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화
‘언제나 네가 최고가 되어야 한다. 누구도 우리 필베르타를 무시하지 못하도록 네가 모두의 우상이 되어야 해!’
세자르의 기억 속의 아버지는 언제나 그를 엄히 대하였고, 항상 현 상황에 만족하지 말라며 그를 다그치고는 하였다.
세자르가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었을 때 또한 마찬가지였다.
작은 이능력을 가지고 있던 세자르의 어머니는 안타깝게도 자식에게 그 힘을 물려주지 못하였다.
그 후로 아버지의 미움을 단단히 받던 어머니는 젊은 나이에 병으로 인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세자르, 너는 언제나 이 아비의 말을 잘 듣는 착한 아들이었지. 그러니 네 어미처럼 나를 실망시키면 안 된다.’
어머니의 장례식장에서 우는 세자르를 보며 필베르타 공작은 몇 번이고 그에게 나약한 모습을 보이지 말라며 크게 혼내기도 하였다.
그러한 충고들은 점점 필베르타 공작의 열등감을 먹고 자라났고, 그의 눈에는 제 자식인 세자르의 못마땅한 모습만이 담기기 시작하였다.
‘최고가 되란 말이 그리 어렵더냐! 루이사를 이길 수 있을 정도로 뛰어난 성적을 받아 오라 하지 않았어! 이능력도 없는 주제에 멍청하기까지 하면서 이 아비의 얼굴에 먹칠할 생각인 게냐!’
언젠가 지쳐 버린 세자르가 어떻게 하면 저를 인정해 줄 수 있냐 물었을 때.
‘이능력을 깨우쳐라. 빌어먹을 루이사 녀석들보다 강한 힘을 각성해서 그들의 위에 서! 그 모습을 내게 보여 준다면 나 또한 너를 훌륭하다 인정하마!’
돌아온 말도 안 되는 대답에 세자르는 아버지에게 인정받는 것을 포기하였다.
오첼 필베르타는 내외로 명망이 있는 고위 귀족이었으나 실제로는 루이사 공작가에 대한 열등감으로 똘똘 뭉쳐 있는 못난 사내였다.
좋은 말 한 번을 해 준 적이 없는 매정한 아비였지만 그래도 그 모든 행동이 세자르를, 또 필베르타 공작가를 위함이라 생각하였다.
그가 남긴 유언장을 보기 전까지는 말이다.
<나는 언제나 가문을 최고의 위치로 올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고, 그 결과가 머지않았으나 곧 생을 다할 것이다. 이 실험은 필베르타를 넘어서 인류의 미래를 발전시키는 큰 도약이 될 것이다. 지하실로 가 보거라. 그곳에 내가 너를 위한 선물을 준비해 놓았으니. 못난 아들에게 주는 마지막 안배니라.>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게 무슨 말이지?”
세자르는 몇 번이고 제 아버지가 남긴 유언장을 들여다보았으나 종이 위에 적힌 내용은 바뀌지 않았다.
유언장 아래에는 연구실의 위치와 열쇠라며 친절히 추신도 함께였다.
“미친 사람……!”
그는 유언장 봉투 속에 담겨 있던 열쇠를 챙기고서는 무작정 뛰기 시작했다.
모두가 잠든 새벽인지라 다행히도 갑작스러운 그의 기행을 보고서 놀라는 목격자는 존재하지 않았다.
세자르는 단숨에 지하로 내려가 언젠가 제 아버지가 쓰러져 있던 벽 앞에 섰다.
그는 숨을 헐떡이며 벽 위에 조심스럽게 손을 얹었다. 그 순간 벽이 조금씩 움직이더니 작은 구멍 하나를 만들어 냈다.
유언장에 들어 있던 열쇠를 끼워 넣자 꼭 맞아 들었고, 세자르는 긴장감에 찬 얼굴로 천천히 열쇠를 돌렸다.
곧 벽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고, 그에 맞춰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그의 귓가를 지배했다.
유언장에 적힌 말이 제발 거짓말이기를, 노망이 든 아버지의 상상이기를 바라며 그는 떨리는 마음으로 어느새 열린 벽 너머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긴 복도의 끝에 도착하였을 때, 어둠 속에서 깜빡이는 램프 너머 제 앞에 펼쳐진 광경을 보고 절망에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어두워 자세히 보이지는 않았으나 수상한 붉은색 액체가 담긴 커다란 수조가 지하실에 있었다.
세자르는 힘겹게 일어나 수조 앞으로 걸어갔다. 그는 불안감에 떨면서 안을 살피다가 이내 그 안에 사람이 있음에 경악하고 말았다.
그는 겁에 질린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미, 미쳤군. 이건 미치지 않고서야 불가능해!”
그가 내지른 커다란 목소리는 지하실 전체에 쩌렁쩌렁 울렸으나 수조 안에 있는 사람은 눈을 감은 채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제 아버지가 저지른 충격적인 일에 세자르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도대체 왜? 어째서?’
오첼 필베르타는 무슨 이익을 얻고자 이러한 끔찍한 짓을 저질렀는가.
그가 서 있는 주변은 널려 있는 종이 뭉치로 엉망이었다.
세자르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종이를 주워 들었다.
그 안에는 악필의 글씨가 빼곡히 이어졌다가 펜으로 거칠게 직직 그은 듯한 흔적이 남아 있었다.
그때 깜빡이던 램프의 빛이 선명하게 들어왔다.
환해진 지하실 너머로 지금까지 그가 본 것이 착각이 아니라는 듯 길게 늘어진 열다섯 개의 수조에는 붉은색 액체가 가득 차 있었다.
그와 함께 벽 아카데미에나 있는 거대한 칠판이 한쪽 벽에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그곳에는 이상한 수식들이 한가득 적혀 있었는데 그 끝에는…….
