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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123)화 (123/159)

123화

저 제멋대로인 사내의 머릿속이 얼마나 엉망이기에 저러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만약 당신 말대로 다른 유가족들이 당신을 용서한다고 해도…….”

다만 에블린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그녀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한 자 한 자 분노를 담아 말했다.

“나만큼은 절대로 당신을 용서하지 않을 거야.”

“그게 무슨…….”

순간이지만 세자르의 얼굴에 자리하던 평정이 깨지는 것이 보였다.

“내 가족이 당신 부자들 때문에 죽었단 말이야. 각성제가 완성되어도, 그 결과가 당신이 말한 대로 훌륭하더라도 난 죽어서도 당신을 용서 못해.”

울고 싶지 않았는데 차오르는 분노를 이기지 못하고 눈물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부인의 가족이 이 각성제 때문에 죽었다는 말씀이 사실이십니까?”

입을 꾹 다문 채 눈물을 뚝뚝 흘리는 모습에 세자르가 다시 발걸음을 돌려 에블린의 앞으로 다가왔다.

“울지 마십시오.”

세자르는 에블린의 눈가에 묻은 눈물을 닦아 주기 위해 손을 뻗었다.

“제발, 제발 울지 마세요.”

하지만 그녀는 조금의 접촉도 거부하며 매정히 고개를 돌리고 숙였다.

“……몰랐습니다. 부인의 가족이 이 약으로 인해서 죽었을 줄은 정말로 몰랐어요.”

에블린이 고개를 숙인 채 저와 눈을 마주치려고 하지 않자 세자르는 머뭇거리면서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조금 전과 달리 진심이 담긴 사과를 건네었다.

“그런 줄도 모르고 부인의 앞에서 제가 못할 소리를 했군요. 미안합니다.”

“…….”

“울지 마십시오. 당신께서 이리 울면 제가 어찌해야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세자르는 어쩔 줄 몰라 하며 당황한 기색으로 몇 번이고 연거푸 사과했다.

에블린은 우스웠다. 조금 전까지 조금의 죄책감도 느끼지 않은 이가 고작 제 눈물만으로도 이리 행한다는 것이.

“제발요, 부인. 울지 마세요.”

그리고 세자르의 이중적인 면모에 역겨움이 밀려왔다.

이제는 간절하기까지 한 목소리에 에블린은 마음을 차분히 가다듬었다.

우는 것을 보이고 싶지 않았지만, 그가 자신의 눈물에 약하다면 이 빌어먹을 상황에서 이용할 수단이라도 되어야 했다.

파르르 떨리는 눈가에 맺힌 눈물방울은 그녀가 눈을 깜빡일 때마다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마치 물에 젖은 청초한 꽃망울 같다는 생각에 세자르는 저도 모르게 그녀에게로 손을 뻗었다.

“……제가 그만 울기를 바란다면 이 실험을 멈춰 주세요.”

하지만 곧바로 이어진 에블린의 바람을 듣고 단번에 그의 손이 멈추었다.

그는 마치 홀렸다가 정신을 차린 사람처럼 두 눈을 크게 뜨며 놀라더니 곧바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리 말하며 세자르는 제 뒤로 널려 있는 수조를 바라보았다.

붉은 액체가 가득 담긴 수조는 비록 지금 보기에는 끔찍하였으나 훌륭한 결과물을 만들어 낼 것이다.

에블린의 가족이 각성제로 인해 피해를 보았다는 말에 마음이 흔들렸지만, 그건 사랑하는 여인의 눈에서 흐른 눈물 때문이지 그들의 죽음이 안타까워서가 아니었다.

오히려 세자르는 각성제가 완성되어야 그들의 죽음이 유의미한 것이 된다고 믿었고, 제 생각을 철회할 생각이 없었다.

“애초에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지 않았습니까.”

무엇보다 각성제를 완성하지도 못한 채 어영부영 끝내고 만다면 가문과 아버지 그리고 자신에게 커다란 치부를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각성제 개발만 성공한다면 이 모든 치부도 훌륭한 결과를 위한 발판이 되어 줄 것이다.

“늦지 않았어요. 지금이라도 멈춘다면 더 이상의 피해자는 나오지 않을 거라고요!”

