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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124)화 (124/159)

124화

“됐다!”

툭 하고 밧줄이 끊어지는 소리에 에블린은 환희에 찬 비명을 질렀다.

열심히 움직이느라 밧줄에 묶였던 팔목이 쓸려서 따끔거렸고, 유리를 쥔 손가락이 조금 크게 베었지만, 이 정도 고통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에블린은 자유로워진 팔을 움직여 곧바로 발목에 묶인 밧줄도 끊어 냈고, 겨우 자유를 되찾을 수 있었다.

뻐근한 어깨를 돌리던 그녀는 다시 천천히 제가 갇힌 곳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세자르가 나간 곳 외에 혹 다른 출입구가 더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벽을 쓸며 돌아다녔지만 특별히 문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답이 없는 상황 속에서 조금이라도 체력을 보존하기 위해 앉아 벽에 기대니 막막함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이제 어떻게 하지.’

아무도 없이 조용한 곳에 오랫동안 혼자 있다 보니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바닥에서 올라오는 찬 기운에 에블린은 무릎을 구부린 채 최대한 제 몸을 끌어안았다.

하필이면 앉은 곳 바로 건너편에 수조가 있어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환청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물소리는 무슨. 앞에 있는 건 깨진 수조라고.’

에블린은 그대로 무릎에 제 고개를 묻고서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째 수도에 올라온 뒤로 몸이 평안한 일이 없는 것 같았다.

한참을 그렇게 휴식을 취하는 도중 문득 이상함을 느낀 에블린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잠시만. 환청이 아니야?’

그녀의 시선이 정면의 깨진 수조로 향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수조 위의 천장으로 말이다.

천장에 홈이 패어 있는지 그곳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혹시 저곳이 또 다른 출구는 아닐까?’

에블린은 곧바로 제가 묶여 있었던 의자를 끌고 와 깨진 수조 앞에 섰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턱도 없었다.

다행히도 이곳은 연구실이었기에 책상이나 의자가 꽤 있었고, 그녀는 책상을 질질 끌고 와 그 위에 의자를 올렸다.

위태로운 의자 위로 에블린은 천천히 올라가기 시작했다.

‘넘어지면 끝이다.’

긴장감 속에 침을 꿀꺽 삼키고는 그녀가 천천히 천장을 더듬거리기 시작했다.

‘제발, 제발 뭐라도 있어라.’

물이 떨어지는 곳으로 손가락을 넣어 힘껏 밀자 쑥하고 손목까지 천장으로 들어갔다. 

손을 움직일 때마다 천장이 들썩이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에블린의 힘만으로는 쉽게 움직이지 않았다.

“다른 방법, 다른 방법이 필요한데.”

에블린은 손을 빼낸 뒤 다시 실험실을 훑어보았다. 혹시라도 도움이 될 만한 물건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 덕분인지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한쪽 벽에 두꺼운 쇠 파이프가 늘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그녀는 곧바로 의자에서 내려가 그것을 챙겨 들었다.

“윽, 무겁다.”

효과가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맨손보다는 훨씬 나을 것이다.

에블린은 다시 책상과 의자 위로 올라가 쇠 파이프를 손을 넣었던 구멍에 쑤셔 넣기 시작했다.

구멍이 점차 커지기 시작하더니 곧 그곳에서 흙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조금씩 흘러내리던 흙들이 덩어리가 되더니 거센소리를 내며 쏟아졌다. 에블린은 휑해진 천장을 바라보며 놀라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밖이잖아?”

이 소란이 났음에도 인기척 하나 없는 것을 보니 아무래도 이 지하실은 공작저 본관이 아닌 인적이 드문 정원과 연결이 된 곳이었나 보다.

지반이 무너져 아슬아슬했지만 빠르게 나간다면 어찌 탈출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위험하지만 어쩔 수 없잖아.’

에블린은 최대한 튼튼해 보이는 지반 쪽을 꽉 붙잡고서는 그대로 위로 뛰어올랐다.

