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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118)화 (118/159)

118화

역시나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누가 봐도 수상해 보였겠지.’

아무래도 이들 중 몇 명은 에블린이 이 마물화 병을 퍼트린 주범이라 생각하는 모양이다.

‘이런 반응이 당연한 거겠지?’

에블린이 씁쓸한 얼굴로 어떻게 이들의 오해를 풀어야 할지 고민하는 사이, 체이서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으르렁거렸다.

“제록 경, 내 앞에서 내 부인을 두 번이나 모욕했군. 그 말에 책임질 각오로 입을 연 거겠지?”

화가 가득한 체이서의 목소리에 제록의 얼굴이 창백히 질렸다.

“어디까지나 만약의 가정일 뿐입니다.”

“그 가정으로 인해 내 부인이 피해를 볼 건 생각하지 않는 건가? 그녀는 누구보다 이 병의 치료제를 개발하기 위해 힘쓰는 이야.”

금방이라도 검을 뽑아 들 것 같은 기세에 그는 말을 더듬으면서도 제 의견을 고수했다. 

“하, 하지만 애초에 마물이 사람의 말을 듣는 것도 말이 안 됩니다! 혹시 무언가 잘못 보고 착각을 한 것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아이고, 제록 경. 저라면 우선 입 다물고 다른 이야기를 나눠 볼 것 같아요. 확실시된 것도 아닌데 그런 말을 함부로 입에 담으면 정말 큰일 납니다.”

하소가 눈치껏 둘 사이로 끼어들며 험악한 분위기를 중재했다. 그녀는 미안한 얼굴로 에블린을 바라보며 고개를 꾸벅였다.

“죄송합니다, 부인. 부인의 노고는 우리 모두 잘 알고 있습니다. 조금 전의 말은 혹시나 하는 가정이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것 압니다.”

“그리 생각해 줘서 고마워요.”

하소의 사과에 딱딱히 굳은 에블린의 표정이 풀렸다.

그제야 체이서 또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그녀의 옆에 섰고, 다시 대화할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제가 알기로 보통 전염병은 동물이나 식수, 감염자와의 접촉 등으로 인해 감염된다고 알고 있는데 맞을까요?”

“예, 보통 그런 경로를 통해 감염됩니다. 다만 이 경우는 마물화 증상이 있기에 마물과의 접촉부터 확인해 보았죠.”

“그들이 마물과 접촉했었나요?”

그에 하소는 조금 애매하다며 설명을 이어 갔다.

“첫 감염자는 용병이었고, 그가 일을 끝마치고 돌아왔을 때 전갈의 형태를 띤 작은 마물을 가지고 왔다 가족들이 증언하였습니다. 저희는 해당 마물이 이 병의 원흉이라 생각하여 조사해 보고는 있습니다만 지금까지 특별히 발견된 점은 없더군요.”

이런 말은 들은 적 없었기에 에블린의 시선이 체이서에게로 향했다.

그는 짜증이 서린 목소리로 그녀의 궁금증을 금방 풀어 주었다.

“첫 조사를 나간 이들이 그 마물이 애완용 전갈인 줄 알고 두었다가 이번에 새로 파견 나간 기사가 발견하고서 어제 수거해 온 거라더군.”

기가 막힌다며 헛웃음을 치는 것에 잔잔한 분노가 서려 있었다.

에블린은 체이서의 팔을 가볍게 토닥이면서 다시 하소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다른 감염자들은 마물과 접촉한 적이 없다고 하더군요.”

‘의심받기는 했지만, 대화해 보기를 잘했다.’

확실치는 않지만, 감염의 원인으로 추정되는 마물이 있다니 그나마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렇다면 제가 그 마물을 한번 살펴봐도 될까요?”

“예?”

“만약 그 마물이 마물화의 원인이라면 지금까지 접한 마물화 환자들처럼 제 이능력이 효과가 있을 거예요. 하지만 효과가 없다면 그 마물이 원흉이 아닐 가능성이 커지겠죠. 그렇다는 건 누군가…….”

에블린은 침을 꿀꺽 삼키고서는 굳은 얼굴로 마지막 말을 삼켰다.

‘누군가 일부러 이 병을 퍼트렸을지도 모르지.’

에블린이 굳이 입에 담지 않더라도 모두가 뒷말을 예상한 듯 갑갑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함부로 민간인에게 공개할 수는 없습니다.”

대화가 끝나 감에도 제록의 융통성 없는 답에 체이서가 미간을 찌푸리자 하소가 눈치껏 재빨리 그를 말렸다.

“제록 경, 부인께서는 평범한 민간인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항체로서 저희에게 피를 제공해 주신 분이지 않습니까.”

“항체가 아니라 단순 이능력으로 인한 효과일지도 모른다고 직접 본인의 입으로 말씀해 주지 않으셨습니까.”

“그렇다 하더라도 부인께서 저희에게 도움을 준 게 없던 일이 되는 건 아니니까요. 치료제 개발이 순항에 오른 것도 다 부인 덕 아닙니까.”

하소의 시선이 체이서에게 향했고, 그가 한 번 봐줬다는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다.

“내 부인의 의견이어서가 아니라 그녀의 추론은 어느 정도 타당하다고 여겨져. 그리고 확인해서 나쁜 것 없지 않나. ”

“하지만 이런 말도 안 되는 가정에 낭비할 시간이…….”

“마물화에 감염된 이들이 에블린의 말을 알아듣는 걸 내 두 눈으로 목격했음에도 믿기지 않다고 하지 않았나? 직접 마주할 기회를 주었으니 군말하지 말고 따르도록 해.”

결국 체이서의 입에서 쓴소리가 나오자 제록이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내 부인이 굳이 그대들에게 거짓말을 할 이유가 있나? 우리는 지금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때야.”

