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2화
“블러드윈은 기억을 조작할 수 있으니까 그의 찬란했던 인생들을 머릿속에서 모두 지워 버릴 수도 있겠죠. 그의 유일한 희망인 제 존재도 말이에요.”
차분히 이어진 에블린의 말에 블러드윈의 입가에 서서히 미소가 피어났다.
“이런……. 형수님, 그 말을 먼저 해 주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제 몸의 이상을 눈치채지 못한 네 잘못이라 생각해야지.”
“형님의 말이 맞죠. 어떻게 그걸 지금까지 못 느끼고 있었을까.”
화가 식은 효과는 대단하였다.
“어째서 형님께서 형수님을 찾으러 간 것인가 싶었더니 내가 미처 파악하지 못한 이유가 함께였군요.”
절대 하지 않을 것 같은 사과와 함께 다시 경어를 쓰기 시작한 모습에 에블린이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블러드윈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 한 손을 등 뒤에 얹고서는 정중히 허리를 숙였다.
“그럼 나는 오늘부터 자리를 좀 비우겠습니다. 형수님의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도록 당분간 그자의 머리를 열심히 휘저어 놓을 테니까요.”
블러드윈은 당장이라도 별관에 달려갈 기세였지만 에블린은 아직 그를 보내 줄 수가 없었다.
“잠시만요. 물어볼 게 있어요. 데몬스 님은 어때요? 깨어나셨나요?”
“아, 깨어났지.”
금방이라도 뛰어나갈 것같이 자리에서 일어나 등을 졌던 그가 다시 자리에 풀썩 앉았다.
“깨어나셨다면 방에 계신가요?”
공작저에 돌아왔으니 제게 도움을 준 데몬스에게 고마움의 인사를 전하고, 사과해야 했다.
에블린이 몸을 일으키자 블러드윈은 난감한 얼굴로 그러지 말라며 고개를 저었다.
“홀로 방에서 회복에 집중하고 있습니다만, 당분간 얼굴을 보지 않는 게 좋을 겁니다.”
“왜요?”
“형님과 나는 시험을 거쳐서 정당히 들어왔기에 가문의 사정을 알고 있지만, 데몬스는 아니었다는 것 알고 있지요?”
에블린이 고개를 끄덕이자 블러드윈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 기회에 가문에 대해 알려 주었더니 많이 혼란스러워하는 기색입니다.”
이에 체이서 또한 말을 붙이며 동조하였다.
“더스틴은 데몬스를 억지로 데려오면서 그의 부모와 마을 사람들을 모조리 죽였어.”
충격적인 말에 에블린의 얼굴이 딱딱히 굳었다.
“……아무리 루이사라지만 그게 가능해요?”
“우물에 독을 풀었거든. 집단 의문사로 마무리됐지.”
“루이사에서 크게 이상한 건 아니죠. 나를 팔아 이곳으로 넘긴 고모네 가족도 여행 중 실종된 후 시신으로 발견되고 말았으니까요.”
블러드윈의 말에 에블린은 바이아르도 백작 부부를 떠올리고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또한 에블린을 넘기고 얼마 못 가 사망했다.
사정을 봐주지 않는 잔인함에 절로 속이 울렁거렸다.
“그러니 데몬스는 잠시 혼자 두자고. 지금껏 살던 제 인생을 부정당했으니 많이 혼란스러울 테니까.”
체이서의 말에 에블린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용서 못 받을 수도 있겠다.’
에블린은 더스틴의 친딸이었고, 데몬스에게 있어 그녀는 제 가족과 마을 사람들을 죽인 원수의 핏줄이니 원망스러울 것이다.
‘좋은 분이었는데.’
다시는 얼굴을 보고 편히 이야기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니 입맛이 썼다.
“데몬스는 내가 조금 더 신경 쓸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에블린의 표정이 좋지 않음에 체이서가 그녀를 달래 주기 시작했다.
“애초에 네가 그자의 자식으로 태어나고 싶어 태어난 것도 아니니 그리 풀 죽을 필요 없어.”