에블린은 황급히 세자르를 설득하기 위해 입을 열었으나 그는 고개를 저었다.

“부인의 도움만 있다면 각성제는 금방 완성될 수 있을 겁니다.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할 테니 잠시 자리를 비워 드리겠습니다.”

“저는 제 의견을 바꿀 생각이 없어요.”

“그렇다면 계속 이곳에 계셔야겠지요. 각성제가 완성되기 전까지 말입니다.”

“……그 전에 체이서가 저를 찾을 거예요.”

세자르는 순간 터져 나올 뻔한 화를 참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두 사람만이 있는 이 공간에서 자꾸만 체이서의 이야기가 나오는 것이 달갑지 않았다.

“글쎄요. 과연 그럴까요?”

세자르는 희망을 품은 에블린을 비웃듯 한쪽 입꼬리를 비스듬히 올렸다. 

“만약 체이서가 저를 납치범으로 몰아간다 해도 그는 이 지하실을 찾을 수 없을 겁니다. 이곳의 출구는 단 하나고, 출구의 열쇠는 오로지 제게 있으니.”

세자르는 조금 더 생각해 보라는 말을 끝으로 지하실을 빠져나갔다.

열쇠로 문을 잠그는 것을 잊지 않은 그의 발걸음이 서서히 멀어져 갔다.

이곳이 연구실인 탓인지 혹은 지하여서인지 피부에 닿는 공기가 서늘했다.

문이 닫히자 환했던 조명이 다시 깜빡거리며 제 기능을 하지 못하기 시작했다.

차갑고 텁텁한 공기, 희미한 시야, 그리고 눈 앞에 펼쳐진 흉측한 수조는 에블린의 마음과 정신을 피폐하게 했다.

“흐윽…….”

에블린은 고작 이런 일 때문에 수도원의 가족들이 죽었다는 것에 슬퍼 눈이 부을 정도로 한참을 엉엉 울었다.

한참을 울던 그녀는 어느 순간 훌쩍이던 눈물을 멈추고서는 정신을 차리기 위해 고개를 힘껏 내저었다.

이대로 에블린이 죽는다면 슬퍼할 사람이 있었기에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었다.

‘체이서…….’

에블린에게 체이서는 구원이었으며 살고 싶은 희망을 안겨다 준 미래와 다름없는 이었다.

또한 이곳에서 빠져나간다면 분명 제리의 마물화도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더더욱 포기해서는 안 돼.’

체이서라면 지금쯤 에블린이 실종된 것을 알아차렸을 것이다.

세자르가 어떻게 출입구를 지키는 호위들을 따돌리고 납치를 시행했는지 모르겠다만 황궁에는 사람이 많다.

분명 에블린을 데리고 어디론가 향하는 세자르를 목격한 이가 있을 것이다.

‘체이서가 필베르타 공작저를 찾아온다고 해도 세자르의 말처럼 지하실은 찾지 못할 가능성이 커.’

만약 세자르가 잡혀간다면 에블린은 그가 돌아올 때까지 이 빌어먹을 지하실에 갇혀 있게 될지도 몰랐다.

‘그건 절대 안 돼.’

드디어 각성제의 비밀을 알아냈으니 치료제의 완성만을 앞두고 있었다.

‘난 여기서 죽을 수 없어.’

그때 에블린의 시선이 바닥에 널려 있는 부서진 수조의 조각에 닿았다.

*** 

한참을 기다려도 체이서가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마야는 두 주인의 만남이 조금이라도 길어지기를 원하는 마음에 기사와 시녀들에게 양해를 구한 뒤 체이서를 찾아 나섰다.

“에블린이 찾아왔다고?”

그런데 만나게 된 체이서는 막상 에블린의 방문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왜 내게 전달이 되지 않았지?”

체이서는 연구실에서 나갈 채비를 하며 물었는데 오히려 마야가 더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분명 소식을 전하기 위해 시종이 먼저 떠난 것을 보았습니다.”

“……그래?”

마야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안내를 시작했지만, 체이서는 이상하게 무어라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에 잠겼다.

그리고 그 불안감은 단장실에 도착했을 때 현실이 되었다.

“……에블린은 어디 갔지?”