다행히 간신히 상반신을 지반에 걸칠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살고 싶다는 의지로 한참을 끙끙거리고 있는데 문득 앞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정말이지. 왜 이렇게 일을 복잡하게 만드십니까.”

반갑지 않은 목소리와 함께 낯선 신발이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

“…….”

“이곳은 또 어찌 찾으셨는지. 드나들기 위해 만들어 놓은 곳도 아닌데. 그 마물들이 헤집어 놓은 것을 대충 덮어 놓은 것이 기억나 이리 찾아와 봤건만…….”

어쩐지 지반을 뚫는 것이 생각보다 쉬워 이상하던 참이었다.

‘그 마물들이라면 아마도 이번에 나타난 이들을 말하는 거겠지.’

죽은 마부의 모습이 떠오르니 마음이 다시금 무거워졌다. 더더욱 이대로 물러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크게 한숨을 내쉰 세자르는 그녀의 앞에 서서 명령했다.

“못 본 척해 드리겠습니다. 그러니 다시 돌아가세요.”

관대한 목소리였지만 에블린은 듣는 척도 하지 않고 다시 끙끙거리며 땅 위로 올라오기 시작했다.

“당장 돌아가라 말했습니다.”

“싫어요. 나는 나가서 이 지하실에 대해 고발하고, 곧바로 치료제를 완성할 거예요.”

그 말에 세자르의 두 눈에 차가운 살기가 서렸다.

그는 원하는 것을 얻지도 못한 채 이렇게 허무하게 끝낼 수 없었다.)/

“이게 마지막 경고입니다, 부인.”

“이대로 나를 밀어 넣든지 아니면 빠져나가는 걸 지켜보든지 둘 중 하나만 해요.”

당차게 말을 뱉은 것까지는 좋았으나 에블린이 붙잡고 있던 지반은 조금 전의 충격으로 약해진 탓에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늦기 전에 재빠르게 올라가려는 순간 훅 땅이 꺼지며 그녀의 몸이 속절없이 아래로 떨어졌다.

아니, 떨어질 뻔했다.

“……헉!”

에블린은 터질 것 같은 심장 소리를 들으며 저를 붙잡은 이를 올려보았다.

세자르는 조금 전 제가 뱉었던 말과 달리 창백한 얼굴로 떨어지기 직전의 에블린을 붙잡았다.

그는 복잡한 눈빛을 숨기지 못한 채 그녀를 끌어 올려 주었다.

달갑지는 않았으나 세자르의 도움으로 겨우겨우 빠져나온 에블린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거친 숨을 몰아 내쉬었다.

‘다행이야. 진짜로 밀어 버리면 어떻게 하나 걱정했는데.’

천장의 높이가 낮은 것은 아닌지라 이대로 떨어진다면 어딘가 크게 다칠 확률이 높았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에블린이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 일어나 몸을 움직이자 세자르가 그 앞을 막았다.

“당신을 떨어트리는 건 할 수 없어도 다시 가두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습니다.”

꽉 붙잡힌 손목에 에블린이 눈살을 찌푸렸다.

“놔주세요.”

“각성제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몇 번을 말해도 못 알아먹는 세자르 때문에 에블린은 다시금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는 도움을 줄 생각 없다고요!”

“조력해 줄 생각이 없다면 더더욱 당신을 밖으로 내보낼 수 없습니다. 각성제가 완성되기 전에 치료제가 완성되는 꼴을 보고 있을 생각은 없으니까요.”

에블린은 팔을 뿌리치기 위해서 힘껏 휘둘렀지만, 세자르는 쉽사리 놔주지 않았다.

“그 빌어먹을 약 때문에 내 가족이 죽었어요. 왜 이런 약을 만들었어요? 그 약만 아니었더라면 내 가족이 그런, 그런 몰골로 죽지는 않았을 거예요.”

“이능력자인 당신은 모를 겁니다.”

“몰라요. 알고 싶지도 않고요!”

