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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120)화 (120/159)

120화

“어째서 일이 이렇게 된 걸까.”

에블린은 창문 앞에 서서 저택 정문 앞에 모인 사람들을 보다가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모두 내쫓을까요?”

“나쁜 의미로 모인 것도 아닌데 그럴 수는 없지.”

에블린의 시선이 탁자 위에 놓인 신문에 향했다.

그곳에는 에블린이 마물화에 감염되고서도 멀쩡하다는 것과 그녀의 주변에 있던 감염자들의 증상이 약화가 된다는 내용과 함께 항체를 확보하였고, 이를 통한 치료제 개발에 진전을 보인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필요시 모두의 앞에 나서겠다고 저를 이용하라 말하기는 하였으나 그게 이렇게 빨리 일어나게 될 줄은 몰랐다.

‘그래도 체이서가 곧바로 어떻게 되었는지 알려 줘서 다행이야.’

그에게 따로 듣기로는 에블린의 주위에서 일어났던 점을 토대로 황실에 보고를 올리자마자 민심을 달래기 위해 극비로 취급하던 내용을 멋대로 신문사에 전했다고 하더라.

‘그래, 민심 중요하지. 중요한 것 알지만…….’

모여 있는 이들은 치료제 개발을 위해서 성심성의껏 나서는 귀부인인 에블린을 칭송하고 있었다.

아직 마음의 준비도 채 되지 않은 상황이다 보니 당황스러웠다.

“다행히 이능력에 대해서는 특별한 언급이 없네요.”

“후속 속보로 내보낼 내용이었대. 체이서가 알고 그건 어떻게든 막았다 하더라고. 단순히 항체 취급만 받게 되어서 다행이라 해야 할지. 그나마 관심이 덜할 테니까.”

에블린은 마야가 따라 준 따스한 차를 마시며 심신의 안정을 되찾았다.

“그래도 치료제 개발이 멈추지 않아서 다행이야. 이대로 흐지부지되지는 않을까 걱정되었는데.”

마침 체이서가 감염자들의 거처를 확인하다가 수상한 물약을 발견하고 일이 더욱 수월히 흘러갔다.

‘주위 지인을 심문해 보니 이능력 각성제라며 일하던 곳에서 몰래 훔쳐 왔다고 했지. 그리고 그걸 암시장에 내놓으려고 했지만, 그 전에 마물화가 진행이 되어 버렸고.’

아니길 바랐지만 소름 돋게도 그들이 함께한 추측이 어느 정도 맞아떨어졌다.

각성제 소유자가 일한 곳이 어디인지만 찾아낸다면 마물화 전염병의 진짜 원흉에 대해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정말 내가 나설 필요가 없겠지.’

더 나서서 방해되는 것보다는 이대로 가만히 결과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체이서를 도와주는 일일 것이다.

‘오늘은 제리의 옆에서 잘까.’

에블린이 그리 생각하며 남은 차를 넘기는데 그때 집사가 급한 서신이 도착했다며 방으로 찾아왔다.

“혹시 모를 위협이 있을지도 모르니 마님을 황실로 모시라는 황후 폐하의 명령이 내려왔답니다.”

“아무래도 황후 폐하께서는 가주님께서 저택을 비웠으니 불안하셨나 봅니다.”

집사와 마야의 말에 에블린은 얼떨떨하게 자리에서 일어나 황실로 향하는 준비를 할 수밖에 없었다.

“제리가 신경이 쓰이는데…….”

“도련님은 저희가 잘 돌보고 있겠습니다. 혹시 모를 특이 증상이 나타난다면 곧바로 서신을 보낼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리의 사정에 대해 아는 집사의 말에 에블린은 조금이나마 걱정을 덜고서 황실로 향하는 마차에 오를 수가 있었다.

“와아, 공작 부인이시다!”

“감사합니다, 부인! 덕분에 우리를 괴롭히던 그 병이 사라질 겁니다!”

“만세, 만세!”

모인 이들이 거리를 꽉 채울 정도로 많았던 것은 아니었지만 마차에 달라붙어 통행이 방해되었다.

마차가 속도를 내지 못하고 더디게 움직이고 있는 도중 어디선가 많은 말발굽 소리가 들려왔다.

