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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111)화 (111/159)

111화

애초에 계약서에도 적혀 있던 내용이니 문제가 있는 말은 아니었다.

‘감정적으로 서운할 수는 있겠지만.’

어째 이번에는 제가 죄를 지은 사람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무튼 화해해서 다행이야. 가출한 아내도 직접 찾으러 오고. 너를 많이 사랑하나 봐.”

“나도 많이 사랑하고 있어.”

“어머, 어머. 그런데 무슨 이혼을 하겠다고.”

로사는 목소리를 높였다가 아차 하며 체이서의 눈치를 보면서 입을 막았다.

“새로운 수도원도 네 남편이 지어 준 거니?”

“알고 있었어?”

“모를 리가 없지. 비록 접근은 불가했지만 지나가면서 본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데.”

‘찻집에서 조금 더 시간을 보냈더라면 새로운 수도원이 생긴 것도 알았겠네.’

조급한 제 성미를 탓하며 에블린은 그냥 웃어 버렸다.

“어째 다음번에는 이렇게 편히 인사 못 할 것 같다.”

로사는 맑게 웃으며 에블린을 꼭 끌어안았다.

“만약 다음에 다시 만나게 된다면 어디로 시집갔는지 정도는 알려 줘.”

에블린이 일부러 그에 대해 언급하지 않았음에도 재촉하지 않던 그녀가 마지막 순간에 그리 말하며 씨익 웃었다.

로사는 그렇게 인사를 남기고서 떠났다.

그녀가 떠나기 무섭게 체이서가 심각한 목소리로 물었다.

“이혼?”

“죽으러 간다고 할 수는 없잖아요.”

예상한 질문에 빠르게 답하기는 하였지만 좋은 선택은 아니었던 것 같다.

에블린이 어색히 눈을 피하며 말하자 체이서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죄인으로 만들 생각은 없었는데.’

어색해진 분위기를 풀 필요가 있었다.

“우리 결혼 전에 했던 계약서는 공작저로 돌아가면 찢어 버려요.” 

묵묵히 입을 닫고 있던 그가 곧바로 입을 열었다.

“계약서 중요시했잖아. 괜찮겠어?”

“그럼요.”

에블린은 눈에 힘을 주고는 대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저를 믿으라는 신뢰의 눈빛에 체이서는 굴러들어온 좋은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

“다행이군. 안 그래도 빌어먹을 그 종이 꼴 보기 싫었었는데. 잘됐어.”

‘그래도 서로 상호합의하에 한 계약서인데 꼴 보기 싫다니.’

보기보다 유치한 면이 있다.

에블린은 체이서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하면서 사이좋게 공방으로 향했고, 휠체어의 배송을 맡긴 뒤 꽃집에 들러 꽃다발을 산 후 수도원으로 올라갔다.

시간은 이미 오후에 접어들었기에 두 사람은 수도원에서 하룻밤 푹 쉬고 떠나기로 하였다.

에블린은 수도원에 돌아오자마자 라사냐와 동생들의 묘 앞에 꽃다발을 놓고는 그들의 죽음을 기렸다.

그 후 제리가 잠든 방으로 돌아와 아이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잠시 자리를 비웠던 체이서가 두 시간이 지나고서 돌아왔을 때도 에블린은 같은 자세로 제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침 일찍 떠나기로 했는데 방에서 쉬지 않고.”

“내일이면 제리를 보지 못하니까요. 밤새 많이 봐 두려고요.”

에블린은 자리에서 일어나 제리의 부드러운 뺨을 쓸며 다정히 웃었다.

“치료제를 개발해서 꼭 제리가 눈을 뜰 수 있게 할 거예요.”

체이서에게 삶의 이유를 알려 달라고 했던 것이 무색하게 살고자 마음을 먹으니 생각보다 목표는 가까이 있더라.

유일하게 남은 제리를 두 번 다시 잃지 않겠다는 다짐은 열정적이었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체이서가 머뭇거리더니 입을 열었다.

“제리도 함께 수도로 데려가려고 했는데. 그건 싫은가?”

“네?”

