려 하자 제리가 그의 머리칼을 움켜쥐고선 왼쪽으로 잡아당겼다.
“아야, 아야! 나 아파!”
블러드윈의 진심이 섞인 비명에 에블린이 재빨리 부드러운 목소리로 나긋하게 다그쳤다.
“제리! 삼촌 머리를 그렇게 잡아당기는 건 옳지 않은 행동이란다!”
“네! 삼촌 미안!”
곧 작은 손에 붙잡힌 옅은 금발이 빠르게 자유가 되었다.
“삼촌, 나 저쪽. 저 꽃!”
하지만 제리는 제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머리를 잡아당기며 블러드윈을 조정하는 것에 실패하자 마음에 드는 꽃을 향해 팔을 있는 힘껏 뻗었다.
“위험, 위험해!”
몸이 한쪽으로 기울면서 넘어질지도 모르기에 블러드윈이 기겁하며 빠르게 그쪽을 향해 움직였다.
결국 만족스러운 얼굴로 꽃을 꺾고 나서야 제리는 블러드윈의 어깨에서 내려왔다.
“도대체 누굴 닮아서 이렇게 말썽꾸러기인 거야?”
블러드윈은 자기 어깨를 통통 두드리고 있었는데 그의 얼굴에 생기가 싹 가시고 피곤이 한가득하였다.
“삼촌, 이거 삼촌 거!”
“뭐?”
“삼촌이 도와줬으니까 젤 예쁜 거 줄게!”
하지만 곧바로 제일 예쁘다고 했던 동백꽃을 머리에 달아 주니 언제 피곤했냐는 듯 크게 미소를 지었다.
“아이구, 조카밖에 없다. 자, 얼른 머리에 달아 줘.”
“그런 건 스스로 하는 거야.”
“삼촌은 남이 다 해 주는 대로 살아와서 혼자서 못 해요. 자, 얼른 여기 꽂아 줘.”
“에휴.”
블러드윈의 철없는 모습에 제리가 몸이 들썩일 정도로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곧 익숙하게 그의 머리에 꽃을 꽂아 주고서는 손을 탁탁 털었다.
“됐다!”
“어때, 삼촌 예뻐?”
“웅! 완전 짱 예뻐!”
“아이고, 이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웠데!”
기겁하는 것과 달리 블러드윈은 재미있다며 깔깔 웃었다.
“엄마, 엄마도 이거 해야 해!”
체이서의 아들로 입양이 된 제리는 새로운 호칭인 엄마도 어색하지 않은지 곧잘 부르고는 하였다.
‘잘 적응해서 다행이란 말이야.’
에블린 또한 제리를 업어 키웠던 덕인지 어색했던 호칭이 금방 익숙해지더라.
제리는 도도도 달려와 에블린의 품에 냅다 안겼다.
“엄마도 내가 해 줄게.”
그리고는 야무진 손으로 에블린의 머리에 동백꽃을 꽂고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비밀인데 사실 엄마한테 준 꽃이 젤 예쁜 거야.”
비밀이라기에는 너무 큰 목소리라는 게 문제였지만.
“어, 어떻게. 하나뿐인 내 조카가 내게 거짓말을……!”
과한 반응에 절로 웃음이 흘러나왔지만, 제리는 익숙하게 무시하고서는 그녀의 다리를 끌어안고 배시시 웃었다.
아무리 블러드윈이 억울한 표정을 지어도 관심이 없어 보이는 것에 힘겹게 웃음을 참아야 했다.
“마님, 도련님의 수업 시간이 되었습니다.”
“벌써? 시간이 참 빠르니 아쉽네. 제리…….”
에블린이 제리를 일으켜 세우기도 전에 이미 아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자신을 데리러 온 하인의 옆에 서 있었다.
“엄마, 삼촌! 수업 다녀올게요!”
그리고는 미련도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하인을 따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황망한 얼굴로 제리가 사라진 쪽을 보던 블러드윈이 아련한 얼굴로 에블린의 옆자리에 앉았다.
“하, 뒤도 보지 않고 신나게 뛰어가네. 그깟 수업이 뭐라고 나와 내 조카 사이를 방해해!”
에블린은 익숙하게 무시하며 차를 마셨다.
