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4화
심상치 않은 목소리에 주변의 시선들이 모두 이곳으로 모이는 게 느껴졌다.
세자르는 제 본심을 숨기고서는 씨익 웃으며 물었다.
“당연히 자네도 포함인 거지?”
웃고 있었으나 초췌한 모습 때문인지 어쩐지 아련하게 들려오는 듯한 목소리였다.
“당연한 것 아닌가. 우리는 친구이지 않아.”
“……고맙네.”
“별말을 다 하는군. 마음 잘 추스르고, 괜찮아지면 그때 한번 보지.”
그리 말하며 체이서는 에블린의 어깨를 감싸고서는 함께 나섰다.
그런 두 사람의 뒷모습을 세자르는 후회와 스스로에 대한 경멸이 섞인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겁쟁이에 욕심도 많은 사람이구나.’
체이서는 조금 전 그의ㄷ 말에 숨은 의도를 읽은 듯 에블린을 품에 안은 채 다정한 모습으로 이곳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자네가 아니라 에블린이라고 묻고 싶었다는 걸 알고 있겠지.’
체이서 또한 바보가 아닌 이상 조금 전 모습에 세자르가 에블린에게 품은 감정을 알아보았으리라.
세자르는 쓸쓸한 얼굴로 조금 전 두 사람의 모습을 회상했다.
‘역시 그건 헛소문이었구나.’
얼마 전 소식통을 통해 루이사 공작 부인이 갑자기 친정으로 향했다는 말이 전해져 왔을 때 얼마나 기뻤던가.
이혼할지도 모른다는 허무맹랑한 이야기에 며칠을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밤을 새우며 혹시 제게도 기회가 오지 않을까 감히 헛된 기대를 품었었다.
‘아버지의 말이 맞다. 나는 참으로도 못난 사내야.’
아버지의 임종도 제대로 지키지 못하고, 못난 마음 하나 정리를 못 하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이러한 자책의 상황 속에서도 아버지의 죽음보다 사이가 좋아 보이는 체이서와 에블린의 모습에 더욱 슬퍼지는 것을 보면 틀린 말도 아니었다.
‘만약 내가 조금 이능력자였더라면……. 그렇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나약해진 그의 이성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 뒤로 장례식이 어떻게 끝이 났는지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았다.
세자르는 저택으로 돌아오자마자 다시 아버지의 비밀 연구실로 향했고, 그곳을 샅샅이 뒤져 연구일지를 찾아내었다.
현명하고 존경스러운 오첼 필베르타는 어째서 그러한 짓을 저질렀는가.
그 또한 이능력이 얻는 위상이 어느 정도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능력이 생김과 동시에 제가 얻을 수 있는 그 모든 것들이 탐이 나 죽음의 순간이 가까워짐에도 그 연구를 손에 놓지 못했을 것이다.
세자르는 살아생전 처음으로 아버지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원하는 것을 얻지 못했다면 포기하지 않고 어떻게든 만들어서라도 그것을 쟁취하고 싶었던 것이다!
이제부터는 오첼 필베르타의 뒤를 이어 세자르기 필베르타 공작이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실험실 또한 내가 물려받는 것 중 하나겠지.’
그 순간 세자르의 눈이 마치 광기에 휩싸인 사람처럼 반짝거리며 빛이 났다.
그는 어젯밤까지만 해도 끔찍하다 여긴 실험실을 바라보며 웃었다.
세자르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해서라도 또 가문의 영광을 위해서라도 나약한 감정을 버리고서 새로 태어나기로 다짐하였다.
이능력 각성제.
이것이 개발된다면 세자르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에게 희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밤을 새워 가며 정독한 연구 일지에는 지금껏 실험체를 어떻게 구해 왔는지, 함께 연구하던 이들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 상세히 적혀 있었다.
약물의 개발 자체는 10년이 걸렸고, 최근 실험체를 구하여 약물을 투약하는 것으로 약물의 효과를 검증하였다고 한다.
또한 적은 양의 투약으로 효과가 없자 눈 앞에 펼쳐진 것처럼 수조에 통으로 담가 효과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지켜보았다는 내용은 광기에 물든 그도 멈칫하게 할 정도로 끔찍했다.