애틋하게 뺨을 매만지던 손길이 멈추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에블린이 침대를 붙들고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리의 존재도 알게 되었으니까 함께 수도로 떠나면 좋을 것 같아 데려가려고 했지. 여기보다 수도에서 보호하는 게 제리에게도 더 좋을 테니까. 혹시 싫은가?”

“싫기는요!”

에블린은 고개를 휙휙 내젓고는 체이서에게 다가가 그를 와락 끌어안았다.

“저는 당연히 안 될 줄 알았는데. 먼저 이렇게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남편으로서 부인의 가족을 신경 써 주는 건 당연한 것 아닌가.”

모범적인 대답에 에블린이 그의 입술에 가볍게 쪽 소리를 내며 입을 맞추었다.

에블린의 가족을 돌봐 주면서도 거들먹거리지 않는 모습에 그를 향한 신뢰가 조금씩 쌓이기 시작했다.

“이렇게 배려가 많은 남편을 내가 몰라봤네요.”

“이제라도 알아주었으니 충분해. 자, 앞으로도 계속 볼 수 있으니 오늘은 푹 쉬도록 해.”

그리 말하며 체이서는 멀뚱히 서 있는 에블린을 휙 안아 들었다.

“저, 저 무거워요!”

“네가?”

농담하지 말라는 듯한 눈길에 에블린의 얼굴이 당황함에 살짝 붉어졌다.

‘처음 수도원에 왔을 때는 죽을 각오를 하고 왔었는데.’

새로운 삶의 의지를 되찾고, 잃은 줄 알았던 가족도 함께 수도로 떠나게 된다니 사람의 앞일은 참 모를 일이다.

에블린의 눈이 체이서의 손가락에 자리한 가주의 반지로 향했다.

‘돌려 달라고 하면 화내겠지?’

만약 반지가 소원을 제대로 들어주지 않는다면 제리는 모든 가족을 잃고 홀로 외롭게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체이서는 사랑하는 연인을 잃어버리게 될 것이고.

‘미련을 버리자.’

앞으로 남은 인생을 행복하게 살고자 다짐하며 에블린은 눈길을 돌렸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체이서의 입가에도 슬며시 안도의 미소가 지어졌다.

수도원에서의 평화로운 하루도 그렇게 마무리가 되었다.

***

“무슨 배짱으로 다시 돌아온 거지?”

공작저로 돌아오자 마주한 것은 화가 나다 못해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모습을 한 블러드윈이었다.

너무도 멀쩡한 아니, 오히려 처음보다 더 극진한 사이가 되어서 돌아온 둘을 보며 블러드윈은 못마땅함을 숨기지 않았다.

응접실 소파에 앉아 한쪽 다리를 꼬고는 삐딱한 눈길로 바라보는 것에 에블린은 싱긋 웃었다.

“어쩜 어릴 때랑 변한 게 하나 없네요.”

“내가 지금 형님 눈치 살피며 너를 그대로 둘 것 같아? 너는 다름 아닌…….”

적대적인 얼굴로 파드득 가시를 세우는 모습에 에블린은 그의 말을 잘라 버렸다.

“블러드윈, 내가 그의 아이기는 하지만 그의 이상과 바람을 가장 무너트릴 수 있는 사람이라고는 생각 안 해 봤어요?”

“…….”

블러드윈은 자기 말이 도중에 끊겼다는 것에 불쾌한 얼굴을 하면서도 더 말해 보라며 고개를 까닥였다.

“나야말로 그가 원망스러워요.”

“그래서?”

“하지만 내가 가진 원망보다 당신과 체이서가 가진 증오가 더욱 크겠죠. 그래서 나는 두 사람이 어떤 잔인한 손속을 두더라도 신경 쓰지 않을게요. 친자식이라고 그를 보호할 생각도 없어요. 물로 그가 행복해지는 모습은 더더욱 보고 싶지 않고요.”

“그 말을 내가 어떻게 믿지?”

경계 서린 눈빛은 여전했지만 그래도 사나운 기세는 조금 전보다 사그라들어 있었다.

“그는 네 친부잖아.”