“부인…….”

“그렇게 아련하게 부르지 마요! 우리 사이에 무슨 감정이 오간 것도 아닌데 소름 끼쳐요! 나는, 나는 당신이 싫어요. 당신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화가 나 미칠 것 같단 말이에요!”

진절머리 난다는 듯 짜증이 섞인 외침에는 끊임없는 분노가 서려 있었다.

세자르는 무언가 잘못되어 가는 것을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부인께서는 영원히 패배자가 된다는 것이 어떤 감정인지 모르십니다.”

“…….”

솔직하게 튀어나온 세자르의 진심에 에블린은 화를 내던 것도 잊어버린 채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곧 헛웃음을 내뱉고 말았다.

“이것 봐요. 대의를 위한 척하더니 결국은 제 욕심을 위해서였잖아.”

힘없이 터져 나온 웃음소리에 세자르의 두 눈동자가 떨리기 시작했다.

자신이 내뱉은 말을 에블린이 짚어 주고서야 그대로 인지하게 된 것이다.

“고작 이능력이 뭐라고…….”

슬픔이 서린 에블린의 목소리에 세자르는 무언가 마음속에서 무언가 처참히 무너져 가는 것을 느꼈다.

‘내가 원하는 게 뭐였지?’

도대체 어떠한 목적으로 이 일을 진행시켰던 걸까, 무엇을 얻기 위해서?

‘공작 부인의 마음? 아니면 이능력? 혹은 내가 같지 못했던 모든 것인가?’

스스로를 향한 질문에 되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세자르의 혼란스러운 눈동자에 에블린은 차갑게 식은 얼굴로 다시금 그의 손을 뿌리쳤다.

힘없이 떨어지는 손을 보며 에블린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능력 없는 이들이 모두 자신을 패배자라고 생각하며 자라지는 않아요. 그들을 일반화시키지 말고 제 잘못을 합리화하지 마세요.”

“나는…….”

세자르가 무어라 말하기 위해 가까이 다가오는 순간 뜨거운 열기가 두 사람 사이를 가로질렀다.

빠르게 뒤로 물러난 세자르가 불길이 날아온 곳을 노려보았다.

“체이서…….”

원망이 잔뜩 서린 세자르의 목소리에도 체이서는 대꾸하지 않고 곧바로 에블린에게 다가갔다.

“괜찮냐고 물어볼 수도 없는 꼴이군.”

체이서는 에블린을 살펴보다가 분노한 얼굴로 세자르를 노려보았다.

“감히 이런 짓을 벌이고도 살아남을 수 있다 생각한 건 아니겠지?”

그는 에블린을 뒤로 물린 뒤 망설임 없이 검을 뽑아 들었다.

“남의 집에 멋대로 들어온 것 치고 말이 많구나.”

“납치범의 집에 들어오는 것도 내가 일일이 허락을 구해야 하나?”

두 사람 사이로 서로를 향한 적의와 날카로운 살의가 지나갔다.

“세자르, 네가 불법 각성제를 만들었나?”

“…….”

침묵은 곧 답이 되었다.

“한심하기 짝이 없네, 필베르타 공작.”

마치 얽히기조차 싫다는 듯 선을 긋는 경멸 어린 어조에 세자르의 표정이 더욱 처참히 구겨졌다.

“긴말할 것 없지. 검을 뽑아. 이능력이 아니라 오로지 검술만으로 상대해 줄 테니.”

“그리 말하면 내가 도망이라도 칠 줄 알았나?”

체이서가 검을 뽑자, 세자르 또한 허리춤에 매달린 검을 뽑아 들었다.

동시에 두 사람이 서로에게 달려들었고, 곧 서로의 검이 부딪히는 소리가 울리며 전투가 시작되었다.

누군가 죽지 않는 이상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싸움은 예상하지 못한 사건으로 인해 끝나고 말았으니.

갑자기 지진이라도 난 듯 땅이 거세게 울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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