제리는 루이사 공작가에 정식으로 들어온 뒤부터 천천히 여러 수업받기 시작했다.
언어부터 시작해 이능력 조절, 귀족들이 쌓아야 할 기초 교양 등 다양한 과목을 배우고 있었지만, 그중 음악과 관련된 수업을 제일 좋아했다.
그리고 오늘은 피아노 수업을 듣는 날이었다.
“조카 키워도 소용없다더니…….”
블러드윈은 슬픈 얼굴로 메마른 눈가를 콕콕 찍었다.
물기 하나 없는 얼굴로 우는 척을 하는 모습에 에블린은 어이가 없었다.
“솔직히 블러드윈 네가 아니라 제리가 너와 놀아 준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지 않으신가요?”
“놀랍게도 그런 생각은 들지 않습니다, 형수님.”
뻔뻔한 모습에 에블린은 피식하고 비웃었다.
“아니, 아니. 루이사에서 제리 다음에 제일 즐거운 사람이 누가 봐도 블러드윈 같답니다?”
“육아는 힘들다니까.”
하지만 에블린의 비웃음에도 블러드윈은 자연스럽게 흘려들으며 제 몫의 차를 홀짝이기 시작했다.
“원래 겨울에 정원 쪽으로는 얼씬도 안 했는데 애가 뛰어놀아야 하니 어쩔 수 없이 나오게 되네요.”
“그래도 곧 날이 추워질 테니 야외활동은 자제해야겠죠? 이러다 감기 걸릴지도 모르니까 말이에요. 이럴 때가 아니지. 로피, 주방에 말해서 따뜻한 생강 꿀차를 제리의 방에 가져다주렴.”
“네, 마님.”
“지극정성인 모습 보기 좋단 말, 에취!”
장난스럽게 칭찬을 내뱉던 블러드윈이 연속으로 재채기하였다.
순간이지만 테이블 위로 정적이 내려앉았고, 에블린은 웃음기 어린 얼굴로 추가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블러드윈의 방에도 가져다주렴.”
“아냐, 그 정도는 괜찮……. 에, 에, 에, 엣취!”
블러드윈의 말은 차마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코를 훌쩍이는 소리에 에블린은 머리를 짚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꼭 가져다주고, 다 마시는지도 확인하렴. 그리고 방도 따뜻하게 벽난로를 더 떼는 것 잊지 말고. 아무래도 내일부터는 실내에서 놀아야겠구나.”
추가적인 명령에 블러드윈은 부정하는 대신 입을 꾹 다무는 걸 선택했다.
절대로 재채기를 참는 게 아니고, 제 몸은 감기 따위 걸리지 않는 건강한 몸이라고 스스로를 위안하며 말이다.
***
“다녀오셨어요, 아빠, 삼촌!”
그리고 이 새로운 관계에서 아직 적응하지 못한 한 사람이 존재했다.
체이서는 반갑게 웃으며 뛰어가는 제리를 품에 안아 주면서도 애써 당황한 표정을 숨기고는 했다.
바로 지금처럼.
체이서가 어색한지 쉽사리 입을 떼지 못하고 있자 그와 함께 퇴근한 데몬스가 팔을 벌렸다.
“제리, 오늘은 삼촌을 제일 먼저 맞아 주기로 한 날이에요.”
“아, 맞다!”
물론 그 또한 오래가지는 않았다.
제리가 팔을 뻗기도 전에 체이서가 그대로 제리를 안은 채 걷기 시작한 것이다.
“독점은 치사한 겁니다, 형님.”
“아버지의 권리란다.”
당당하게 데몬스를 무찌른 체이서는 제리를 안은 채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워 갔다.
“그래, 오늘 하루는 어땠는지 얘기해 줘야지?”
“오늘은 피아노 수업해써요!”
사이좋은 두 부자의 모습에 흐뭇하게 바라보며 그들을 뒤따르는데 어째서인지 오늘따라 마야의 표정이 어두웠다.
“마야,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은요. 아무것도 아니랍니다.”
“표정이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걸. 걱정이 있으면 편히 말해도 돼.”
에블린의 물음에 마야는 조금 망설이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뭐지?’
굳게 입을 다물었지만 궁금증만 커질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