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화
이상함을 느낀 체이서와 세자르가 동시에 물러났다.
“에블린!”
체이서의 외침에 에블린은 다급히 제게로 달려오는 그의 품에 안기었다. 땅이 울리는 곳에서 한참 벗어난 곳으로 물러나자 그들이 서 있던 반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곧 그 안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마물……!”
상업지구에서 본 것과 똑같은 날짐승 형태의 마물이었다. 다만 그때 보았던 것보다 압도적으로 크기가 더 컸다.
심지어 한 마리가 아니었다.
“젠장!”
마물의 수를 확인한 세자르가 욕설을 내뱉었고, 마찬가지로 수를 확인한 에블린이 침통한 목소리로 말했다.
“지하실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마물이 된 것 같아요!”
“사람?”
“네. 지하실에 각성제를 담은 수조와 거기 갇힌 사람들이 있었거든요. 그들이 마물로 변한 것 같아요.”
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체이서가 곧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마물을 무찌르는 게 우선이겠군.”
“우선 대화를 걸어 볼게요! 저들을 안정시킬 수 있다면 평화롭게 끝낼 수 있을지도 몰라요.”
다급한 상황 속에서 체이서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대로 마물들을 모두 죽이는 것이 가장 깔끔한 방법임을 알지만, 에블린에 제게 했던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필요 이상으로 생명을 거둘 필요는 없겠지.’
“……곧 기사들도 도착할 거야. 그때까지만 버틸 수 있다면 네 의견을 따르지.”
“고마워요!”
자신의 의견이 받아들여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는지 에블린의 얼굴에 작은 미소가 피어났다.
그녀는 곧 제힘을 사용하며 마물들을 향해 외쳤다.
“제 말이 들린다면 아래로 내려오세요!”
하지만 마물들은 한껏 흥분한 상태로 날아다닐 뿐이었다.
“당신들을 원래 상태로 되돌려 줄게요. 그러니 제 말이 들린다면 아래로 내려와요!”
하지만 몇 번이고 에블린이 외쳐도 변한 모습에 적응하지 못한 마물들은 혼란에 차 계속해서 비명을 내지를 뿐이었다.
“……제 목소리가 들리지 않나 봐요.”
에블린은 입술을 짓씹으며 분한 감정을 참지 못했다.
“미안해요, 도움이 되지 못해서.”
“뒤는 내가 맡도록 하지. 부디 안전한 곳으로 피해 있어.”
체이서는 그리 말하고서는 무너져 위태로운 지반에서도 가볍게 뛰어올랐다.
그는 주변에 있는 나무나 벽에 발을 디디며 이동하는 등 이용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이용하여 공격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불길이 피어오르자 마물들은 소름 끼치는 비명을 지르며 이리저리 피하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안절부절못하며 지켜보던 에블린이 멀지 않은 곳에서 주춤거리는 세자르를 발견했다.
그는 당장 체이서에게 달려들지 말지 망설이는 것처럼 보였다.
‘지금 실험체들이 다 저 꼴이 되었는데도 희망을 품는 건가?’
도대체 어떻게 하면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건지 에블린으로서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체이서에 의해 마물이 엉망이 될 때마다 그의 안색은 새파랗게 질려 갔고, 눈동자에는 좌절이 어렸다.
여전히 미적거리며 움직이지 못하고 있자 멍청이 서 있는 그를 발견한 한 마물이 급하강하며 그에게 몸을 날리기 시작했다.
“……위험해요!”
에블린이 다급히 외쳤지만, 세자르는 체이서와 싸웠을 때와 달리 제대로 검날조차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저 멍청이!”
에블린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직이며 그쪽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세자르는 죽어서는 안 되었다.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라는 영웅 심리 같은 게 아니라 제 아비자 저지른 끔찍한 실험에 대해 밝혀 증언해 줄 이는 그가 되어야 했다.
“피하라고요!”
달리는 와중에도 에블린이 열심히 외쳤으나 세자르는 마물의 움직임 외에 다른 것에는 관심이 없어 보였다.
혼란의 끝에 그가 결심을 내렸는지 검을 다시 들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마물의 공격에 가볍게 튕겨진 그가 몸을 다시 일으킬 때 이미 마물이 발톱을 세워 그를 향해 힘껏 내려쳤으니까.
“으윽!”
그리고 에블린은 다급히 세자르를 감싸 안고 있는 힘껏 굴렀다.
다행히 공격을 직접적으로 맞지는 않았지만 뒹굴면서 마물의 발톱에 등이 거세게 긁혔는지 등 뒤에서 심한 고통이 밀려왔다.
