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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4화 (129/159)

외전 4화

새파랗게 질린 낯과 볼품없이 덜덜 떨리고 있는 몸, 한때 루이사 공작가를 호령했던 거대한 사내는 초라하게 무너지고 있었다.

더스틴은 과거의 영광과 고통 속에서 울부짖는 제 모습을 연달아 떠올리며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아니야, 아니야.”

모든 게 꿈일 거라며 아무리 스스로를 다독여도 변하는 것은 없었다.

손과 발에 묶인 구속구의 시린 온기가 그가 처한 이 상황이 현실이라는 것만 알려 주고 있었다.

장성한 세 아들을 보던 그의 텅 빈 눈이 모여 있는 이들 중 가장 체구가 작은 이에게로 향했다.

“에블린!”

머릿속이 이능력에 의해 잔뜩 휘저어져 멀쩡하지 않았음에도 그는 단번에 제 딸을 알아보았다.

아니, 어쩌면 제 마지막 희망이라 여기는 걸 발견했을지도 모른다.

그가 미친 사람처럼 몸을 흔들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구속구를 끊고 나올 것 같은 기세에 에블린이 질색하자 자연스럽게 그 앞을 체이서가 막아서며 말했다.

“저런. 차라리 정신을 잃고 있는 게 좋았을 텐데.”

꺼내는 말과 달리 어조는 전혀 안타깝게 느껴지지 않았다.

체이서가 검집에서 검을 꺼내자 그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감히, 너희가 감히! 내 너희를 어떻게 키웠는데! 주제도 모르고!”

귀가 찢어질 것같이 윽박질러도 모인 이들은 누구도 그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무리 강한 척해 봐야 이빨 빠진 사자가 죽음 앞에서 살려 달라 구걸하고 있는 거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치료제가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본인의 능력도 억제당했으니 걱정하지 않고 원하는 대로 하면 돼.”

블러드윈의 말에 데몬스가 앞으로 나섰다. 그의 눈에 서린 증오를 마주한 더스틴은 다시금 소리를 지르려고 했으나 강제로 입이 틀어 막혔다.

그 후로 이어진 장면은 처참하고 끔찍하였으나 그 때문에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된 그들보다는 괴롭지 않았으리라.

죽어 가고 있는 모습을 바라기는 했지만 끔찍한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힘들어 찡그리고 있으니 주먹 쥔 그녀의 손에 온기가 느껴졌다.

“보기 힘들면 굳이 보지 않아도 돼. 처리는 확실하게 할 거니까.”

속이 안 좋아 보인다며 체이서가 반대 손으로 슬쩍 눈을 가려 주려는 것을 에블린이 막았다.

“속이 안 좋긴 한데 끝까지 보고 싶어요.”

그래야만 루이사에 얽힌 모든 것이 끝났음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끅끅 내뱉던 소리마저 멈췄을 때, 가만히 에블린의 곁에 있던 체이서가 나섰다.

그는 조용히 손에서 피어난 불길을 더스틴에게 던졌고, 크게 타오르는 불꽃을 차분히 바라보았다.

뜨거운 열기에도 누구 하나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고 그의 최후를 지켜보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불꽃이 꺼지고 사람의 형체가 온전히 사라졌음을 확인한 순간, 네 사람은 드디어 그들을 고통 속으로 밀어 놓은 악몽이 끝이 났음을 받아들일 수 있었다.

“너무 쉽게 보내는 것 같아서 아쉽지만 그래도 개운하네.”

블러드윈이 웃으며 제 팔을 데몬스의 어깨에 둘렀고, 그 또한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갈까?”

모든 일을 마무리하고 돌아온 체이서는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를 내며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네 사람은 아무런 말 없이 조용히 별관을 나왔고, 검푸른 하늘 높이 떠오른 둥근 달을 보고서야 참아 왔던 숨을 내쉬었다.

비록 하늘은 어두웠지만, 달이 크게 떠오른 덕에 세상은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에블린은 저도 모르게 씨익 웃으며 모두에게 말했다. 

“빌어먹게 좋은 날이네요.”

그 말에 옆에서 웃음소리들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바로 옆에서 그녀의 미소를 지켜본 체이서 또한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답해 주었다.

“그러게. 새로 시작하기 딱 좋은 날씨야.”

“그럼, 그럼.”

“무거웠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적어도 내일은 보다 나은 날이 될 것 같네요.”

네 사람은 별관에 있었을 적과 다르게 화기애애하게 웃으며 그곳을 벗어났다.

괴로움이 가득했던 시절들을 모두 떨쳐 낼 수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앞으로 있을 즐겁고 행복한 일들이 그 시절들을 잊을 수 있게 도와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도록 노력하며 바꿔 나갈 것이다.

루이사에도 그렇게 서서히 편안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

선대 루이사 공작은 지병에 의해 사망하였다 공표되었고, 장례식은 본인의 유언에 따라 간소하게 가족장을 치르며 온전히 그의 자리는 사라졌다.

장례식이 끝나자 그간 멀게만 느껴졌던 일상이 돌아오는 게 느껴졌다.

에블린은 오늘도 일찍 퇴근한 체이서를 웃으며 맞이해주었다.