“그래도요.”
“잘못한 건 더스틴이지 네가 아니야. 그리고 지금껏 데몬스를 속여 온 우리 둘이겠지. 그러니 너는 어깨 당당히 펴고 다녀.”
잘못한 게 없음을 강조하며 체이서는 에블린의 입꼬리를 살짝 끌어 당겨 올렸다.
“머 하는 거에여.”
“제리를 보러 가야 하니 웃는 연습 좀 시켜 주려고.”
“저 잘 웃거등여.”
새는 발음이 뭐가 웃긴지 체이서는 가볍게 웃음을 터트렸다.
“귀엽군.”
“나 참.”
에블린은 복수라며 체이서가 제게 한 것처럼 그의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리고 그런 둘을 지켜보던 이가 있었으니.
신나게 나가려다가 붙잡힌 블러드윈이었다.
‘별꼴…….’
어차피 이렇게 될 거였으면서 참 멀리도 돌아왔다 싶더라.
다정다감한 두 사람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블러드윈은 짜게 식은 눈으로 조용히 방을 나서버렸다.
방을 나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그의 입가에 즐거운 미소가 떠올랐다.
기대감에 부푼 마음만큼 그의 걸음은 경쾌하기 짝이 없었으나 목적지에 도착했을 때 그의 미소는 거짓말처럼 사라져 있었다.
블러드윈이 감옥 앞에 서자 안에 있는 더스틴이 그에게 시선을 주었다.
“블러드윈? 네가 웬일이더냐.”
엉망이 된 얼굴, 잠긴 목소리, 폐인이 된 몰골은 예전의 더스틴의 모습은 상상도 하지 못할 만큼 망가져 있는 상태였다.
“……혹시 네 형수가 보낸 게냐?”
절망에 찬 얼굴 위로 희망이 떠오른다.
“형수가 보낸 거 맞지? 그래, 친부모를 외면할 자식이 어디 있겠느냐. 그 아이가 무슨 말을 전하라 했더냐? 가신들과 연락이 닿았다더냐? 나를 이곳에서 빼내 주겠다 하더냐?”
이기적이고 뻔뻔하기 짝이 없는 말에 결국 참다못한 블러드윈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주제 파악은 좀 하셔야 하지 않나?”
블러드윈은 과거를 떠올렸다.
고아가 된 그가 고모에 의해 팔려 루이사 시험장에 끌려왔을 때, 그리고 시험장에서 힘겹게 살아남아 공작저에 도착했을 때.
능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서 뼈를 깎는 노력을 해 왔을 때, 추잡한 질투로 성장에 한계를 주고 죽음의 지름길을 선물해 주었을 때.
사물을 응시하듯 냉정한 얼굴로 내려다보던 그 냉혹한 시선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이 또한 옛일이겠지.’
모든 추악하고도 고통스러운 과거는 이제 묻히고 고대하고 고대하던 순간이 도달했다.
어떻게 해야 그에게 절망을 안겨다 줄 수 있을까.
인생을 모조리 부정당하도록 모든 기억에 실패를 안겨 주어야 할까? 혹은 마물의 모습이었을 때의 기억을 떠올린다면?
인간의 존엄성을 잃고 무너져 가는 모습을 과연 저자는 어떻게 받아들일지 이 또한 궁금해졌다.
‘무얼 고민해? 다 해 보면 되는 거지.’
곧 더스틴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린 그가 짙은 미소를 지었다.
“아니지. 차라리 언젠가 당신 딸이 구해 주러 올 테니 희망을 잃지 말라고.”
물론 그러한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만.
블러드윈의 눈빛이 평소보다 낮게 가라앉았다.
“그러니 그 전까지는 이 아들과 놀아 봅시다, 아버지?”
곧 그의 행동을 이해한 더스틴의 눈에 절망 어린 빛이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머리가 헤집어지는 역겨움에 생각을 이어 가는 것이 불가능하였다.
