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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122)화 (122/159)

122화

문 앞에서 세자르를 마주하게 된 에블린은 어깨를 흠칫 떨며 뒤로 물러났다.

에블린이 주춤거리며 뒷걸음질을 치자 세자르는 표정의 변화도 없이 한 걸음, 한 걸음 천천히 따라오기 시작했다.

“어디를 가려 했는지 물었습니다.”

멀리 도망가고 싶었으나 출입구는 세자르가 들어온 곳뿐인지 주위를 아무리 살펴보아도 문처럼 보이는 것은 없었다.

“앗!”

결국 에블린의 발이 엉키고 그대로 옆으로 쓰러지려는 순간 세자르가 그녀의 허리를 감싸 제게로 끌어당겼다.

단번에 가까워진 거리에 놀라 숨을 들이켜는 에블린과 달리 세자르는 무엇이 즐거운지 입가에 미소를 띠고 있었다.

“마치 첫 만남 때가 생각이 나네요. 그때도 부인께서는 이리 넘어지실 뻔하신 걸 제가 도와드렸죠.”

“…….”

“부인은 생각보다 덤벙거리는 구석이 있었네요.”

마치 사랑하는 연인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에 에블린의 안색이 조금 전보다 더욱 새하얗게 질렸다.

“도대체 제게 왜 이러는 거세요?”

이제는 그의 일방적인 마음이 부담스럽고 두렵게까지 느껴졌다.

“저는 당신의 마음을 받아 줄 생각이 없다고 분명히 말씀드렸잖아요. 이, 이러는 건 옳지 못해요. 이만 돌려보내 주세요.”

똑바로 말을 내뱉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자꾸만 떨렸다.

“제 이름을 걸고 맹세컨대 부인을 해하고자 이곳에 데려온 게 아닙니다.”

“거, 거짓말하지 마세요. 납치했으면서 나보고 그런 말을 믿으라는 건가요?”

에블린의 눈에 서린 두려움을 눈치챈 세자르는 입가에 띤 미소를 지우더니 그녀의 허리를 안은 채 어디론가 걷기 시작했다.

“필베르타 공작, 제 말이 들리지 않나요? 이것 놓아요. 이것 놓으라고!”

힘껏 발버둥 쳐 보았지만 역시나 성인 남성의 힘을 떨쳐 내기에는 무리였다.

무력감에 울컥 차오른 건 조금 전까지 느끼던 두려움과는 조금 다른 감정이었다.

“놔, 놓으라고!”

“가만히 있어요. 부인을 다치게 하고 싶지 않으니까.”

침착해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럴 수가 없었다.

세자르가 저를 해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차올랐던 두려움은 서서히 분노로 바뀌기 시작했다.

에블린이 씩씩거리며 팔을 휘둘러도 세자르는 단번에 제압하고서는 그대로 그녀를 끌고 갔다.

그는 의자에 에블린을 앉혔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발버둥을 쳤지만, 세자르는 에블린의 팔을 등 뒤로 모으더니 밧줄로 그녀의 팔과 다리를 묶었다.

“…….”

지속되는 반항에 지친 에블린이 숨을 고르다가 저도 모르게 다시 크게 숨을 들이켰다.

깜빡거리던 랜턴의 불이 어느새 모두 켜져 있었고, 하필이면 그녀가 앉은 자리는 이 지하실이 한눈에 담기는 위치였다.

“어, 어떻게 이런…….”

주위가 환해지자 나열되어 있는 수조의 모습이 더욱 선명히 보였다. 그녀의 착각이 아니라 정말로 수조 속에 사람이 있자 그녀는 무슨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떨리는 눈으로 주위를 살피니 투명한 약병이 구석에 늘어져 있는 것도 보였다.

‘각성제야…….’

체이서가 압수 후 보여 주었던 각성제와 똑같은 약이 이 지하실에 가득 쌓여 있었다.

“필베르타 공작, 당신의 짓이었나요……?”

