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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117)화 (117/159)

117화

풍선이 터지듯 거대한 소리가 연이어 울리며 끔찍한 광경이 펼쳐지자 당황한 마야가 발을 헛디뎌 그대로 넘어지고 말았다.

함께 따라가던 에블린 또한 균형을 잡지 못한 채 몸이 기울어 넘어졌다. 그녀는 몸을 일으키는 대신 반사적으로 마야를 끌어안았다.

잠시 후, 정신을 차린 마야가 헉 숨을 들이켜더니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죄송합니다, 마님! 괜찮으세요?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신가요?”

“아냐, 나는 괜찮아. 마야는?”

에블린은 어깨에 둘렀던 숄을 바닥에 떨구며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은 서로 다친 곳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커다란 소리가 난 철창 쪽으로 고개를 돌릴 수가 있었다.

“맙소사…….”

감옥 안에 펼쳐진 끔찍한 광경을 마주한 두 사람은 쉽사리 입을 뗄 수가 없었다.

감옥 안에 있던 마물은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대신 마물이 있던 주위로 끈적한 붉은색의 덩어리가 이리저리 흩어져 있었다.

에블린은 멍하니 붉은 덩어리들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앞으로 다가갔다.

“마야, 몸에 묻은 건 없지?”

“네? 네!”

에블린의 물음에 마야는 재빨리 제 몸을 확인해 보고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님께서는…….”

에블린의 시선이 바닥에 떨어진 숄로 향했다. 얼룩덜룩해진 숄과 달리 그녀의 옷은 멀쩡하였다.

“숄이 두꺼워서 피부에 직접적으로 안 닿은 모양이야. 아무래도 마부는 그대로 터져 버린 것 같구나.”

철창 가까이 다가가자 실상은 더욱 처참했다.

‘살처럼 보이지는 않은데…….’

날짐승의 모습은 찾아볼 수 없는 붉은 덩어리는 꼭 슬라임 같기도 했고, 녹아 엉겨 붙은 젤리같이 보이기도 했다.

“마부가 감염이 된 지 얼마나 지났지?”

“대략 하루 정도가 걸렸어요.”

그에 에블린의 표정이 절로 심각해졌다.

‘확실히 병이 진화하고 있어.’

지금까지 보였던 병의 증세는 적절한 조치를 취하면 계속 살려 둘 수는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새로 등장한 마물화의 증상이 결국 사망까지 도달해 버리고 말았으니 이는 그냥 두어서는 안 되었다.

“……아무래도 이 일에 대해서는 체이서와 대화를 조금 나누어 봐야 할 것 같아.”

에블린은 마야에게 발이 빠른 이를 보내라 명한 뒤 덧붙였다.

“체이서가 오기 전까지 이곳의 출입은 금하도록 하자. 현장은 이대로 보존해 두고.”

***

체이서가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그의 곁에는 하소를 포함한 하얀 가운을 입은 연구진과 의사들이 함께였다.

그는 연구진과 의사들에게 안을 살펴보라 명한 뒤 곧바로 에블린에게 다가왔다.

“다친 곳은 없나?”

“저는 괜찮지만, 마부의 상태가 끔찍해요. 혹시 다른 감염자들도 이러한 특징을 보였나요?

체이서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심각한 얼굴로 덧붙였다.

“이번 감염자 모두 똑같은 최후를 맞이했어.”

“추가 피해는 없었고요?”

“부푼 살점이 터지면서 피가 피부에 닿은 이들은 고통을 호소하기는 했지만, 감염 증상은 보이지 않았어. 혹시 몰라 격리 중이고.”

그나마 다행이었다.

“……제가 외출하지 않았더라면 그는 감염되지 않았겠죠.”

밀려오는 죄책감에 정신이 아찔해지는 기분이었다.

체이서는 그렇지 않다며 에블린을 다독여 주었지만, 그녀의 표정은 쉽사리 펴지지 않았다.

‘차라리 희망을 주지 말 걸 그랬어.’

치료제를 개발해서 꼭 살려 주겠다고 약속까지 했는데 그는 희망을 품은 채 죽고 말았다.

