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5화
순간이지만 연고를 짚던 체이서의 손이 멈추었다.
앞에 있는 거울로 슬쩍 체이서를 살펴보던 에블린 또한 놀란 그처럼 민망해 고개를 들기가 힘들었다.
‘차라리 내가 발라 주면 마음이 편할 것 같은데.’
아무래도 등 전체에 약을 발라야 하다 보니 등을 드러내야 연고를 바르기가 편했다.
마야가 있을 적에는 망설임 없이 옷을 벗었지만, 아직 초야도 제대로 치르지 않은 남편 앞에서 그렇게 옷을 벗는 것은 에블린으로서는 무리였다.
부끄러운지 조금 전과 달리 머뭇거리는 모습에 체이서는 언제 당황했냐는 듯 기분 좋게 웃으며 슬쩍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부끄럽다면 상체 쪽 옷만 살짝 내리는 건 어때? 앞쪽은 보지 않겠다 약속하지.”
“앞에 거울이 있는데…….”
“그럼 내가 거울 앞으로 가면 되지.”
에블린이 손을 쓰며 막기도 전에 체이서는 빠르게 두 사람의 위치를 바꿔 버렸다.
“이 정도면 된 것 같은데.”
“으으.”
거울을 등지고 앉게 되니 거울 너머 몰래 훔쳐보던 체이서의 얼굴이 더는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까지 나온다면 에블린도 계속해서 거부할 수 없었다.
‘부끄러운 거지 싫은 건 아니니까.’
에블린은 가슴 위의 얇은 리본을 풀고서는 천천히 가운을 풀어 내렸다.
어깨 아래를 감추던 가운이 사라지자 옷 속에 숨겨졌던 새하얀 살결과 옅게 남은 상처가 드러났다.
“……정말 다 나아 가네.”
그가 조심스럽게 상처 위에 손을 얹으니 에블린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
“부끄러우니 어서 해 주세요.”
“그래.”
그녀의 귀가 빨라지고 있는 것을 발견한 체이서는 웃으며 한쪽에 놓인 연고를 들었다.
“아프면 말해야 해.”
그는 아주 조심스러운 손길로 연고를 발라 주었고, 커다란 반창고도 등에 무사히 붙여 주고서 아쉬움을 삼키고는 천천히 손을 뗐다.
“끝났어요?”
“응.”
대답이 떨어지기 무섭게 에블린이 재빠르게 옷을 여몄다. 그래 봤자 얇은 소재인 것은 변함이 없기에 여러모로 위험한 옷이기는 하였다.
‘큰일이네.’
체이서는 애써 난감한 마음을 삼키고서는 그대로 에블린을 안아 들어 올렸다.
“앗!”
깜짝 놀란 듯 몸을 움츠린 그녀는 이내 편안하게 그의 가슴에 기대었다.
“이제 익숙해졌나?”
“하도 갑자기 들어 올리니 익숙해져야죠.”
장난기 섞인 대화에 두 사람은 이마를 맞대고는 이내 활짝 웃었다.
타이밍 좋게 마야가 저녁 식사를 가져왔고, 두 사람은 사이좋게 식사하며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시간을 보내었다.
“그러고 보니 갖고 싶은 건 없나?”
“갑자기요?”
“곧 네 생일이 다가오니 미리 준비해 두면 어떨까 싶어서.”
“날씨가 서늘해지긴 했지만, 아직 조금 더 남았잖아요.”
겨울이 찾아오고, 소복이 쌓인 눈이 살짝 녹기 시작할 때쯤이면 에블린의 생일이 찾아왔다.
“아직 멀었네요.”
“그럼 그냥 받고 싶은 선물은?”
“없어요. 당신이 내 옆에 있는데 선물이 무슨 소용이람.”
에블린은 자꾸만 귀찮게 선물을 물어보는 체이서의 허리를 끌어안고 그대로 뒤로 누워 버렸다.
졸지에 함께 눕게 되자 체이서는 눈을 깜빡이더니 그대로 에블린의 허리를 끌어당겨 꼭 끌어안았다.
“그럼 연회를 열어 줄까?”
“내 남편님이 갑자기 왜 이러실까?”
“집에만 있으면 네가 지루할 것 같아서.”
체이서가 다정한 손길로 얼굴을 덮은 그녀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 주었다.
“아직 사람들의 관심이 온전히 끊어지지 않아서 외출은 어렵고, 마찬가지로 보육원도 가기 어려워졌잖아.”
“그건 그렇죠.”
“쇼핑도 직접 못하니 좋아할 만한 걸 사다 주고 싶었는데 내가 사 오면 항상 과소비라고 하잖아.”
“그건 체이서가 잘못한 거예요. 입지도 못할 텐데 잔뜩 사 오니까 그렇죠.”
루이사는 루이사라고, 그의 씀씀이는 심장이 떨릴 정도로 어마어마하여 가끔 그가 낯설게 느껴질 때가 있을 정도였다.
“혼나기 싫어서 물어봤는데 답도 안 해 주니 원.”
“섭섭한 척한다. 안 속아요.”
이제는 익숙하게 그의 연기를 알아채 짚고 넘어가니 체이서는 언제 서운해했냐는 양 곧바로 표정을 바꿨다.
“티파티를 열라고 하자니 네가 귀찮아질 것 같단 말이야. 그러니 차라리 연회를 여는 게 어때?”
“그리고 연회는 당신이 모두 계획하고요?”