엄청난 충격에 에블린의 안색이 창백히 질렸다. 세자르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그녀의 뺨을 쓸어내렸다.

“가엾게도. 많이 놀라셨군요.”

오소소 돋는 소름에 그녀가 몸을 틀어 버렸지만, 그는 기분 나빠하기는커녕 더더욱 안타까운 얼굴로 에블린을 바라볼 뿐이었다.

“놀라실 법도 합니다. 저 또한 이곳을 처음 보았을 때 부인처럼 굉장히 놀랐었으니까요.”

세자르의 목소리는 그녀의 반응을 모두 예상했다는 듯 매우 여유로웠다.

“정말 이 모든 게 당신의 짓이었나요?”

에블린의 질문에 세자르는 곧바로 답을 하는 대신 천천히 걸어 그녀가 앉아 있는 의자 뒤로 향했다.

“제 아버지의 작품입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뒤 저는 그걸 그대로 물려받았지요.”

‘전대 필베르타 공작이 불법 각성제를 토벌하기 위해 애썼다고 말하지 않았나? 그런 그가 이런 불법 각성제를 만든 주범이라고?’

믿기지 않는 현실에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만 같았다.

그사이 세자르는 에블린의 등 뒤에 서서 의자 등받이에 손을 얹었다.

“저 또한 처음에는 부인과 마찬가지로 제 아버지께서 이러한 짓을 벌였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에 에블린은 온몸을 타고 소름이 돋았다.

이렇나 참극을 벌여 놓고서도 어찌 이렇게 웃을 수 있는 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버지의 장례식 바로 전날 이곳을 처음 발견했지요. 저는 장례식이 끝난 후 이 연구실에 대해 신고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하지 않았잖아요.”

“예, 하지 않았습니다. 어째서일 것 같습니까?”

어떠한 이유가 있다고 하든 이 짓은 용서받지 못할 일이었다.

에블린이 묻지 않자 세자르는 다시 작은 웃음을 흘렸다.

“이 약이 무엇인지 알고 있으신가요? 이건 바로 각성제입니다. 저는 이 각성제의 완성과 효과를 제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었습니다.”

“예……?”

당황스러움을 띤 물음에 세자르는 다시 그녀의 앞으로 다가와 섰다.

평소와 달리 음울한 눈빛은 꼭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보였다.

“이 각성제가 완성된다면 누구나 차별받지 않고 이능력을 소유할 수 있는 세상이 올 겁니다. 이 약은 모두를 위한 것이에요!”

말도 안 되는 궤변에 에블린의 표정이 처참히 일그러졌다.

이제야 단장실에서 그가 제게 했던 말의 의미를 깨달은 것이다.

‘이 수사를 탄압이라고 했던 게 저런 이유 때문이었던 거야?’

아직 증명이 안 되었다고, 확실한 효과가 나오면 다를지도 모른다며 현 상황을 날카롭게 분석하는 듯한 말을 꺼낸 것도 모두 그에게 이러한 사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약이 훌륭히 완성만 된다면 모든 것은 제자리로 돌아올 겁니다. 아니, 이 제국은 더 막강해지고 훌륭한 쪽으로 발전되겠죠. 바로 이 각성제로 인해 말입니다!”

세자르는 마치 대의를 위해서 이러한 일을 벌였다는 듯이 이야기하고 있었다.

하지만 에블린은 설득되기는커녕 오히려 그를 향한 실망감이 커질 뿐이었다.

‘모두를 위한 것이라고? 자기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이런 약으로 이능력을 만들어 준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되었다.

이능력이 괜히 하늘에서 내려 준 힘이라고 하겠는가.

고작 이능력이 뭐라고 이러한 사달을 낸 것인지 에블린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세자르는 에블린을 설득하겠다는 것에만 집중하느라 그러한 기색을 눈치채지 못했고 흥분이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물론 이 약으로 인해 약간의 피해자가 있기는 했습니다. 저 또한 그들에 대해 안타깝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약이 정식으로 개발된다면 그들의 묘와 유족들에게 찾아가 정식으로 사과할 것입니다.”