에블린이 호기심에 창밖으로 빼꼼 고개를 내밀었고.

“모두 물러나라.”

기사단의 중심에서 몰려 있는 인파를 향해 짧게 경고하는 체이서를 발견하였다.

‘사흘 정도 떨어져 있었는데 되게 오래간만에 만나는 것 같네.’

에블린은 멍한 얼굴로 체이서를 바라보다가 그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마차 안으로 숨었다.

‘훔쳐보다가 들킨 기분이야.’

황실에서 보낸 기사단 덕분에 마차는 든든한 호위를 받으며 주위의 방해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에블린이 부끄러움에 달아오른 뺨에 손을 얹어 식히고 있을 때, 마차의 창문 너머에서 갑자기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누구세요?”

사실 공작 부인의 마차를 이렇게 두드릴 수 있는 게 이곳에 체이서밖에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에블린은 시간을 끌기 위해 질문을 던졌다.

“나야, 에블린. 창문을 좀 열어 주지 않겠나?”

에블린은 마야에게서 얼굴빛이 돌아왔다는 것을 확인받은 뒤 천천히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마차와 비슷한 속도로 말을 타고 이동하는 체이서를 볼 수 있었다.

‘근사하다.’

에블린은 저도 모르게 넋을 잃고 보다가 고개를 붕붕 내저었다.

‘상황이 심각한데 이런 생각이나 하고.’

그녀의 표정이 쉽사리 펴지지 않으니 가만히 지켜보던 체이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내게 화가 났나?”

“……네?”

뜬금없는 소리에 에블린이 고개를 갸웃하며 묻자 체이서는 기운 없는 목소리로 답을 이어 갔다.

“내가 네 기사를 모두 막지 못해서 그 때문에 피곤하게 시달리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화가 나서 내 얼굴도 보기 싫은 건가 싶어서.”

“그럴 리가 없잖아요. 그건 그냥…….”

말하기 부끄러워 조금 머뭇거리는데 체이서가 기운 없이 어깨를 늘어트리는 게 보였다.

더 말을 아끼다가는 말도 안 되는 오해를 쌓게 될 것 같아 에블린이 기운차게 외쳤다.

“그냥 오래간만에 당신을 보니 너무 반가워서 그랬어요! 조금 전에는 너무 멋있어 보여서 저도 모르게 그만…….”

막상 본심을 꺼내 놓으니 창피했지만, 그녀의 말에 곧바로 미소를 짓는 체이서를 보니 후회되지는 않았다.

“황후 폐하께서 신경 써 주신 덕에 당분간 황후궁에 머무를 수 있을 거야. 공작저의 보안도 나쁘지 않지만…….”

체이서는 부끄러움이라고는 없는 표정으로 당당히 말했다.

“황실에 있으면 지금보다 만날 기회도 더 많아지겠지. 시간이 나면 찾아갈 수 있을 테니까.”

다시 말해 황후의 제안을 거절할 수도 있었지만 사심을 담아 그 청을 허락했다는 뜻이었다.

솔직한 그의 애정 표현에 에블린의 볼이 다시 발갛게 달아올랐다.

심각한 이 상황 속에서도 간질간질하는 이 감각이 너무나도 좋아 미칠 것 같았다.

“……시간이 나면 찾아오는 거 약속이에요?”

“아무렴.”

두 사람이 애정이 가득한 대화를 나누는 사이 어느덧 마차는 황궁의 정문에 도착한 상태였다.

체이서는 자신을 제외한 기사단을 물리고 그녀가 타고 있는 마차를 황후궁으로 안내하였다.

그리고 황후궁에 도착하였을 때 이자벨라 황후는 직접 문 앞에 나와 에블린을 기다리고 있었다.

에블린은 체이서의 에스코트를 받아 마차에서 내리며 예를 갖추어 인사했다.

“황후 폐하를 뵙습니다.”

“인사를 받겠네. 괜찮으니 고개를 들게.”

이자벨라 황후는 단걸음에 뛰쳐나와 에블린에게로 다가왔다.

“폐하, 날이 추운데 어찌하여 이리 나와 계셨습니까.”

체이서의 물음에 이자벨라 황후가 심장에 손을 올리고선 한숨을 내쉬었다.

