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화
에블린은 괜히 제 등장으로 주위가 시끄러워지는 것을 원치 않았다.
그녀는 체이서에게 단장실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편한 시간에 찾아오라는 말을 전할 사람을 보낸 뒤 약속 장소로 향했다.
“이곳은 여전히 정신이 없구나.”
소파까지 한가득 쌓인 서류를 보며 에블린은 입가를 가리고 작게 웃었다.
“나는 안에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 다들 밖에서 기다려 주렴.”
에블린의 말에 따라온 이들이 모두 밖으로 나갔다. 기사들은 문과 창 앞으로 나누어 호위를 서고, 그 곁에서 마야와 시녀들이 서서 대기했다.
오래간만에 혼자가 된 에블린은 답답함이 조금 가시자 빙긋 웃으며 그나마 비어 있는 의자에 앉았다.
그녀는 단장실의 곳곳을 살펴보면서 체이서의 흔적을 찾아가며 기다리는 시간을 알차게 보내었다.
‘보고 싶다.’
문제라면 이렇게 흔적을 찾으면 찾을수록 더더욱 그리움이 커진다는 것이었다.
‘나도 참 중증이구나.’
사랑에 빠지기 전까지는 몰랐는데 잠시만 떨어져 있어도 그가 보고 싶고, 그의 목소리를 듣고 싶었고, 그의 품에 기대어 함께 시간을 보내면 소원이 없을 것 같더라.
‘이번 일이 끝나면 같이 여행이라도 가자고 할까?’
이리 바쁘게 일하고 있으니 마물화가 해결되면 길게 휴가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에블린이 희망에 찬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똑똑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뭐지?’
자신의 집무실인데 굳이 노크할 필요가 있나?
에블린은 조금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고, 아니나 다를까 들어온 이는 체이서가 아니었다.
초췌한 안색의 사내를 빤히 보다가 뒤늦게 그가 세자르라는 걸 알아차린 에블린이 화들짝 놀랐다.
“필베르타 공작님?”
“아,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부인.”
“세상에나.”
에블린은 무례라는 것을 알면서도 놀란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세자르의 모습은 장례식에서 보았을 때보다 더 엉망이었다.
퀭하게 가라앉은 다크서클과 한눈에 보아도 잠을 잘 자지 못한 듯 푸석푸석한 피부, 그리고 안으로 깊이 폭 패인 볼을 보아하니 식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지내는 것처럼 보였다.
좋게 말하자면 환자 같았고, 나쁘게 말하자면 폐인처럼 보였다.
‘……아직도 마음을 추스르지 못한 걸까?’
장례식이 끝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다시 마물화 환자들이 등장하여 마음을 제대로 추스르지 못하고 다시 일자리에 복귀한 모양인지라 더욱 안쓰러워 보였다.
“체이서가 집무실로 향했다는 소식에 이곳에 왔는데 부인께서 홀로 계신 줄은 몰랐습니다.”
“밖의 기사들이 말해 주지 않던가요?”
“무어라 말했던 것 같은데 부인이 홀로 계신단 소리였나 봅니다. 사실 요새 이명이 자주 와 대화가 조금 어렵답니다.”
세자르는 그리 말하며 품에 안고 있던 서류를 체이서의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잠은 좀 주무시는 건가요?”
“제 안색이 많이 안 좋지요. 요새 그런 말 많이 듣고 있습니다.”
세자르가 어색히 미소를 짓는 것에 에블린은 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괜찮으신 것 맞아요? 쉬셔야 하는 게 아닐까 싶어요.”
“잠을 설치느라 그렇습니다. 그래도 요새는 괜찮아졌는데 제 몰골이 그리 별로인가요?”
“예, 많이 피곤해 보이세요.”
“잠을 더욱 늘여야겠네요.”
그는 제 뺨을 쓸어 보더니 그저 웃을 뿐이었다.
“참, 이번에 부인께서 큰 도움을 주시고 있다는 말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는 잠깐 창문에 시선을 던지더니 다시 에블린을 보며 웃었다.
“덕분에 해당 병의 원인에 대해 파악했고, 불법 이능력 각성제를 수거하여 그걸 토대로 치료제 개발에 몰두하고 있다더군요. 정말 다행이지 않습니까. 이게 다 부인 덕분입니다.”
“그리 말해 주시다니 부끄럽네요. 감사해요.”
“빈말이 아닙니다. 모두가 해내지 못한 것을 부인께서 하지 않았습니까. 조금 더 자랑스러워하셔도 좋아요.”
칭찬이 이어졌지만 어째 그의 얼굴에 서린 그림자는 더욱 짙어지는 것만 같았다.
에블린은 어색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번에는 일방적으로 대화를 피했다면 지금은 그에게서 대화를 나누기 어려운 분위기가 풍기고 있었다.
“만약 그 각성제가 없었더라면 이러한 일도 생기지 않았겠지요.”
에블린은 동의하려다가 무심코 마주한 그의 얼굴에서 이상함을 느꼈다.
‘꼭 후회하는 것만 같이 보이네.’
세자르는 에블린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건 꿈에도 모른 채 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제 아버지께서도 돌아가시기 전까지 불법 각성제를 뿌리 뽑기 위해 많이 노력하셨죠. 이번 마물화 또한 각성제와 관련이 있음을 아셨다면 이해하면서도 많이 속상해하셨을 것 같습니다.”
‘체이서는 언제 오지?’
대화를 꽤 나눈 것 같은데도 세자르보다 먼저 집무실로 향했다는 체이서가 늦어지는 게 이상했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에블린이 어쩔 수 없이 그렇냐며 고개를 끄덕이자 세자르가 슬쩍 그녀에게 한 걸음 다가왔다.