에블린이 앓는 소리를 내자 세자르는 멈칫하더니 곧 그녀의 상처를 발견하고선 입을 다물지 못했다.
“부, 부인. 등의 상처가…….”
“나는 괜찮으니 어서 도망쳐요!”
“하, 하지만…….”
“검도 제대로 못 들 거면 도망치라고요! 감염되고 싶어서 이래요?”
에블린의 다그침에 세자르의 어깨가 파드득 튀었다.
그녀는 그 말을 내뱉고선 거친 숨을 내뱉으며 헐떡였다.
등 뒤에서 퍼지는 고통에 눈앞이 어질해질 정도였다.
“이봐요! 내 말이 들린다면 제발 가만히 있어 줘요. 우리는 당신들을 공격하고 싶은 게 아니란 말이에요!”
이능력을 실어 열심히 말을 건네었으나 이번에도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피 냄새에 흥분이라도 한 듯 날아다니던 마물들이 더욱 날뛰기 시작했다.
‘어지러워…….’
곧 에블린이 다친 것을 발견한 체이서가 상대하던 마물에게로 뛰어올라 단번에 목을 베고선 그녀 쪽으로 뛰어오는 것이 보였다.
눈앞이 흐릿해져 제대로 잡히는 게 없었다. 에블린은 정신을 유지하기 위해 눈에 힘을 주었으나 고통만 더해질 뿐이었다.
“하아, 하아.”
고통에 앓는 소리를 내고 있으니 곧 도착한 체이서가 그들을 공격하던 마물의 몸에 거대한 불을 붙이고서는 다급히 에블린을 안아 들었다.
“멍청하게 있을 거면 방해하지 말고 썩 꺼져!”
그는 멍하니 앉아 있는 세자르를 향해 분노 어린 욕설을 지껄이고서는 재빨리 그녀를 안아 들려 했다.
바로 그때, 이 순간 누구보다 반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단장님!”
정원의 입구 쪽에서 들려온 목소리의 정체는 바로 하소였다.
그녀가 체이서의 명으로 1기사단을 이끌고 필베르타 공작저를 찾아온 것이다.
“세상에나, 부인!”
서른 명 남짓 되는 인원을 끌고 오던 하소가 곧 에블린을 발견하고서 비명을 질렀다.
“이게 무슨 일입니까! 온몸이 엉망이십니다!”
“하하, 그러게나 말이에요.”
에블린은 힘겹게 웃다가 거칠게 기침을 토하기 시작했고, 하소가 다급히 그녀를 진정시키기 시작했다.
뒤늦게 하소와 기사단이 등장한 것을 발견한 체이서가 큰 목소리로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하소 경, 네가 책임지고 에블린을 보살피도록 해라! 하소 경 외 다른 기사들은 모두 나를 따른다!”
“예, 알겠습니다!”
합류한 기사단은 용맹하게 외친 뒤 마물들에게 달려들기 시작했다.
도움을 줄 이들이 도착했으니 더는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이다.
에블린은 그제야 진심으로 안도를 할 수 있었다.
“맙소사, 부인. 정말이지 상처가…….”
멀어지는 의식 사이로 당황에 찬 하소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잠시라도 고통을 잊고 싶었다.
하소의 다급한 응급치료 속에 에블린은 그대로 천천히 눈을 감아 버렸다.
***
세자르는 제 손에 묻은 피를 보며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죽어 갈 듯 쓰러지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서야 제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진정으로 깨닫게 된 것이다.
“내가, 내가 무슨 짓을…….”
제가 얻지 못한 사랑이 탐이 났다. 이능력이 있다면 사랑뿐만이 아니라 모든 것을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가 뒤늦게 깨달음을 얻었을 때 그에게 돌아온 것은 모든 것이 엉망이 된 현실이었다.
마물을 무찌르는 것이 우선임을 알면서도 그는 조금도 움직일 수가 없었다.
“필베르타 공작을 생포하도록!”
체이서의 명령에 기사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 그에게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내가 모든 것을 망쳤구나.’
무언가에 홀려 있던 것인지 제정신을 차린 순간 맞닿은 현실은 너무도 차고 외로웠으며 절망적이었다.
세자르는 힘없이 검을 떨구었다.
기사들 중 일부는 체이서와 함께 합류하여 흥분하여 날뛰는 마물들을 제압하러 떠났고, 다른 기사들은 세자르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는 제게 위협적으로 다가오는 기사들에게 감히 검을 들고서 대항할 자격이 없었다.
에블린이 저를 위해 몸을 내던진 순간 그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제가 한 일이 얼마나 끔찍했는지에 대해 드디어 인지하고 말았다.