불만스러운 표정이 여전히 가시지 않자 체이서의 입에서 끊임없이 날카로운 말이 튀어나왔다.

그의 기세가 심상치 않음에 에블린은 그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그의 손을 붙잡고서 구석으로 이동하였다.

“많이 화났어요?”

“……에블린 네게 화가 난 게 아니야.”

“알아요. 표정만 봐도 이 상황이 마음에 안 드는 게 딱 보이는걸요.”

“진작 이상한 점을 눈치채지 못한 내가 너무 어리석어. 만약 내가 조금만 더 빠르게 눈치챘더라면 당신도 이런 모욕적인 언사 또한 듣지 않았겠지.”

“우리가 그간 좀 혼란스러웠잖아요. 저는 이제라도 눈치를 챈 것도 다행이라 생각해요. 그리고 저는 다른 사람이 절 의심하고 믿지 않아도 괜찮아요. 체이서가 저를 믿어 줄 테니까요.”

에블린은 체이서의 손을 붙잡고선 상냥하고 다정히 웃었다.

“상황이 자꾸만 뜻대로 흘러가지 않으니 힘들죠? 저도 도울 테니까 우리 조금만 힘내 봐요.”

“정말 못 볼 꼴만 보이는 것 같군. 네가 이렇게 연관되지 않기를 바랐는데.”

“전 오히려 도울 수 있다는 게 기뻐요.”

“너는 원래 그런 이니까. 착하고, 다정하고 또 친절하지.”

체이서는 복잡한 얼굴로 에블린을 지그시 바라보더니 결국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말았다.

“그래서 내가 당신을 이기지 못하나 봐.”

그는 에블린을 품에 끌어안고서는 그녀의 귓가에 작게 속삭였다.

“절대로 네가 위험에 처하지 않게 할게. 앞으로는 그 누구도 너를 의심하지 못할 것이며, 조금 전과 같은 모욕을 듣지 않게 하겠어.”

굳센 결의가 찬 말에 에블린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네, 믿어요.”

웃고는 있지만 사실 에블린도 이리 나서는 것이 조금 두려웠다.

제록의 반응처럼 이 마물화 병의 원흉으로 몰릴 수도 있었고, 해결되기 전까지 수많은 의심의 시선을 받을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체이서가 옆에 있다면 무섭지 않을 것 같아.’

누구보다 든든한 장벽이 옆에 있으니 두려워할 필요가 없었다.

다정한 포옹을 나눈 체이서와 에블린은 곧 서로에게서 떨어졌다. 

서로를 향한 애정은 이 모든 일이 끝내고서도 충분히 나눌 수가 있으니까.

***

에블린은 새장의 형태를 띤 감옥 앞에 의자를 가져와 앉아 안에 들어 있는 전갈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얌전하네요?”

“조심하셔야 해요. 가까이 다가가면 위협적인 자세를 취하더라고요.”

하소의 조언에 에블린은 긴장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무어라 말을 해 볼까요?”

“평소 하셨던 대로 해 보시면 됩니다.”

“음, 그럼. 내 말이 들린다면 집게를 들어 볼래?”

에블린은 고민 끝에 말을 꺼냈으나 전갈은 얌전했다.

‘시선이 많으니 조금 민망하네.’

“내 말이 들리면 살짝 몸을 틀어 보지 않을래?”

이어지는 말에도 마물은 반응이 없었다.

“내 말을 알아듣겠으면 어떠한 반응이라도 보여 줘.”

몇 번이고 비슷한 말을 건네 보았지만, 마물은 여전히 감감무소식이었다.

하소는 새장 위에 천을 씌워 놓고는 이번에는 그녀를 다른 감옥 앞으로 데려갔다.

그 안에는 예전에 마물화에 감염되어 가족의 동의로 치료제의 실험체로 있는 이들이 있었다.

“똑같이 해 보시면 됩니다.”

하소의 말에 에블린은 긴장된 얼굴로 입을 뗐다.

“내 말을 알아듣겠으면 일어나 보지 않을래?”

혹시나 조금 전의 마물과 같이 반응이 없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이번에는 특별한 반응이 나타났다.

세 명의 실험체가 모두 바닥에 앉아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마, 말을 듣네요?”

멀리 있는 의료진 쪽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꼭 응원가같이 느껴졌다.

에블린은 힘내서 이어 질문을 던졌고, 감염된 이들이 모두 의사소통이 통하듯 반응을 보이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맙소사, 정말로 말을 알아듣다니.”

“그럼 저 전갈 마물은 마물화의 원인이 아니라는 건가요?”

“확률이 낮아질 뿐 우리는 모든 수를 고려해야 하지 않습니까.”

“맞습니다. 저 마물 쪽 또한 계속해서 조사해 보아야 합니다.”

다시 바삐 토론을 나누는 이들을 뒤로하고 에블린은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체이서의 뒤를 따라 연구실 밖으로 나섰다.

둘은 근처에 배치된 벤치에 앉았고, 에블린은 지친 얼굴로 체이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었다.

“반응이 나오지 않을까 봐 순간 덜컥 겁이 났지 뭐예요?”

“이런. 조금 전 자신감 있게 말하던 이는 어디 갔지?”

체이서의 웃음기 띤 목소리에 에블린은 저도 모르게 따라 웃어 버렸다. 

“있죠, 확실히 능력이 조금 사용된 것 같아요.”

지금껏 신경 쓰지 않아 몰랐지만 인지하고 나니 확연히 그 차이가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끔찍한 가정이 현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체이서, 이건 혹시나 하는 가정이지만 만약에 마물화 병이 누군가가 일부러 퍼트린 거라면 어떻게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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