“낳아 주기만 했다고 모두 다 부모인 줄 아나요? 그대로 내 인생을 지옥 불에 던져 버린 이를 어떻게 내 부모라고 할 수 있겠어요? 내 부모는 수녀님뿐이에요.”

“수녀?”

“루이사 시험장에서 탈출하고 지금껏 나를 돌봐 주셨던 분이에요. 마물화로 인해서 비록 생을 마감하셨지만.”

“……고인의 명복을 빌게. 좋은 곳으로 가셨을 거야.”

순식간에 조심스러워진 목소리에 에블린은 고마움을 담아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맞아요, 정말 좋은 분이셨거든요. 나는 그분 덕에 이렇게 건강히 자라 왔으니까 분명 그럴 거예요.”

“건강한 건 조금 거리가 멀지 않나? 크게 앓는 모습을 내가 몇 번이나 봤는데.”

옆에서 들려오는 체이서의 지적에 에블린은 못 들은 척 블러드윈과의 대화를 이어 갔다.

“더스틴은 나를 이용해서 루이사에 제 핏줄을 이어 가고 싶어 했어요. 정확히 말하자면 나를 허수아비 공작으로 세워 다음 대 공작의 치하에도 권력을 유지하고 싶었던 거겠죠.”

“하긴, 보통은 공작위에서 물러나게 되면 영지로 내려가 갇혀 지내야 하니까. 지금이야 병에 걸렸다는 이유로 수도에서 돌보고 있지만, 완치되면 영지로 내려가야 할 거야. 욕망이 많은 그자가 참을 수 없는 일이었겠지.”

“하지만 난 그자의 뜻대로 할 생각이 없어요.”

“네가 형님과의 아이를 낳고 그 아이가 루이사의 후계자가 된다면 결국 그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나?

이 말에 에블린은 입을 꾹 다물었다.

‘아이라…….’

서로 부부 관계를 맺어 본 적도 없는데 너무 먼 이야기 아닐까?

에블린이 무어라 답하는 게 좋을지 고민에 빠지자 이에 대한 답은 옆에서 들려왔다.

“더스틴의 손자가 아닌 나와 에블린의 아이야.”

“형님, 아무리 형님이 억지 부린다고 한들 소용없어. 두 사람의 아이가 더스틴의 손자라는 건 변치 않으니까!”

이대로 두다가는 분위기가 조금 더 격해질 판이었다.

“아직 생기지도 않은 아이를 두고서 이리 이야기하는 건 조금 그렇지 않나요?”

“네가 돌아온 걸 알면 더스틴이 또 기고만장하겠지. 그리고 희망에 차 있을 거야. 내가 그 꼴을 계속 보고 있어야 하나? 지금도 가슴 속에 열불이 나는데!”

블러드윈의 증오는 상상 이상으로 거대했다. 가만히 그의 분노를 받던 에블린의 머릿속에 작은 의문 하나가 생겨났다.

“……그럼 기고만장할 수 없게 하면 되지 않아요?”

“어떻게 하겠다는 건데?”

“그거야 블러드윈의 능력으로 그의 머릿속에 저를 지워 버린다든가?”

“그가 우리에게 저주를 걸었다는 말도 아직 못 들었나? 가능했다면 진작 했어.”

블러드윈은 기가 막히다는 얼굴로 양껏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곧 이어진 에블린의 말에 당황하고 말았으니.

“아, 그 저주 제가 잠시 봉인해 두었거든요.”

처음 듣는 소식에 그가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하려는 건 좋지 못한 선택이라 생각하는데.”

차분한 경고에 에블린은 아무렴 당연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저주를 완전히 지우고 싶었지만 그건 어렵더라고요. 그래도 블러드윈이 능력을 마음껏 사용하는 데 무리 없을 거예요.”

“……그럼 내 힘을 한계 없이 사용해도 문제없다는 소리야?”

“당분간은? 하지만 그자가 죽는다면 평생 가능하겠죠.”

블러드윈의 눈가에 새로운 빛이 어렸다. 조금 전의 발언이 하늘 높이 치솟을 것만 같던 분노가 사그라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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