체이서의 물음에 단장실 앞을 지키던 모두가 깜짝 놀라 안을 들여다보았다.

분명 에블린이 있어야 할 단장실이 텅 비어 있었다. 체이서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방을 훑어보며 물었다.

“어디 갔냐 물었다.”

그의 목소리가 점점 다급해졌다.

“이, 이상합니다. 분명히 안에 들어가신 뒤 나오지 않으셨습니다.”

한 시녀의 말에 체이서의 빠르게 굳었다. 그는 안으로 성큼성큼 들어가더니 크게 나 있는 창문을 활짝 열었다.

그 앞에는 그녀 앞으로 배정된 황실의 기사 두 명이 서 있었는데 체이서의 등장에 깜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단장님?”

“……수상한 사람이 접근한 흔적은 없었나?”

“예, 저희가 이 앞을 지킬 때부터 지금까지 쭉 조용했습니다.”

기사의 말에 체이서는 심장이 저 바닥 아래로 철렁 떨어진다는 것이 무엇인지 느낄 수 있었다.

불안감에 손끝이 떨려 오기 시작했다.

체이서는 주먹을 꽉 쥐고서는 앞을 지키던 이들을 보았다.

“이쪽 출입구 또한 수상한 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럼 내 아내가 갑자기 증발이라도 했단 말인가? 이곳에 드나든 이가 정녕 아무도 없었나?”

기사 중 한 명이 망설이다가 체이서의 살벌한 눈빛에 곧바로 입을 열었다.

“피, 필베르타 공작님께서 다녀가셨습니다! 서류만 놓고 오신다고 하여 잠시 안에 들르셨습니다.”

그의 말에 옆을 함께 지켰던 이들이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필베르타 공작이……?”

“예, 전달해 드릴 서류가 있다고 하여 찾아오셨고 금방 떠나셨습니다. 정말 금방 왔다 가셨습니다. 물론 혼자서 나가셨고요.”

체이서는 빠르게 머릿속을 정리했다.

소식을 전해 오겠다며 사라진 시종, 잠시 들른 세자르와 그대로 밀실에서 실종되어 버린 에블린.

현재 에블린의 신상을 위협하는 이라 하면 각성제 개발과 관련된 이들 뿐이었고, 세자르 필베르타는 체이서에게 알게 모르게 자격지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는 잘 알고 있었다.

빠드득, 이를 가는 소리에 모두가 흠칫 떨며 눈치를 살피기 바빴다.

체이서는 심장이 빠르게 뛰는 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집무실 안에 자리한 책장에서 두꺼운 책 한 권을 꺼내었다.

그러자 책이 빠진 그 자리에는 문손잡이로 보이는 것이 나타났다.

체이서가 지체하지 않고 문을 열어 보자 벽 옆으로 통하는 공간이 나타났다.

그는 어두운 벽 안쪽으로 랜턴을 들이밀어 자세히 살펴보았고, 곧 수상한 점을 발견했다.

‘먼지가 쓸려 있군.’

각 기사 단장실마다 마련된 비상 탈출구는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았기에 그 티가 나는 법이다.

하지만 이곳은 사람이 머물다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필베르타 공작은 어디로 갔지?”

“그것까지는 저희도 잘 모르겠습니다.”

심각한 상황에 기사들의 목소리에도 긴장감이 담겼다.

체이서는 그들을 탓하는 대신 급한 일부터 해결하기 위해 곧바로 명령을 내렸다.

“너희는 황실 내에 필베르타 공작이 있는지 찾아보고 찾는 대로 즉시 체포하도록 하거라. 하소 경에게 지금 이 상황을 전달하고, 준비되는 대로 기사단을 끌고 필베르타 공작저로 출동하라 전하도록.”

그가 에블린을 데려갔을 거라고 확신에 찬 목소리에 누구도 의견을 낼 수가 없었다.

체이서는 두려움에 가득 찬 마야와 시녀들에게도 명령을 내렸다.

“너희는 내게 소식을 전하러 떠난 시종의 행방을 찾아라.”

혼란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명을 받은 이들이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체이서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는 허리춤에 찬 검을 확인한 뒤 빠르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목적지는 필베르타 공작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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