‘기만 그 자체야.’

괜찮은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만, 감정의 조절이 참으로 쉽지 않았다.

그런 그녀를 가만히 지켜보던 체이서가 슬쩍 다가가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래도 감염자 중 마부만이 그나마 오랜 시간 동안 살아 있던 편이었어. 다른 감염자들은 모두 반나절 안에 죽었으니까. 빠르게 격리하고 상황을 지켜본 덕에 조금 더 오래 살았던 걸 거야.”

“그런 걸까요.”

에블린은 결국 참던 한숨을 낮게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제 주변의 감염자들은 모두 특이한 증상을 보였던 것 같아요. 이것도 제가 항체여서 그런 걸까요?”

에블린의 물음에 갑자기 체이서의 표정이 굳었다.

그는 무언가 곰곰이 생각하는 듯하더니 그녀에게 물었다.

“수도원의 그 감염자, 네가 계속 돌봤다 했었지?”

“네? 네.”

마물화에 감염된 이가 사람으로 변하여 수도원 앞에 쓰러져 있었고, 에블린은 그를 직접 돌보았다.

하지만 그녀가 잠깐 자리를 비웠을 때 그는 마물이 되어 수도원을 공격하였었다.

“더스틴은 너와의 만남 이후 갑자기 사람으로 변하였고?”

“……그렇죠. 첫 만남 때는 아무래도 그런 모습이었으니까요.”

더스틴과의 첫 만남에서 그는 흉포한 마물의 모습으로 그녀를 공격했지만, 다음 만남에서는 이성을 되찾은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수도원에 있을 때 제리와는 가까이 지냈나?”

“그럼요. 막내다 보니 가끔 제 침대에서 재우는 일도 있었어요. 아무래도 다른 아이들보다는 가까이 두어 지켜봤죠.”

제리 또한 마물이 되었지만, 어째서인지 갑자기 인간으로 변하였고 지금까지 깊은 잠에 빠져있었다.

‘마치 처음 만난 마물화 환자처럼…….’

체이서와의 대화를 이어 가면 이어 갈수록 에블린의 표정이 하얗게 질려 갔다.

“그, 그리고 마부도 반나절 이상은 함께 이동했어요.”

이리 특이 증상이 차고도 넘쳤었는데 지금까지 이상함을 눈치채지 못했던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참, 마물화 된 마부 또한 제 말을 알아들었어요. 더스틴처럼요! 맙소사! 이걸 왜 이제야 깨달은 거죠?”

에블린은 머리를 짚으며 제 어리석음을 탓했다.

“아무리 제가 항체라지만 고작 옆에 있는 것만으로 영향을 줄 수 있는 걸까요?”

그녀의 말이 끝나자 체이서는 연구진들에게로 고개를 돌렸고, 자연스럽게 에블린의 시선도 그리로 향했다.

“저분들은 누구세요?”

“하소 경과 함께 치료제를 개발하던 이들이야.”

그들은 감옥의 환경을 살펴보는 이, 집사를 통해 격리 과정에 관해 설명을 듣는 이, 흐물거리는 덩어리를 표본으로 채취하는 이 등 다양하게 역할을 분배하여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모든 상황을 조사해 보고 싶다 해서 데려왔는데 덕분에 곧바로 물어볼 수 있게 되었군.”

체이서는 잠시 기다리라며 그들에게 다가갔다.

그는 바삐 움직이는 이들을 한곳에 모아 두고서 심각한 얼굴로 대화하기 시작했다.

멀찍이 떨어져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에블린 또한 지금까지 제 곁에서 일어났던 특이한 상황에 대해 머릿속으로 하나씩 짚어 보았다.

‘왜 내 곁에 있는 이들의 마물화 속도가 느려졌을까. 내가 항체여서? 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증명하기가 부족해. 혹시 내 이능력과 상관이 있는 건 아닐까?’

에블린의 힘은 이능력자들의 능력을 진정시키거나 봉인하는 등 능력을 억제하는 쪽에 가까웠고, 만약 그녀의 능력이 발휘되었던 것이라면 이 상황이 이해될 법도 하였다.