“앗, 오늘은 어제보다 빨리 왔네요. 어서 와요, 오늘도 고생이 많았죠?”

막 방에 들어선 체이서가 눈 앞에 펼쳐진 에블린의 모습에 당황하는 듯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옷차림이.”

“막 씻고 나와서요.”

수줍게 덧붙이는 말에 체이서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그녀를 눈에 담기 시작했다.

간단히 걸쳐 입은 슈미즈 가운은 얇고 하늘거려 옷감 너머로 에블린의 몸이 은은하게 드러났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아래로 향하자 에블린이 부끄럽다는 듯 슬쩍 몸을 틀었다.

그러자 아직 물기가 어려 촉촉한 머리칼이 눈앞에 드러났다.

“아직 머리가 젖어 있군.”

“네! 막 머리를 말려 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함께 있던 마야가 다급히 수건을 다가오자 체이서가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내가 닦아 줄 테니 이만 나가 보도록.”

“예? 아, 하지만 머리를 말린 뒤 약도 바르셔야 하셔서요.”

“그것도 내가 할 테니 하녀장은 가서 다른 일을 마저 처리해.”

체이서가 수건을 받아 들며 가볍게 축객령을 내렸다.

명령받은 마야는 얼떨떨한 표정을 짓다가 부끄러운 듯 얼굴이 붉게 물든 에블린을 보고서 작게 미소를 지으며 방을 빠져나갔다.

방에 둘만 남게 되자 체이서는 곧바로 에블린의 앞으로 다가갔다. 그녀가 익숙하게 팔을 벌리며 체이서를 끌어안고 반갑게 볼에 입을 맞추었다.

가만히 에블린의 애정을 받던 체이서는 가벼운 입맞춤을 끝으로 고개를 물리려는 것에 그녀의 팔을 잡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겨 그대로 다시 입을 맞추었다.

조금 전의 행동만으로는 부족했다는 듯 가볍게 맞닿은 입술은 금방 서로를 탐하기 시작했다. 에블린은 홀린 듯 그에게 몸을 기대다가 숨이 벅차 붉어진 얼굴로 헐떡일 때가 되어야 정신을 차렸다.

숨을 쉬기 힘들다며 체이서의 등을 몇 번이고 두드리자 그는 아쉬움이 가득한 얼굴로 입술을 떼고는 하였다.

“하아, 하아.”

“이 정도로 힘들어하면 안 되는데.”

체이서는 숨을 고르고 있는 에블린의 뺨을 매만지더니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올려다보는 그녀를 보며 웃었다.

“네?”

무슨 말이냐는 듯 되묻는 것에 그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 뒤 에블린의 이마에 입을 맞추고는 그대로 그녀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간지럽게 왜 이래요.”

에블린이 어깨를 움츠리며 웃으니 체이서는 기분 좋은 목소리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좋은 향기가 나서 나도 모르게 그만.”

“아, 오늘 새로 들어온 입욕제를 썼거든요.”

에블린이 팔을 들어 냄새를 맡아 보더니 눈이 마주치자 민망한 듯 곧바로 팔을 내렸다.

“당신이랑 잘 어울리는데? 다음에는 함께 쓸까?”

“네, 그렇…….”

자연스러운 혼욕 제안에 에블린은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다가 당황하며 고개를 들었다.

기대가 가득한 눈빛을 마주하자 에블린은 부끄러운 듯 휙 고개를 돌렸다.

“그래요. 다음번에…….”

“좋아, 약속했어. 이제 머리 말리러 가자.”

확답을 얻은 체이서는 기분 좋은 얼굴로 화장대를 가리켰다.

“그냥 제가 말릴게요.”

“내가 말려 준다니까.”

에블린은 수건을 뺏으려고 했지만, 체이서가 그녀를 화장대 앞에 앉히는 것이 더 빨랐다.

커다란 손이 조심스럽게 에블린의 머리칼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머리를 말려 주던 그의 시선은 가느다란 목덜미와 긴장한 듯 딱딱히 굳어 있는 어깨를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갔는지 헐렁한 슈미즈 아래 비치는 피부 전체가 선홍빛으로 예쁘게 물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체이서는 당장이라도 목덜미에 입술을 묻고 싶은 생각을 하다가도 날개 뼈 아래 자리 잡은 상처를 보며 욕망을 꾹 눌러 삼켰다.

“상처는 좀 괜찮아졌나?”

“네, 이제 뜨거운 물에 몸을 담글 수도 있어요. 약을 발라도 따갑지 않고요. 흉터만 남지 않게 조심하면 될 것 같대요.”

“다행이군.”

“생각보다 큰 상처도 아니었는걸요?”

어느덧 긴장이 풀렸는지 에블린이 허세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니 체이서는 단호히 답했다.

“누가 그래? 큰 상처였어. 얼마나 놀랐는데.”

“걱정시키니 싫으니까 다음에는 다치면 안 되겠네요.”

“당연한 소리를.”

빠른 답에 에블린이 키득 웃었다. 한참을 부드럽게 머리를 매만지던 손길이 떨어졌다.

“머리는 다 말렸고, 이제 약을 발라 줄게.”

그에 에블린이 조금 머뭇거리더니 힘겹게 입을 열었다.

“아, 그……. 원래는 옷을 벗고 하는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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