오첼 필베르타는 실험체를 빈민가에서 주로 찾아다녔다.
그는 실종되어도 찾아줄 가족이 없는 이들, 혹은 당장 큰돈이 필요한 이에게 접근하여 간단한 실험에 참여해 달라 설득하여 이곳까지 데려왔다.
하지만 오첼 필베르타가 예상치 못한 것이 있었으니. 효과가 보이지 않아 약속한 돈을 쥐여 보내 내보낸 이들이 뒤늦게 마물화라는 부작용을 일으켜 수도에 모습을 비쳤다는 것이다.
그는 그 사실을 애석해했지만 그들의 희생 덕에 약 제조 자체에 성공하였기에 슬퍼하지 않았다.
이제 배합의 결과를 살펴 가장 이상적인 비율에 도달하여 실험체의 결과만 기다리고 있다고 하니 정말 완성이 코앞이었다.
입막음을 위해 지금까지 함께해 온 연구원들마저 저 수많은 수조 어딘가에 잠겨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경과를 지켜보기만 하면 각성제가 완성될 텐데 이것을 고발해야 할까?
‘아버지의 말씀이 옳다. 이건 대의를 위한 일이야.’
이능력을 갖지 못한 이들이 더는 차별받는 세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세자르는 그리 생각하며 연구실을 폐쇄하기로 한 마음을 온전히 접어 버렸다.
***
“요새 더스틴의 상태가 이상합니다.”
갑작스러운 블러드윈의 발언에 에블린과 체이서는 저녁을 먹다 말고 그를 바라보았다.
오래간만의 함께 식사하자더니 아무래도 꺼낼 본론이 있었나 보다.
“어떻게 이상한데요?”
에블린의 관심에 그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마물이었을 적의 기억을 되살렸더니 미친 사람처럼 굴더군요. 그러더니 어제부터 갑자기…….”
블러드윈은 못마땅한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다시 마물이 되었습니다.”
“네?”
“뭐?”
체이서도 처음 듣는 소식인지 그가 불쾌한 얼굴로 블러드윈을 바라보고 있었다.
블러드윈은 움찔 몸을 떨며 체이서에게 향했던 몸을 틀어 에블린을 바라보며 설명을 이어 갔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들쑥날쑥합니다. 갑자기 마물이 될 때도 있고, 몇 시간 뒤에는 인간이 되기도 하고, 잠들어 있다가 마물이 되어 있기도 하고.”
하루 동안 옆에서 지켜본 결과 더스틴의 몸에 또 새로운 변화가 찾아왔음을 확인한 후 이제야 보고를 올리는 거라며 그는 변명을 덧붙였다.
“곤란한데.”
블러드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체이서가 짜증이 섞인 얼굴로 낮게 중얼거렸다.
더스틴 루이사는 치료제 개발을 이어 가기 위한 마지막 수단이었다.
그가 처음으로 수도에 등장한 마물을 호기심에 살펴보다가 감염이 된 사실도, 마물에서 다시 인간의 모습으로 되돌아온 것도 극비에 부쳐지고 있었다.
진척 없는 치료제 개발에 희망을 줄 수 가능성을 보여 줄 중요한 이였는데 일이 꼬여 버렸다.
보고만 이루어지지 않았지, 에블린과 함께 그의 피도 채혈하여 연구 과정에 들어가 있었는데 앞으로의 채혈은 더 어려울지도 몰랐다.
“그럼 앞으로 찾아갈 때는 저도 동행해야겠네요.”
에블린은 마물의 모습을 한 더스틴이 그녀의 말을 따랐음을 알기에 꺼낸 말이었으나 체이서와 블러드윈이 동시에 못마땅함을 숨기지 않고 표출했다.
“꼭 그래야 하나?”
“맞아. 그냥 죽이지.”
“블러드윈, 치료제 개발이 있기 전까지 죽이는 건 안 된다고 하지 않았나.”
그에 블러드윈이 뚱한 얼굴로 와인만 벌컥 들이켰다.