“응, 나는 네가 아무것도 안 하고 편히 쉬며 즐기기만 했으면 좋겠거든.”
“루이사에서 제일 바쁜 사람이 뭐라고 하는 거야, 정말.”
에블린은 언제나 저를 위해 주는 체이서의 모습에 기뻐 입꼬리를 한껏 끌어 올렸다.
“괜찮아요. 난 오히려 이 평화가 좋은걸요. 여기서 내 가족들이랑 지내는 게 마음도 편안해지고, 여유도 생기고, 힘도 안 빠지고.”
복잡한 문제도 어느 정도 해결했으니 오히려 그간의 고생을 보상받듯 오랜 시간 동안 편히 쉬고 싶었다.
백수가 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다가도 안주인 역할을 하니 온전한 백수는 아니라는 사실에 안심이 되더라.
“그리고 저는 사람들 사이에 둘러싸이면 금방 지치더라고요. 공작가를 위해서라면 가끔 티파티나 연회는 주최하겠다만 자주는 하기 싫어요.”
“그래? 그렇다면 다행히 내가 다른 사람들을 질투할 일은 없겠군.”
“조금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답니다. 그리고 아직 해결되지 않은 문제도 남아 있잖아요?”
치료제도 개발이 되었고, 환자들도 무사히 회복하고 있으며, 루이사의 얽힌 큰 문제도 해결하였다.
다만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 있었으니, 바로 사태를 일으킨 범인들에 대한 재판이었다.
더 확실한 정황 조사와 증거 수집을 위해 재판은 계속해서 미뤄져 왔으나 드디어 재판 날짜가 잡혔다.
“일주일 뒤에 재판이 열리는데 연회를 여는 건 아무리 생각해도 무리잖아요? 마음은 고맙지만 그대로 고이 접어 줘요.”
“참, 깜빡할 뻔했군.”
“이걸 잊어요?”
“그다지 중요한 일이 아니니 잊어버릴 수도 있지.”
체이서는 천연덕스럽게 답했으나 저 말은 분명 거짓말일 것이다.
재판을 위해 가장 고군분투하고 있는 이는 1기사단과 단장인 체이서였으니까.
“필베르타 공작은 아직도 아무런 말도 안 해요?”
“안 해. 후회 가득한 얼굴로 앉아만 있어.”
“내가 죄를 지었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게 많이 어려운 일일까요?”
사실 정황 조사와 증거 수집 기간이 길어진 것도 협조에 도움을 주지 않은 세자르 탓도 컸다.
재판만 해결된다면 온전히 마물화 사태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찌나 끈질긴지 이제야 겨우 끝이 보이지 않나.
“그리 말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죄를 짓지 않았겠지.”
매우 현명한 답이었다.
‘그래도 후회하는구나.’
납치당했을 때만 해도 전혀 그럴 것처럼 보이지 않았는데 현실을 깨닫기라도 한 걸까?
‘어차피 나랑 상관도 없는 일이니 잊자.’
타인을 떠올리며 심란해할 바에는 좋아하는 사람들 곁에서 행복해지는 게 좋았다.
에블린이 가볍게 체이서의 입술에 입술을 누르니 곧이어 잡아먹을 것 같이 진한 입맞춤이 이어졌다.
황홀감에 머릿속이 뿌예지기 시작했다.
그의 목을 끌어안고 서로를 탐하는 순간은 달콤하였으나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그런데 왜 끝까지 가지는 않는 걸까?’
커다란 손은 감싸 쥔 에블린의 허리를 천천히 쓸어 올렸고, 몸이 절로 떨리는 감각에 몸을 움츠렸다.
그러자 움직이던 그의 손이 멈추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입맞춤 또한 끝이 났다.
“이만 잘까?”
체이서는 한가득 부족하다는 얼굴을 하면서도 더 이상의 진도를 나가지 않았다.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춰 준 그는 그대로 에블린을 끌어안은 채 눈을 감았다.
‘피곤해서 그런 건가.’
일이 줄었다고 하나 아무리 줄어들어 봤자 그의 일은 많은 편에 속했다.
‘괜히 깨우지 말아야지.’
에블린은 따스한 온기에 기대어 그대로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울리자 체이서가 눈을 떴다.
조금 전까지 달뜬 숨을 내쉬던 그녀는 누가 업어 가도 모를 만큼 깊게 잠이 들어 있었다.
‘사람 속도 모르고.’
서로의 마음도 확인하였고, 그간 괴롭혔던 사건도 해결이 되었으니 서로의 사랑을 다시금 확인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직 에블린이 납치당했을 때 남은 상처가 남았기에 무작정 제 욕심을 내세우며 그녀를 탐할 수 없었다.
‘조금 전은 위험했어.’
안달이 난 얼굴로 저를 빤히 바라보는 모습에 순간 이성을 잃어버릴 뻔했다.
퇴근하자마자 마주친 모습부터 조금 전까지. 오늘은 여러모로 인내심의 한계를 시험하는 위험한 날이었다.
‘아직은 아니야. 조금 더 참아야지.’
초인적인 인내심을 부려 눈을 감지 않았더라면 오늘에야말로 초야를 치렀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조금만 더 참으면 되니까.’
상처를 보니 그래도 고대하는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음이 다행이었다.
체이서는 곧 다가올 날을 기다리며 그대로 에블린의 따스한 온기에 기대어 눈을 감았다.
여느 때와 같이 평화로운 하루는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