곧 그의 시선이 자신 때문에 다쳐서 기절해 있는 에블린에게 향했다.
뒤늦은 깨달음이 지나간 후에는 남은 것은 자신에 대한 혐오와 부끄러움뿐이었다.
꿈에서 깨어난 것 같았으나 현실은 꿈보다 더욱 지독한 악몽과 같았다.
그는 기사들에게 무력하게 체포되어 제가 만든 현실을 받아들였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에블린, 정신을 좀 차려 봐. 응? 에블린 제발…….”
간절한 목소리에 에블린은 아래로 가라앉은 의식을 깨우며 천천히 눈을 떴다.
“괜찮은 건가? 제발, 제발 무어라 말이라도 좀 해 봐.”
쉽지 않은 싸움이었는지 엉망인 모습이었지만 놀랍게도 그 어느 순간보다 그가 아름다워 보였다.
에블린이 저도 모르게 웃자 체이서의 얼굴이 더더욱 울상이 되었다.
“저 멀쩡해요.”
“너를 곧바로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켰어야 했는데.”
힘없는 그녀의 목소리에 그의 표정은 좋아지기는커녕 후회가 가득 어려있었다.
“제발 이런 무모한 짓을 하지 말아 줘. 내가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네가, 네가 눈을 뜨지 못했더라면…….”
겁에 질린 목소리에 서린 것은 분명한 두려움이었다.
언젠가 루이사의 시험장에서 보았을 때와 같은 얼굴을 보는 것은 자신을 얼마나 아끼는지 보여 기뻤으나 썩 유쾌한 감정만 일으키는 것은 아니었다.
“저 하나도 안 아파요.”
“등짝이 모두 찢어졌는데 안 아프다고?”
과격한 발언에도 에블린은 힘없이 웃었다. 그녀는 그대로 체이서의 품에 고개를 기대고서는 안심하라는 듯 미소를 지어 주었다.
“응, 당신이 옆에 있어 주면 하나도 안 아파요.”
“…….”
“당신이 내 옆에 있는데 내가 왜 아프겠어요?”
언젠가 체이서가 했던 말을 따라 하며 에블린은 씨익 웃었다.
그녀가 등 뒤로 시선을 주려 하자 체이서가 다급히 몸을 움직여 그녀의 시선을 차단했다.
“마물들은 모두 처리했고, 연구실도 찾아냈어. 이제 저 안에 있는 자료를 토대로 치료제를 만들면 될 거야.”
“필베르타 공작은요?”
“부인 말에 따라 무사히 생포했지.”
“하아, 다행이다.”
그의 생포 소식을 듣고 나니 정말로 모든 것이 끝났음이 느껴졌다.
온몸이 전율하듯 흘러오는 짜릿함에 에블린은 웃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안은 체이서의 품에 기대어 작게 속삭였다.
“있죠. 이런 상황에 어울리지는 않지만 하고 싶은 말이 있어요.”
“아무렴, 내 부인이 하는 말은 뭐든지 다 들어 줘야지.”
체이서는 넉살스럽게 말했으나 곧 그의 얼굴에 서린 여유는 빠르게 무너지고 말았다.
“사랑해요.”
단조롭게 내뱉은 말이지만 사랑이라는 단어 하나만으로도 체이서에게는 너무 아름다운 말이 되었다.
체이서는 벅찬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조심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에블린을 꽉 끌어안았다.
“사람들 많은데 이대로 안 놔줄 거예요?”
무어라 말해도 체이서는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에블린은 그에게 들릴 정도로만 작게 속삭이기 시작했다.
“우리 치료제가 개발되면 마음 편히 여행이라도 다녀와요.”
“……좋아.”
“즐기지 못한 신혼도 즐겨 보고, 제리도 깨어나면 함께 놀러도 가요. 갑자기 변한 상황에 놀라겠지만 당신을 좋아했으니까 금방 적응해 줄 거예요.”
“뭐든 좋아. 내 미래에 네가 있다면.”
떨리는 목소리 끝으로 체이서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의 눈에 서린 환희를 마주한 순간 에블린은 저도 모르게 환히 웃고 말았다.
서로의 미래를 꿈꾸며 속삭이는 말이 어찌나 달콤한지 엉망인 상태에서도 두 사람은 미소가 끊이질 않았다.
에블린과 체이서는 서로 눈을 마주치고서는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의 입술을 머금었다.
품에 닿은 뜨거운 체온과 따스한 숨결, 그리고 서로를 향한 열정적인 사랑이 부디 꺼지지 않기를 바라며.
에블린은 찬란하도록 눈 부신 빛을 품에 안았다.
긴 절망 끝에 다시금 피어난 구원이었다.
- 본편 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