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화
에블린의 머리를 쓸던 체이서의 손이 어느새 내려가 천천히 그녀의 목덜미를 매만지기 시작했다.
서로의 얼굴이 가까워짐에도 에블린은 멍한 눈빛으로 그를 바라볼 뿐, 뿌리치지 않았다.
“그리고 가여운 마음이 지워지고 사랑이 되었을 때 과거의 끔찍한 기억을 태우고, 나와 함께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 가 줘.”
다정한 목소리로 흘러나오는 체이서의 말은 과연 진심일까, 거짓일까.
누군가의 마음을 끊임없이 의심해야 하는 것은 참으로도 가여운 일이었다.
그의 마음을 받아 주는 것을 선택한다면 평생을 걸쳐 이와 같은 고통 속에서 살아야 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선택에 관한 결과는 남을 탓하지 못하고 온전히 에블린 스스로가 책임져야 할 것이다.
그럼에도 에블린은 망설이지 않고 서서히 눈을 감았다.
맞닿은 입술은 예전과 달리 까슬까슬하고 거칠었다.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부딪힌 입술 사이로 흩어져 나오는 옅은 신음과 맞닿은 가슴에서 들려오는 거센 심장의 고동 소리가 두 사람이 서로를 얼마나 갈망하고 있는지 보여 주고 있었다.
한참을 서로를 탐하던 두 사람은 에블린이 벅찬 숨을 내쉬면서 잠시나마 떨어졌다.
에블린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체이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리고는 그가 원했던 말을 내뱉었다.
“가여워라.”
“응.”
“가여운 당신을 내가 거두는 거예요.”
그러자 만족스러운 웃음이 그의 입가에서 흘러나왔다.
“좋아, 이제 무르는 건 없어. 평생을 책임져야 해. 이혼은 절대 없어.”
뒤늦은 조건에 에블린이 짓궂은 얼굴로 물었다.
“이제 와 취소할 수는 없겠죠?”
“당연한 소리를.”
미간을 찌푸린 체이서가 그대로 에블린의 고개를 붙들고선 다시 입술을 탐하기 시작했다.
에블린 또한 미소를 삼키고선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그의 숨결을 조금이라도 더 느끼기 위해서 머릿속의 복잡한 생각을 비웠다.
‘수녀님, 이 선택이 후회되더라도 이제는 도망가지 않고 받아들일게요.’
꼬일 대로 꼬이다 겨우 이어진 이 마음이 어떻게 끝날지는 도무지 예상이 가지 않았다.
다만, 이 결정을 후회하지 않을 것 같다는 막연한 생각만이 가득하였다.
“집중해야지.”
다른 생각을 한 것을 눈치챈 체이서가 에블린의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읏.”
곧이어 입술을 타고 내려와 목과 쇄골에 몇 번이고 입을 맞추던 그가 억울하다는 듯 으르렁거렸다.
“제길, 왜 하필 공작저가 아닌 거지?”
체이서는 몇 번이고 쇄골에 입술을 묻더니 곧 고개를 떼고선 그대로 에블린을 껴안았다.
“후회하지 않도록 행복하게 해 줄게. 그러니 나를 버리지 마.”
에블린은 굳이 입을 여는 대신 그의 입술을 훔치는 것으로 답을 전했다.
***
다음 날 오전, 에블린은 체이서의 품속에서 눈을 떴다.
‘오래간만이네.’
이런 평화로운 아침이 얼마 만인지 반갑기 그지없었다.
“일어났나?”
평소보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보아하니 체이서도 조금 전에 눈을 뜬 모양이다.
두 사람은 바로 떠날 준비를 했다.
에블린은 시험장을 벗어나다 말고 뒤를 돌아보았다.
체이서와 서로의 마음이 통한 뒤 그녀를 괴롭혔던 악몽 같은 목소리는 사라졌다.
‘다시는 올 일이 없으면 좋을 텐데.’
과연 이 시험장은 언제까지 존재해야 하는 걸까. 지긋지긋한 루이사의 후계자 선정 문제를 끝내서는 안 되는 걸까?
