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5화
에블린은 목이 말라 잠에서 깼다.
‘목말라…….’
메마른 목을 움켜쥐고 서서히 눈을 뜨던 그녀는 가는 시야 너머로 주홍빛 불빛이 아른거리는 것을 보았다.
‘시간이…….’
어둡게 가라앉은 어둠 사이에 희미하게 푸른 빛이 어려 있었다. 동이 트는 시간에 가까워졌음에도 체이서는 아직도 잠자리에 들지 않았다.
‘저러다가 몸이라도 상하면 어쩌려고.’
에블린은 한숨을 속으로 삼키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바스락거리는 침구 소리에 체이서가 서류를 보다가 고개를 들어 올렸고, 막 잠에서 깨어난 에블린을 발견하였다.
“나 때문에 깼나?”
체이서가 다급히 랜턴의 불을 끄려는 것을 에블린이 그의 품에 폭 안기며 막아냈다.
“왜 이 시간까지 안 자고 있어요.”
이제 막 잠에서 깬지라 웅얼거림에 가까운 목소리에 체이서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껴안았다.
“연구 자료를 참고하여 현 상황의 진척 정도에 대해 보고를 해야 해. 가능성이 보여야 치료제 개발 또한 연장할 수 있을 테니까.”
“황실은 이상해요. 병이 잠잠해지더라도 연구 개발은 멈추지 않아야 하는 것 아닌가요?”
“온전히 흔적을 지워 버리고 싶은 거겠지. 부정 탈지도 모르니까.”
막강한 권력을 가진 황실에서 그런 미신을 믿는다는 것이 우스웠다.
에블린이 피식 비웃자 체이서가 따라 키득키득 웃었다.
“어서 빨리 치료제를 개발해야 에블린, 네 마음도 편해지지 않겠어?”
“그거야 그렇지만요…….”
에블린이 제리의 방에 매일 찾아가 깨어나기만을 두 손 모아 기다리는 것을 체이서 또한 알고 있다.
“당신이 더는 슬퍼하는 걸 보고 싶지 않아. 이 저택에서 좋은 기억만 만들어 주고 싶어. 그래야 괴로웠던 기억이 조금이라도 빨리 사그라들 테니까.”
이 모든 것들이 저를 위함이라는 말은 참으로도 달콤하고, 또 미안함이 들었다.
“……언제나 고마워요. 하지만 당신 몸도 좀 챙겨 가며 했으면 좋겠어요. 가주로서의 일에 그치지 않고 기사단 일과 치료제 연구 또한 함께 진행하는 데 아무리 튼튼한 당신이라도 분명 몸이 상할 거라고요.”
“그럴 때마다 네가 이렇게 옆에 있어 주면 되는 것 아닌가?”
체이서는 그리 말하며 에블린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
코끝을 스치는 은은한 여름의 향에 한껏 예민했던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네 옆에 있는 순간이 내게는 휴식 시간이야. 너무도 달아서 쉽게 놓을 수 없는 그런 시간. 그러니까 이 모든 게 너 때문이라며 죄책감을 갖지 마.”
체이서는 그리 말하며 그녀의 목과 쇄골에 몇 번이고 입을 맞추었다.
간지러운 감각에 에블린이 몸을 움츠리며 그의 가슴으로 파고들자 그녀의 머리 위에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내 새로운 인생의 목표는 너를 내 곁에 온전히 두는 거야. 그러니 이것은 나를 위한 일이지.”
조금의 죄책감조차 모두 거둬 버리려는 체이서의 모습은 에블린이 선택한 이 현실을 후회하지 않게 해 주고 있었다.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요.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해서 도울 테니.”
“아무렴.”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에블린이 못 살겠다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것 봐. 또 눈가에 피곤이 가득해요.”
에블린은 체이서의 손을 붙잡고서는 강제로 침대로 이끌었다.
“잠시만, 아직 봐야 할 서류가 남아 있어.”
“어차피 지금 자도 당신 두세 시간 정도밖에 못 자요. 밤을 새우는 게 얼마나 몸에 안 좋은데요. 체이서, 당신이 아무리 튼튼한 사람이라고 해도 잠을 이길 수는 없어요.”
에블린은 먼저 침대에 눕고선 어서 누우라는 듯 옆을 두드렸다.
“잠깐의 휴식이 더 높은 효율을 이끌어 낸다고 하죠. 자, 내가 재워 줄 테니 어서 이리 들어와요.”
“정말이지. 내 부인은 못 이기겠군.”
체이서는 못 이기는 척 그녀가 두드린 침대 위에 몸을 뉘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에블린이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등을 두드리는 규칙적인 손길은 어찌나 따스한지 체이서는 외면하고 있던 피곤이 제게 찾아옴을 느꼈다.
따스한 손길만큼이나 부드럽고 애정이 가득한 자장가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린애들이 듣는 자장가임을 알면서도 체이서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잘 자요.”
멀어지는 의식 너머로 만족스러운 에블린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도 같았다.
체이서는 근래 중 가장 달콤한 잠에 빠져들었다.
***
“어째서지…….”
세자르는 지하실에 널린 수조들을 원망스러운 눈으로 쳐다보며 이를 갈았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도 수조 안에 들어 있는 이들은 눈을 뜰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기약 없는 기다림에 그의 인내심은 한계에 달했다.
연구원들 또한 저 안에 있기에 조언을 구할 수도 없었다.
초조함의 끝에 그는 해서는 안 될 생각까지 떠올리고 말았다.
세자르의 눈에 여분의 각성제라며 쌓여 있는 유리병들이 보였다.
‘각성제를 추가하면 더 빠르게 깨어나지 않을까?’
그는 이 각성제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어떠한 효과를 내는지 자세히는 몰랐다.