그 후로 지하 감옥에 울려 퍼지는 건 끔찍한 고통과 슬픔으로 가득한 울부짖음이었다.
***
시간은 또 빠르게 흘러갔다.
체이서는 밀린 일을 처리하기 위해 다시 바쁜 일상으로 돌아갔고, 에블린 또한 제자리로 돌아갔다.
에블린은 돌아오자마자 저를 도와준 라리사를 공작저로 초대하였고, 그녀에게 제 사정을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전 바이아르도 백작이 현 공작님을 죽을 위기에 처하게 한 적이 있다는 거죠? 또 공작님께서는 일부러 에블린의 능력 각성도 숨겼고,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 에블린은 자신이 전 백작의 딸이었기 때문이라 생각해서 제게 도움을 요청한 거고요? 이혼하기 전에 마음 정리하고 싶어서요?”
물론 사실 그대로 알릴 수는 없었기에 거짓말을 섞었다.
사실과 마야에게 했던 거짓말을 조금 섞어 답해 주니 적절한 변명이 되었다.
“정말이지! 대화로 풀 생각은 하지 않고 너무 무모했어요!”
라리사는 다시는 그러지 말라며 에블린에게 몇 번이고 강조하다가 이제는 그러지 않겠다는 다짐을 받고서야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가 주었다.
그녀는 떠나기 전 에블린 덕에 고통 없는 삶을 살게 되었다며 고마움을 전했다.
‘이런 걸 보면 죽지 않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해.’
만약 그대로 죽었더라면 라리사가 저렇게 편안한 얼굴로 미소를 짓는 것도 보지 못했을 것이다.
라리사를 배웅한 뒤, 에블린은 익숙하게 제리가 머무는 방으로 향했다.
여전히 잠들어 있는 제 막냇동생을 에블린은 옆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빤히 내려다보았다.
‘이제 남은 건 치료제 개발뿐인데.’
다시 루이사의 저택으로 돌아온 뒤로 에블린의 관심사는 오로지 마물화의 치료제뿐이었다.
능력과의 연관성을 알아내기 위하여 에블린은 다시 피를 채혈하기 시작했다. 하소 또한 여러 명의 연구원과 함께 조금 더 규모를 키워서 관련된 연관성을 찾아보기 위해 밤낮을 아끼지 않고 시간을 기울이고 있었다.
하지만 한 달이 훌쩍 지났음에도 여전히 진전이 없는 치료제 개발에 절로 속이 탔다.
‘얼른 치료해 줘야 하는데.’
마음은 누구보다 급한데 피를 제공하는 것 외에 에블린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이대로 가다가는 치료제 개발이 무산될 수도 있다는데.’
성과는 없고, 연구 시간은 점점 길어져 가고, 와중에 마물화에 감염된 사람들의 등장이 점점 줄어들기 시작하자 집단감염이 이루어져 항체가 생긴 것이 아닌가 추측까지 등장하기 시작했다.
‘애초에 기사단이 개발하는 게 특이한 경우기도 했고.’
아무리 하소 경의 능력이 출중하다고 하다만 황실 내에서 이능력자들을 이런 곳에 이용하는 건 인적 낭비라며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는 모양이었다.
‘이대로 묻어 버리고 싶은 거겠지.’
환자도 서서히 줄어들겠다 무능한 황실로 남아 있기 싫으니 이대로 조용히 묻고 싶은 것 같다고 하던 체이서의 말이 딱 맞았다.
‘이러다가 정말로 치료제 개발이 멈추면 제리는 어떻게 되지?’
에블린은 한숨을 내쉬다가 퍼뜩 떠오른 제 생각을 지울 기세로 고개를 휙휙 저었다.
‘이런 우울한 생각은 하지 말자.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감정을 쏟는 건 시간 낭비야.’
밖은 벌써 해가 저물기 시작했고, 곧 체이서가 귀가할 시간이었다.
에블린은 체이서를 마중 나가기 위해 몸을 일으켰다.
그때, 다급한 노크 소리와 함께 마야가 갑작스러운 부고 소식을 전해 주러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