당장 죽일 생각이 없다더니 더스틴을 하루빨리 치워 버리고 싶어 손이 근질근질한 모양이었다.
“멋대로 해도 좋다 할 때는 언제고.”
투덜거리는 말을 덧붙이던 대충 입가를 훔치고선 에블린에게 말했다.
“진짜로 동행할 필요는 없습니다. 괜히 못 볼 꼴만 보겠지.”
그렇게 말은 하지만 아무래도 자꾸 마물로 변하는 것이 거슬리기는 했던 모양이다.
“마물인 모습이 인간일 때보다 능력을 더 잡아먹고, 말도 안 들어서 날뛰기 일쑤고.”
이어지는 말에는 불평불만이 한가득해 보였다.
“……그러니 더욱 내가 동행하는 게 편치 않을까요?”
“내가 그의 머릿속을 어떻게 뒤엎었는지 알면 못 볼걸요. 제 부인과 딸을 직접 사지로 밀어 넣고 눈앞에서 죽는 걸 목격하도록 했습니다. 그 후로 모든 일에 실패한 패배자의 기억만 주입했단 말입니다. 얼마나 초췌한 모습인데요.”
사실보다 조금 과장이 되었을 뿐 온전히 틀린 이야기도 아니었다.
에블린이 무어라 덧붙이려는 찰나 블러드윈이 먼저 입을 열었다.
“괜히 동정심이 생길지도 모르니 오지 말라는 겁니다. 형수님은 우리랑 다르게 동정을 할 줄 아는 사람이니까.”
단호하기 짝이 없는 말에 에블린은 어깨를 으쓱였다.
“알았어요. 블러드윈에게 맡기기로 했으니 신경 쓰지 않을게요. 다만 조심해요. 다치지 않게.”
“아무렴요. 가끔 보면 형수님은 저 또한 루이사라는 걸 잊어버리는 것 같습니다. 쓸데없는 걱정을 하지 않도록 전진적인 모습을 보여 드려야겠습니다.”
걱정해 준 보람이 없게 하는 말에 에블린은 피식 웃었다.
“예, 기대하죠.”
그 말에 블러드윈 또한 장난스럽게 웃었고, 가만히 두 사람을 지켜보던 체이서가 입을 열었다.
“두 사람 꽤 친해졌군.”
“누가? 내가? 형수님이랑? 무슨 그런 싫은 소리를.”
“누가 할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요.”
“이런 모습을 보면 어릴 때랑 변한 건 없어 보이고.”
체이서는 옥신각신하는 두 사람을 보며 미소를 지었다.
“마물화는 지금껏 조금씩 진화하며 변종 과정을 일으켜 왔어. 마물화 감염 속도가 빨라지고 더욱 흉악해졌지. 더스틴 또한 새로운 변종 과정에 진입한 걸지도 몰라. 블러드윈, 혹시 모르니 너도 너무 가까이 접근하지는 말거라.”
미소에 이어진 진지한 조언에 블러드윈이 걱정하지 말라며 고개를 끄덕였다.
“치료제 개발을 접는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마물화에 감염된 사람이 나오지 않고 있는데 변종이 발생할까요?”
“만약의 가능성은 열어 두는 게 좋으니까.”
체이서는 추측일 뿐이라며 말을 갈무리했지만, 차분히 가라앉은 눈은 예사롭지 않게 빛나고 있었다.
조용히 이 상황을 묻으려는 황실의 바람에 힘입어 다시 수도의 거리에 사람들이 활발하게 돌아다니기 시작하였다.
그렇기에 더더욱 걱정이 클 것이다.
지난번과 같은 사고가 일어나면 또다시 수많은 피해자가 나올 테고, 황실은 무능함이라는 인식에서 벗어날 수 없을 테니까.
마찬가지로 그가 책임을 지고 있는 1기사단의 이능력자 기사단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황실의 바람대로 이대로 마물화 전염병이 사그라들어 온전히 종결되면 좋겠지만 이건 어려운 희망에 가까웠다.
‘원인이라도 알면 참 좋을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