적어도 죄 없는 아이들이 이곳에서 죽어 나가는 일이 더 없기를 그저 바라는 것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는 걸까.
에블린이 복잡 미묘한 시선으로 시험장을 보고 있으니 체이서가 그녀의 어깨를 붙들고서는 말의 고삐를 쥐여 준 채 멀리 떨어트렸다.
“잠시 멀리 떨어져 있어.”
“네?”
그러더니 그는 다시 루이사의 시험장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아무런 생각 없이 가만히 지켜보던 에블린은 곧 커다랗게 치솟는 불길에 기겁하고 말았다.
“체, 체이서!”
체이서의 손에서 피어난 커다란 불꽃이 루이사의 시험장을 잡아먹기 시작했다.
어찌나 화력이 센지 이러다가는 숲까지 번지지 않을까 걱정될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위험하니 다가오지 말고 지켜보고 있어.”
‘설마 어제 내가 했던 말 때문에 그런 건가?’
이 시험장이 멀쩡한 것이 싫다고 칭얼거리던 어젯밤이 떠오르니 꼭 권력자에게 일러바친 사람이 된 것 같아 민망하기까지 했다.
건물에 불을 붙인 그는 볼일이 끝났다는 듯 다시 에블린의 곁으로 돌아왔다.
“전소되면 불은 자연스럽게 꺼질 거야.”
숲으로 번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며 덧붙이는 말에 에블린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넘실거리는 불꽃은 건물 전체를 잡아먹으며 계속해서 몸집을 키워 나갔다.
빠른 속도로 불타오르는 것을 보니 곧 무너질 것 같았다.
“저러면 지하는 어떻게 돼요?”
“건물이 사라지면 그대로 잊히는 거지. 혹시 누군가가 발견한다고 해도 무슨 용도인지는 알아차리지 못할 거야. 시험을 보는 기간이 아니면 지하 미로는 텅 비워 두니까.”
불을 머금고 활활 타오르는 목조 주택은 곧 천천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래도 되는 거예요?”
뒤늦은 질문에 서린 걱정을 알아차린 체이서가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괜찮아.”
“하지만 가신들이…….”
“슬슬 이 빌어먹을 제도를 끝내야 하지 않겠어? 그러고 싶었잖아?”
초조한 에블린과 달리 체이서의 얼굴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아, 모르겠다. 일단 저질렀으니 우리 천천히 방법을 생각해 봐요.”
걱정만 하고 있기에는 속이 뻥 뚫린 것처럼 후련한 마음을 즐기고 싶었다.
“에블린.”
그때, 체이서가 갑자기 에블린을 부르더니 지난 밤처럼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리고는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작은 보석함이었는데 열린 상자 속에는 익숙한 반지가 놓여 있었다.
에블린이 집을 떠나기 전 두고 갔던 결혼반지였다.
“비록 시작은 조금 어긋나서 오랜 시간 헤맸을지 몰라도 지금 내 마음은 진심이야.”
갑작스러운 청혼에 에블린은 커다란 눈을 깜빡였다. 놀라움이 가득한 그 모습과 달리 체이서는 긴장한 얼굴로 그녀의 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은 이미 부부 사이였지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였으니 새로운 마음으로 한 청혼이었다.
“평생 행복하게 해 줄게. 그러니 나와 결혼해 주지 않겠어?”
머릿속으로 수많은 장면이 지나갔다.
두려움이 가득했던 첫 만남부터 시작하여 서서히 그에게 마음을 열고, 진실을 알고 배신감에 슬퍼하던 모든 순간이 마치 꿈처럼 흩어진다. 무어라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황홀한 기분이었다.
“저는 이미 유부녀인걸요?”
눈을 도로록 굴리다 구체적인 대답을 회피하는 것에 체이서는 올라오는 조급함을 숨기고서는 반지를 꺼내 그녀의 약지에 끼웠다.
그리고는 그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받아 줘서 고마워.”
“어머, 저는 청혼을 허락한 적이 없어요.”
“남편이 나라는 걸 인정한 건 아니고?”
에블린은 부정하려다가 긴장감에 가득 찬 얼굴을 보며 결국 피식 웃고 말았다.