선심 쓰듯 내뱉는 말에 에블린의 표정은 더더욱 구겨졌다.

“하지만 이 약을 저 혼자서 완성하기는 어렵습니다. 연구의 총책임자인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셨지, 연구원들은 직접 실험체가 되어 저 수조 안에 들어 있지. 제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더군요. 그들 또한 마물이 되어 버린다면 이 각성제 연구는 실패로 돌아가겠죠.”

세자르는 부서진 수조들을 노려보며 타오르는 분노에 이를 갈았다.

에블린을 납치해 오면서 들어온 지하 연구실은 다행히도 지난 탈출 이후로 변한 것이 없었다.

자신이 조금만 더 조심했더라면 실험체들을 지킬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너무도 큰 탓에 오히려 스스로에 대한 분노가 차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이제는 끝이지.’

세자르는 사람 좋은 얼굴을 하면서 입으로는 그렇지 않은 말을 내뱉었다.

“그러던 도중 반가운 소식을 들었습니다. 각성제의 부작용으로 마물화한 이들이 당신의 말을 듣는다더군요.”

시작된 본론에 에블린의 얼굴 위에 서서히 경악이 떠올랐다.

이제야 세자르가 자신을 납치해 온 이유를 깨달았다.

“난 당신을 도울 생각이 없어! 이딴 미친 짓에 절대로 도움을 주지 않을 거야!”

“눈치가 빠르시군요. 그래서 단장실에서도 그리 피하려고 했던 걸까요.”

세자르는 이 정도 반응은 예상했다는 듯 그녀의 거부에도 차분히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세요, 에블린. 당신의 능력이 이 약을 완성할 수 있다면? 이 각성제로 인해 강력한 이능력자들을 만들을 수 있다는 뜻입니다!”

“모두를 위한 척하지 마세요! 당신의 이기심을 위해 그러는 것 제가 모를 줄 아나요?”

“왜 그리 편협한 생각을 하십니까. 저는 진심으로 이 세상을 위해서 이러한 연구를 계속해서 진행하려는 것인데.”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았다.

에블린은 가슴이 답답한 것과 별개로 감정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위태로웠다.

“이들이 마물이 되어 깨어나도 당신이 있다면 의사소통이 가능할 겁니다. 저 맨 끝 수조에 있는 이가 연구자 중 대표이니 그와 의사를 소통하면 더 훌륭한 각성제를 만들어 결국에는 완성할 수 있을 겁니다.”

“난 이 연구에 참여할 생각 없어요.”

“당분간은 이 정도로도 괜찮습니다. 당신이 없어진다면 치료제 개발도 차질이 생기는 건 순식간이겠죠. 차질이 안 생긴다면 그리 되게 만들면 되는 것이고.”

세자르는 냉정하게 말한 뒤 등을 돌렸다. 에블린을 두고 이 지하실에서 나가려는 것이었다.

아직 대화가 제대로 끝마쳐지지도 않았는데 멋대로 제 할 말만 내뱉고 나가는 모습에 그녀가 이성을 지키기 위해 꾹꾹 눌러 왔던 화가 터져 나왔다.

“……정녕 피해자와 그의 유가족들이 용서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가요?”

그에 세자르의 발걸음이 우뚝 멈추어 섰다.

“용서받도록 최선을 다해야죠. 어차피 각성제를 완성한다면 그들의 희생으로 훌륭한 약을 개발하였으니 용서할 수밖에 없겠지만요.”

오로지 자기주의적 사고에서의 생각이었다.

“그 말을 유가족들 앞에서도 할 수 있다고?”

“당연히 용서해 주지 않겠어요?”

악마가 하는 고해성사일 줄 알았더니 마치 제가 신이라도 되는 듯이 말하는 태도는 너무도 역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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