“이능력 각성제 투여 실험 현황…….”
반인륜적인 실험이 이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보여 주고 있었다.
이능력 각성제의 조제 방법과 일정 기간 실험 약 투여 시의 변화, 그로 인한 부작용으로 마물화의 발생 등.
수도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병의 원인이 필베르타 공작저였다는 사실은 걷잡을 수 없는 충격을 안겨다 주었다.
“어째서, 어째서 이런 짓을 하신 겁니까……!”
세자르는 차오르는 분노에 벽을 내리쳤다.
그는 제 아버지가 저지른 이런 끔찍한 일이 현실임을 믿고 싶지 않았다.
“고작 이능력이 무어라고!”
추악한 짓을 벌인 게 제 아비라는 사실에 세자르는 울부짖었다.
마물화로 피해를 본 사람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그렇기에 세자르는 아버지의 죄를 모른 척할 수 없었다.
마음 같아서는 곧장 황실로 달려가 이 실상을 알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하필이면 당장 내일이 오첼 필베르타의 장례식이었다.
‘먼 영지에서부터 찾아오는 손님들도 있으니……. 적어도 고발은 장례식이 끝난 후 진행해야겠어.’
세자르는 비틀거리며 방을 나섰다.
그러자 언제 램프의 불이 켜졌냐는 듯 힘없이 꺼졌고, 조용한 실험실에는 적막이 찾아왔다.
***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가을의 어느 날.
제국을 받치던 든든한 기둥인 오첼 필베르타 공작이 오랜 시간 앓던 지병으로 인하여 사망하였다.
현 황제는 제국의 큰 별이 졌다며 슬픔을 감추지 못했고, 황실의 교회에 필베르타 공작의 장례식을 진행하도록 명령하였다.
훌륭한 인성을 가지고 있던 그의 죽음을 기리기 위해 수많은 귀족의 추모 행렬이 이어졌다.
에블린 또한 안으로 들어서며 조용히 관 옆에서 조문객들에게 인사를 하는 세자르를 보았다.
‘아버지를 무서워하는 줄 알았는데 마냥 그렇지도 않았던 모양이구나.’
세자르는 변방에 돌아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아버지의 부고 소식에 급하게 수도로 돌아와야 했다.
평소 차분한 모습과 달리 낮게 가라앉은 눈과 붉게 묽든 눈시울, 우울함이 가득해 보이는 얼굴은 꼭 얼마 전의 제 모습을 보는 것도 같았다.
에블린과 체이서는 커다란 관 위에 국화를 올리고선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체이서, 와 주어서 고맙네.”
“당연히 와야지. 아버지의 일은 안타깝게 됐어. 좋은 곳에 가셨을 거야.”
“그리 말해 주니 고마워.”
세자르는 슬피 웃으며 두 사람을 반겨 주었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위태로운 모습이 에블린의 동정심을 자극했다.
“와 주어서 고맙습니다, 공작 부인.”
“잠은 좀 주무셨나요? 힘드신 건 알지만 이럴 때일수록 자기 자신을 잘 챙겨야 합니다.”
에블린의 말에 세자르의 얼굴이 더욱 슬픔에 잠겼다. 창백한 낯이 더욱 창백히 변하였다.
“발령지로 떠나기 전 아버지와 크게 다투었습니다. 그게 마지막 만남이 될 줄 알았더라면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조금 더 함께 시간을 보냈어야 했는데…….”
세자르의 얼굴에 떠오른 짙은 후회는 그가 감당할 수 없는 우울함이 넘치고 있었다.
에블린은 무어라 위로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무슨 말을 해도 잘 들리지 않겠지.’
소중한 가족의 죽음이란 그렇다.
지금까지 제가 했던 잘못과 후회되는 행동이 밀려와 자신의 이성을 마비시켜 세상에서 제일 어리석은 사람을 만들고는 한다.
‘혼자서 이겨 내려면 시간이 오래 걸리겠어. 이럴 때 곁에서 도움이 되어 줄 사람이 있다면 참 좋을 텐데.’
자신의 곁에 체이서가 있어 준 것처럼 누군가 그의 구원이 되어 준다면 조금 더 회복이 빠를지도 모른다.
하지만 세자르는 고요한 슬픔이 담긴 눈으로 에블린을 지그시 응시하고 있었다.
그 안에 서린 건 슬픔과 다른 감정, 미약하지만 그 어느 때보다 존재감이 뚜렷한 기대감이었다.
‘도대체 내가 뭐라고 아직도 이렇게…….’
에블린은 매정히 고개를 돌렸다.
아무리 생각해도 무어라 위로의 말을 더 얹는 것은 세자르를 더욱 괴롭게만 할 뿐이었다.
에블린은 세자르에게 구원이 될 수 없으니까.
순간의 동정으로 인해 베푼 따스한 배려는 결국 독배가 되어 세자르를 더더욱 괴로움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렇게 아버지의 임종도 지키지 못한 채 허무히 떠나보내다니. 나 같은 불효자도 없을 겁니다.”
슬픔의 찬 목소리가 가녀리게 떨리기 시작했다. 세자르가 제 가여운 처지를 봐 달라며 호소하자 에블린은 안타까워하면서도 쉽사리 입을 열 수가 없었다.
“자네가 왜 불효자인가. 평소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고 훌륭히 자라지 않았나. 그런 말로 스스로를 상처 입히지 말게.”
체이서가 세자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리며 그에게 위로의 말을 전했다.
“너를 걱정하는 모두를 위해서라도 하루빨리 마음을 털어 내기를 바라네.”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두 사람은 이만 장례식을 떠나려고 했다.
차분하게 붙잡는 세자르의 목소리만 아니었다면 말이다.
“그 걱정하는 모두에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