“그래요, 제 이름은 에블린 루이사. 체이서 루이사의 아내죠. 앞으로도 변치 않을 거고요.”
그리 말하며 에블린은 체이서의 뺨을 감싸고는 체이서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시험장을 불태운 건 청혼 선물인 건가요?”
“마음에 드나?”
그 말과 함께 에블린은 이번에는 그의 콧잔등에 입을 맞추어 주었다.
“최고의 청혼 선물이네요.”
에블린은 근래 보기 힘들었던 밝은 얼굴로 체이서를 일으켰다.
그리고는 그의 품에 살짝 기대어 붉은 불길을 바라보며 웃었다.
“풍경이 좋네요.”
거대한 불길에 잡아먹힌 저택에 둘러싸인 을씨년스러운 숲을 보면서 해맑게 웃는 모습에 체이서도 동의한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쉬운 거였으면 진작에 하는 거였는데.”
“청혼 선물로 아꼈다고 생각해 줘요.”
“아무렴.”
잠시 후, 건물이 허망하게 무너져 내렸고 이내 검은 재가 되어 존재가 사라지고 말았으니.
긴 시간을 걸쳐 온 루이사의 악습이 폐지되는 순간이었다.
***
수도원으로 돌아오는 길은 마차를 타고 이동하였다.
하루하고도 반나절이나 지속된 마차 생활에 피곤이 잔뜩 쌓인 두 사람은 서로의 어깨에 기대어 잠들었다가 수도원 근처의 마을에 도착하였을 때가 돼서야 깨었다.
“잠시 공방에 들렀다 가고 싶은데 마을에 들렀다 올라가도 괜찮을까요?”
“왜?”
“수녀님의 묘지 앞에 휠체어를 놓아드리고 싶어요. 제작을 맡겼던 게 있어요. 하늘에서라도 자유롭게 돌아다니시면 좋을 것 같아서요.”
“지금 당장 찾아갈까?”
손수 옮기려는 모습에 에블린은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다.
“공방에 배달해 달라고 하면 돼요. 같이 가 주기만 해도 충분하다고요.”
“그러지.”
흔쾌한 대답과 함께 체이서가 당당히 손을 내밀었다.
“손을 잡고 돌아다니자고요?”
“부부인데 이상한 것 없지 않나?”
‘너무 눈에 띌 것 같은데.’
에블린이 잠깐 고민에 잠긴 사이 그의 눈썹이 서서히 비뚤어지기 시작했다.
이러다가는 화해한 지 사흘도 안 돼서 다시 싸우게 될 것 같아 에블린은 내민 그의 손을 덥석 잡았다.
곧 두 사람이 함께 마을로 들어서자 활발히 움직이던 마을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두 사람에게 쏠렸다.
“에블린!”
그리고 사람들 사이에 있던 로사가 놀란 얼굴로 목소리를 높이며 단번에 그녀 앞까지 뛰어왔다.
“어, 어머. 네 남편분이시니?”
“아, 응.”
그러고 보니 로사는 체이서를 처음 보는 상황이었다.
‘소개해야 하나?’
하지만 여기서 루이사임을 밝히면 마을은 소란스러워질 테고, 마을의 소식이 흘러나와 수도에 다다르면 에블린의 신분에 대해 또 어떤 소문이 퍼질지 몰랐다.
에블린이 망설이고 있는 걸 눈치챈 로사가 활짝 웃으며 먼저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에블린의 친구 로사라고 해요.”
“체이서입니다.”
로사의 인사에 체이서도 선뜻 제 소개하며 그녀와 악수까지 하였다.
로사는 에블린과 체이서를 번갈아 보더니 입가를 가리며 웃었다.
그리고는 에블린의 귓가에 속삭였다.
“두 사람 화해한 것 같은데. 맞아?”
“응, 다행히도.”
“아유, 다행이다. 이혼할 거라는 말만 남겨 놓고 그대로 나가 버려서 얼마나 놀랐었는데.”
이혼이라는 단어에 체이서의 시선이 꽂혔다.
에블린은 뺨에 닿는 시선이 따가웠지만, 절대로 고개를 돌아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