오첼 필베르타는 실패에 대한 정보를 기록해 놓지 않았고, 각성제를 만드는 방법은 세자르가 이해할 수 없는 범위의 내용이었다.
수조 안에 있는 연구원들이 깨어나야 그들과 접선하여 제게도 적절한 각성제를 투여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세자르는 한쪽에 보관되어 있는 각성제의 반을 꺼내 와 수조에 차례차례 붓기 시작했다.
세자르는 빠른 결과물에 눈이 멀어 수조 안에 더 많은 양의 각성제를 투하했다.
그것이 그의 아버지인 오첼 필베르타가 지금껏 겪은 실패의 과정으로 되돌아가는 것인 줄도 모른 채.
***
뜨겁던 바람이 시원해지고, 어느새 주변을 둘러싼 공기가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에블린은 본격적인 겨울이 찾아오기 전에 오래간만에 외출하였다.
정기적으로 후원하는 보육원에 찾아가 오래간만에 아이들의 얼굴을 본 뒤 보육원의 보안 상태를 확인하였고, 집으로 돌아가기 전 잡화점에 들르기 위해 잠깐 상업지구에 들어섰다.
‘사람들이 바삐 움직이네.’
곧 겨울이 다가오니 월동을 준비하기 위해 바삐 움직이는 사람도 있겠지만 유희를 목적으로 외출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것만 보면 마물화 위험이 끝난 줄 알겠어.’
에블린은 지난번 테러 이후 거리로 외출을 나온 게 처음이나 다름없었기에 이러한 사람들의 움직임이 놀라울 뿐이었다.
‘치료제도 하루빨리 개발되면 모두가 마음 편히 외출할 수 있을 텐데.’
잡화점에 들른 에블린은 제리에게 새로 떠줄 목도리의 털실과 바늘을 구매하였다.
‘……혹시 모르니 넉넉히 구매할까?’
체이서에게 푹신한 털실 목도리는 어울리지 않겠지만 얇은 털실을 이용해서 루이사 가문의 문양을 넣는다면 나쁘지도 않을 것 같았다.
언제 다시 외출할지도 모른다며 합리화하며 에블린은 제 취미에 필요한 재료를 넉넉히 사고 다시 마차에 올랐다.
“볼일은 다 끝나셨나요?”
“응, 이제 저택으로 돌아가자.”
함께 따라 나온 마야가 마부에게 공작저로 돌아가자 말하고는 마차에 올라탔다.
“당분간은 외출하지 않으실 거라 하지 않으셨어요? 이왕 나온 김에 조금 더 거리를 둘러보지 그러셨어요.”
“아냐, 이 정도로 충분해.”
마차 창 너머로 보이는 사람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하였다.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일상을 되찾는 사람들을 보면 안심해야 하는데 왜 이리도 불안한 걸까.
오래간만의 외출이라고 피로함에 몸의 힘이 쭉 빠져서 그런 걸지도 모른다.
“피곤하니 돌아가서 푹 쉬자꾸나.”
“예, 조금 전 꽤 괜찮은 입욕제도 샀답니다. 돌아가시면 바로 목욕물을 준비해 드릴게요. 따스한 물에 푹 담그시면 피로도 금방 가실…….”
갑작스럽게 마차가 크게 덜컹거리자 마야는 말하던 것을 멈추고서는 재빨리 에블린을 감쌌다.
“마님, 괜찮으세요?”
“으응, 난 괜찮아.”
“도대체 말을 어떻게 몰았길래!”
마야가 화가 난 얼굴로 마부석과 연결된 창문을 열어젖혔다.
그리고 곧 창문 밖으로 보이는 광경에 입을 틀어막고 말았다.
“무슨 일이니……?”
에블린이 앉아 있는 곳에서는 작은 창 너머의 광경은 보이지 않았기에 물었는데 갑자기 마야가 에블린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그녀의 어깨를 꾹 눌렀다.
“보, 보지 마십시오.”
“뭐? 갑자기 그게 무슨…….”
그와 동시에 마차 밖에서 많은 비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꺄아악!”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당장 도망쳐요!”
심상치 않은 비명 소리에 에블린은 마야를 조심스럽게 떨쳐 내고서는 마차의 창문을 열어 밖을 보았다.
“…….”
거대한 독수리의 모습을 한 마물들이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날카로운 발톱으로 사람들을 잡아채며 공격하는 모습이 보였다.
제 일행을 마물에게 뺏긴 이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울부짖다가 다른 마물에게 잡아 먹혔고, 그러한 끔찍한 아비규환 속에서 사람들은 허둥지둥 도망가는 모습이 보였다.
“무엇 하는 건가! 어서 마차를 몰지 않고!”
마야의 외침에 마부가 떨리는 목소리로 답하였다.
“하, 하지만 움직이다가 표적이라도 된다면 어떻게 합니까!”
두려움에 찬 목소리에 에블린은 낮게 침음했다.
당장 마차를 돌리는 것이 마냥 좋은 답이 아니라는 것쯤은 밖의 상황을 지켜보면 알 수 있었다.
에블린은 마차의 창문을 닫고 외부의 시선을 차단하기 위해 커튼을 쳤다.
“일단 그대도 마차 안으로 들어오게.”
마부는 두려움에 떨리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바들바들 떨리는 몸으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주위의 마물들은 마부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고, 조심스러운 발걸음으로 마차에 오르려는 순간.
“으아아악!”
한 마물이 마부의 움직임을 발견하고선 낮게 하강하며 날아오기 시작했다.
마부는 혼비백산하며 계단을 오르다 넘어졌고, 마물은 금방이라도 마부를 채갈 것처럼 날카로운 부리를 세우며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