“하지만 만약 그 각성제가 마물화가 아니라 진짜로 이능력을 각성시켜 주는 것이어도 이리 탄압이 일어났을까요?”
“탄압이라니요……? 이게 어떻게 탄압이죠?”
에블린이 세자르의 말실수를 지적하자 갑자기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아직 증명이 안 되었을 뿐 확실한 효과가 있다는 것이 알려져도!”
성큼성큼 다가와 에블린의 코앞에 선 그가 평소의 차분한 이미지를 찾아볼 수 없게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리 취급하였을까요?”
“필베르타 공작께서 무슨 의도로 이런 말씀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이 과정이 모두 옳지 않다고 이야기하시는 건가요?”
에블린은 떨리는 두 손으로 주먹을 쥐고선 그를 노려보았다.
“아무래도 공작께서는 휴식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마치 제 상태가 이상하다는 듯이 구는군요. 저는 지금 누구보다 제정신입니다.”
“아니요, 전혀 제정신이 아니세요! 지금 공작께서 무슨 말씀을 하는지 알고 있으신가요? 마물화를 일으킨 이들을 이해한다는 듯 말씀하고 있지 않으십니까!”
“그거야 이능력을 갖고 싶어 하지 않는 당신은 그들의 마음을 모를 테니까!”
틀렸다.
제정신이 아닌 이와 아무리 설전을 주고받아 봤자 이 대화는 끝이 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에블린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짚고서는 고개를 휙 돌렸다.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지 않아요. 제 남편의 집무실에서 나가 주세요.”
“대화가 끝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요. 당신이 안 나간다면 내가 나갈게요.”
에블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서려고 했다.
그러던 순간 갑자기 팔이 잡혔고 세자르가 무언가로 에블린의 입을 틀어막았다.
“윽!”
에블린이 필사적으로 그를 떼어 내기 위해 발버둥을 쳤지만, 그녀의 힘으로는 덩치가 크고 힘이 센 기사를 떨쳐 내기에는 불가능이었다.
이상함을 느끼고 곧바로 숨을 참았지만, 어느덧 한계에 도달했다.
에블린이 숨을 들이켜자 이상한 냄새와 함께 머리가 어지러워지기 시작했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멀어지는 의식 사이로 설렘이 가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당신만 있다면…….”
그러나 그것도 잠시, 에블린은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
똑, 또옥.
무언가 물방울이 떨어지는 소리가 귓가 가까이서 들려왔다.
에블린은 번쩍 눈을 떴다가 강렬한 두통에 인상을 찌푸리며 앓는 소리를 내었다.
“으윽, 머리야…….”
그녀는 머리를 짚으며 일어나다가 문득 이곳이 낯선 장소임을 깨닫고서야 조심스럽게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어두워.’
벽에 걸린 랜턴에서 흘러나오는 빛은 희미하고, 깜빡거리기까지 해 이곳이 어디인지 확인하기가 어려웠다.
에블린은 몇 번이고 눈을 감았다 뜨며 눈이 어둠에 적응하기를 기다렸다.
‘이게 어떻게 된 거지? 여긴 어디고. 그래, 분명 세자르가 이상한 소리를 하더니 갑자기 나를 기절시켰어.’
분명 체이서의 단장실 밖으로 통하는 출입구에는 모두 호위 기사가 서 있었을 텐데 세자르는 어떻게 그들의 눈을 피해서 자신을 납치한 걸까.
‘다행히 주변에서 인기척은 느껴지지 않는데.’
에블린은 무심코 손을 짚고 일어나다가 제 옆에 무언가 있음을 확인했다.
그녀의 왼쪽에는 거대한 기둥 하나가 서 있었는데 눈을 가늘게 뜨고선 그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자 곧 그 정체를 알 수가 있었다.
‘수조?’
사람이 들어가도 남을 것 같은 거대한 수조에 슬쩍 손을 얹어 보니 안에 무언가 들어 있는지 굉장히 차가웠다.
‘뭐가 들어 있는 거지?’
어느덧 눈이 어둠에 적응하자 시야에 주위의 광경이 선명히 잡히기 시작했다.
에블린은 수조에 가까이 얼굴을 붙여 안을 들여다보았다. 곧 안에 있는 무언가를 발견한 순간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라 뒤로 넘어지고 말았다.
“허억!”
어찌나 깜짝 놀랐는지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에블린은 숨을 거세게 들이켜며 혹시나 비명이 새어 나올까 입을 틀어막았다.
물로 가득 찬 수조 안에 사람이 있었다.
‘이, 이게 무슨…….’
겁에 질려 다급히 주위를 살피던 에블린은 정말로 혼절할 것만 같았다.
그녀가 발견한 수조 뒤로 죽 늘어진 수조가 보였다.
몇 개는 처참하게 부서져 있었지만, 멀쩡한 수조에는 그녀가 본 것과 마찬가지로 물이 가득하고,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 그 안에 있었다.
‘도, 도망가야 해.’
에블린은 빠르게 일어나 문으로 보이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하지만 문은 굳게 닫힌 채 열리지 않았다.
그녀가 몇 번이고 문손잡이를 잡고 흔들었으나 문은 열리기는커녕 끄떡도 하지 않았다.
“열려, 열려. 열리란 말이야!”
더욱더 힘을 실어 문손잡이를 흔들자 갑자기 벽이 떨리기 시작했다.
에블린은 희망을 품고서 더욱 손잡이에 힘을 주었고, 곧 문이 바깥을 향해 열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나올 뻔한 비명을 삼키고서는 속으로 환호했다.
‘됐…….’
그러나 그 환희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어디를 가시려고 합니까?”
열린 문 앞에는 서늘한 얼굴의 세자르가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