‘하지만 내 능력이 마물에게는 안 통할 텐데.’

에블린의 능력은 오로지 이능력을 가진 이들에게만 사용할 수 있었기에 마물에게 적용되지 않음이 옳았다.

더스틴은 이능력자였지만 마부나 제리의 경우는 그러한 특이사항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는 감염자가 아니라 마물화 병에 중점을 둬야 답이 나온다.

‘혹시 이 마물화 병이 이능력과 관련된 것은 아닐까?’

마물화를 일으키는 원인이 이능력과 관련이 있다면 상황은 모두 설명할 수 있었다.

‘특별히 조절하지 않는 이상 내 힘은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니까.’

그렇기에 이능력에 대해 잊고 있었음에도 체이서가 그녀의 곁에서 평온을 취할 수 있었지 않았나.

에블린의 힘이 마물화를 일으키는 특별한 이능력을 억제하였다면? 

그래서 에블린 본인은 감염이 되지 않았고, 주위에 있던 감염자들에게 특이 현상이 발현된 것이라면? 

‘아냐, 이건 어디까지나 내 추측에 불과해. 혼자서 결론 지을 수 있는 일이 아니야.’

무언가 의견이 맞지 않는지 불쾌한 얼굴로 서로 언쟁을 나누는 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체이서의 얼굴이 사납게 일그러져 있었다.

‘뭐지?’

“단장님! 고정하세요. 제록 경도 하나의 가설을 제시했을 뿐이에요! 분명 나쁜 뜻으로 말한 게 아닐 겁니다.”

“저딴 말도 안 되는 가설을 듣고 나보고 가만히 있으라는 건 아니겠지?”

어째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고 있었다.

애초에 혼자서 고민할 시간에 전문가들의 의견을 구하는 것이 더 효율적이기에 에블린은 머리를 맞대고 있는 이들에게 다가갔다. 

“무슨 일인가요, 체이서?”

“아, 에블린. 미안해. 그대를 옆에 두고 너무 소란스러웠지.”

제일 먼저 기척을 느낀 체이서가 고개를 돌렸고, 모여 있는 이들의 시선이 에블린에게로 향했다.

약간의 경계가 서린 얼굴에 에블린이 어깨를 움츠리자 체이서가 그녀의 앞에 서 그들의 시선을 모두 차단해 버렸다.

“안색이 안 좋군. 방으로 올라가 조금 쉬는 게 어때?”

체이서의 걱정 가득한 말에 에블린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리고는 체이서를 제쳐 앞으로 나섰다. 제게 향하는 시선들이 부담스러웠지만, 에블린은 용기 내어 입을 열었다.

“사실 조언을 구하고 싶은 게 있어서요.”

제게 향하는 시선이 곱지 않아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에블린은 제가 한 추측을 모두에게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녀의 말이 끝나자 체이서를 포함한 모두에게서 침묵이 흘렀다.

“흠, 흠. 일단 오래간만에 뵙습니다, 부인.”

답답함을 참지 못한 하소가 그들 사이를 제치고 나와 에블린을 향해 웃으며 인사를 건네었다.

“안 그래도 조금 전에 그 이야기에 대해 나누고 있었습니다. 저희도 비슷한 추론을 내었는데 다만 전염병과 이능력이 연관이 있다고 하기에는 조금 석연치 않은 부분들이 있어서요. 그래서 의견이 조금 엇갈렸던지라…….”

안경을 콧잔등에 걸쳐 쓴 노인이 갑자기 하소의 말을 자르고선 튀어나왔다.

“마물화 감염자들이 공작 부인의 능력에만 반응한다는 것은 너무 이상하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습니다. 이래서야 꼭…….”

노인이 입을 열자 체이서의 표정에 살기가 스쳤다.

그의 말이 채 끝나지 않았음에도 에블린은 어쩐지 뒷말이 무엇일지 알 것 같았다.

“이 병을 퍼트린 이가 공작 부인 같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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