“내 걱정이 되어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네. 물론 공작과 기사단을 믿지만 그래도 걱정이 되는 걸 어떻게 하겠는가.”

이자벨라 황후는 곧바로 체이서에게서 시선을 거두고서는 에블린의 손을 붙잡으며 물었다.

“공작 부인, 오는 길은 편안하였는가?”

“그럼요. 기사단에서 호위해 주어 편히 왔답니다. 이리 불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하기는. 그대와 같이 중한 인물이 혹시나 위협을 당할 걸 생각하면 내 아찔해서 잠이 오지 않더군. 자, 어서 안으로 들어가지. 내 미리 머물 곳을 준비해 두었으니.”

에블린은 그대로 이자벨라 황후의 손에 이끌려 황후궁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가 애절한 눈빛으로 뒤를 돌아보았으나 체이서는 허락이 없는 이상 황후궁 안으로 들어올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눈빛으로 인사를 한 뒤 짧은 만남을 끝내야 했다.

*** 

황후궁에서 에블린의 생활은 평화로웠다.

이자벨라 황후는 굳이 제게 문안 인사를 올 필요가 없으며 그저 푹 쉬라며 따스한 말을 남겼다.

다만 그녀 또한 현 상황에 대한 내막을 알고 있었기에 시녀들에게 에블린을 특별히 신경 쓰라며 당부하였고, 그녀는 공작저에서보다 더욱 편안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갑갑하네.”

황후궁 정원은 산책할 맛이 있었지만, 그것도 일주일이 넘어가니 크게 끌리지 않았다.

‘그래도 산책이 아니면 크게 할 일도 없으니.’

에블린은 제 뒤에 주렁주렁 매달린 시녀와 기사들을 보다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래서야 보호가 아니라 감시 같기도 하고.’

답답함에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녀가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옆을 따라오는 시녀에게 물었다.

“황후궁 밖으로는 아예 나가서는 안 되나?”

“안전을 위해서는 그러기를 권유해 드리지만 폐하께서 혹 부군이 그리워지실 수도 있으니 기사단이나 연구실 쪽의 방문은 허가하신다 하셨습니다.”

“……그, 그러셨구나.”

“예, 상황이 이런다 한들 신혼이시니 두 분이 많이 그리우실 것이라며 이 두 곳의 외출은 기사를 대동한 채 허락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부끄럽지만 거절하기에는 이미 체이서를 볼 생각에 가슴이 콩닥거리며 뛰고 있었다.

‘그리고 현재 진행 상황이 어느 정도인지도 궁금하고.’

이능력 각성제를 수거하는 작업에 착수했다고는 하지만 그 후로 접한 소식이 없었기에 이번 기회에 물어보고 와도 괜찮을 것 같았다.

“꽤 오래 보지 못하셨잖습니까. 그간 답답하셨을 텐데 잠깐이나마 외출하고 오시는 건 어떨지요?”

“그래도 절차라는 게 있는데…….”

“이 사항에 대해서는 미리 명해 주신 것이기에 굳이 허락받으러 올 필요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시녀는 걱정하지 말라며 방긋 웃어 보이며 말했다.

“사실 루이사 공작 각하께서 황후 폐하께 요청했던 건이기도 하고요.”

“체이서가?”

“예. 부인이 보고 싶다며 방문을 계속 요청하니 이러한 외출을 허락하신 모양입니다.”

체이서 또한 저와 같은 마음이었다는 말에 에블린의 기분이 금세 좋아졌다.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굳이 마다할 필요가 없겠지?’

그래도 확신이 서지 않았기에 에블린은 슬쩍 마야에게 눈짓을 건네었다.

마야가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것에 그제야 에블린은 입가에 환히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그럼 옷을 좀 갈아입고 갈까?”

무려 일주일만의 만남인지라 제 모습이 후줄근하지는 않을까 걱정되어 한 말에 마야는 웃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이미 매우 아름다우십니다.”

주변에서 이어지는 동조의 말에 에블린은 떨리는 마음을 가다듬고선 기대감이 가득 찬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럼 잠시만 다녀와 볼까? 혹시 그이가 어디 있는 줄 아는 사람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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