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9화
조용한 건물 안, 마주 보는 두 사람 사이로 고요한 숨소리만이 오갔다.
쉽사리 말을 잇지 못한 채 입을 벙긋거리는 체이서의 모습에 에블린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과연 당신은 어떠한 답을 할까.’
장소만 달랐을 뿐, 에블린이 처음으로 죽음을 결심했을 때와 똑같은 상황이었다.
‘살아갈 이유라…….’
어차피 제리의 존재를 알게 된 이상 가주의 반지에 목숨을 거는 위험한 짓은 쉽게 해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마음이 뒤숭숭하며 확실한 결론을 내릴 자신이 없었다.
반쯤 꺾인 목표는 이미 엉망이 되어 버렸고, 그녀에게는 살아가기 위한 새롭고 강력한 이유가 필요했다.
기시감이 느껴질 만큼 비슷한 질문에 굳게 다물린 체이서의 입이 열렸다.
“내 삶의 목표는 더스틴과 루이사에 대한 복수였어. 하지만 이제 하등 쓸모가 없게 되었지. 더스틴에 대한 처우는 블러드윈에게 전적으로 위임할 테니까.”
“…….”
“루이사야 이미 손에 얻었고, 내 어린 시절을 고통스럽게 한 이들에게 복수하는 것도 얼마 남지 않았지.”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그럼 목표를 다 이룬 나는 죽어야 할까?”
“…….”
“나는 내 인생의 목표를 달성했다고 그대로 삶을 끝내고 싶지 않아. 또 다른 새로운 목표를 찾으려 들거나 혹은 목표를 달성한 후 내게 오는 평화를 즐기려 하겠지.”
냉철한 목소리가 에블린의 머릿속을 파고들었다. 무어라 반박하고 싶었지만, 그녀는 입을 달싹이기만 할 뿐 어떠한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에블린, 지금 네게 필요한 건 다른 사람의 조언이 아니야.”
체이서는 에블린의 손을 붙잡은 채 천천히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았다.
“나는 네가 죽지 않았으면 좋겠고, 계속해서 내 곁에 있었으면 좋겠어.”
올려다보는 눈빛은 지금껏 마주쳤던 어느 순간보다 진중하여 쉽사리 피할 수가 없었다.
“나는 네가 살기를 바라. 너는?”
“…….”
“너는 어떻게 하고 싶지?”
“…….”
“여전히 죽고 싶나?”
에블린은 몇 번이고 항의하고 싶은 얼굴로 입을 달싹였지만 결국 마지막 질문에 고개를 푹 숙였다.
“에블린, 난 네가 내 말 때문이 아니라 스스로 살고자 하는 의지를 얻었으면 좋겠어.”
어렴풋이 알고 있던 사실을 조곤조곤 짚어 주는 목소리는 달콤했지만 마치 회초리와도 같았다.
‘내 목숨은 내 것이지.’
그리 생각하면서도 삶의 이유를 타인에게 찾으려고 하였다니.
이렇게 타인에게 삶의 이유를 묻는 것은 큰 의미가 없었다.
이 삶은 에블린의 것이었으니까.
누가 뭐라 해도 에블린이 스스로 의지를 다지고 결정을 내리지 않는 한 변하는 것 없이 언제나 제자리에 있을 뿐이었다.
“네 인생에 대해서 누구도 너보다 옳은 답을 내줄 사람은 없어.”
“…….”
“만약 네 인생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나처럼 너를 이용하고자 하는 나쁜 사람일 수도 있고…….”
체이서는 에블린의 손을 제 곁으로 끌어당겨 손등 위에 가볍게 입을 맞추었다.
“혹은 나처럼 너를 너무도 원해서 곁에 두고 싶은 사람일 거야.”
멍청한 질문에 돌아온 건 생각지도 못한 현명한 답이었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던 어두운 안개가 걷힌 것만 같았다.
“누가 뭐라고 해도 네가 살고 싶지 않다면 다 의미가 없는 거잖아.”
조곤조곤 이어지는 목소리에는 분명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나는 도대체 무슨 대답을 기대했던 걸까.’
체이서가 살아 있기를 원한다면 그의 말에 따라 살아갈 생각이었나?
그리고 또 무언가 뜻대로 풀리지 않아 잘못되면 체이서의 탓을 하면서?
제 선택에 대한 책임을 또다시 체이서에게 떠넘기려고 했다니.
한심한 제 모습을 깨닫고 나니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고 이렇게 그녀의 의견을 존중해 주는 그에게 고마움이 몰려왔다.
“……내 말을 믿어요?”
“믿어.”
“이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믿는다고요? 그냥 죽고 싶어서 갖가지 이유를 다 가져다 붙인다 생각하지 않고?”
“목숨을 포기한다는 건 큰 용기가 필요하지. 난 네가 쓸데없이 죽으려고 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아. 물론 이런 이유일 줄은 꿈에도 상상 못 했지만.”
에블린이 용기를 낸 것은 마음속 깊은 곳에 크게 자리하고 있는 죄책감 때문이었다.
“이런, 내 말이 믿기지 않는 모양이야. 그렇다면 믿는 걸 보여 주면 되겠지.”
“잠깐, 뭐 하는 거예요?”
눈 깜짝할 사이에 에블린의 손가락에 있던 반지가 쉽게 빠져 버렸다.
“네 소원이 뭐지?”
“왜, 왜 갑자기 그런 걸 물어요?”
“소원이 이루어지는지 안 이루어지는지 함께 확인해 보면 되지 않을까 싶어서.”
“무슨 소리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 말이 뭐가 우스운지 체이서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굳이 대가로 바칠 목숨이 네 것일 필요는 없지 않나.”
“……잠깐, 당신 설마.”
“내 목숨이어도 네 소원을 들어주기에는 충분하겠지.”
대화는 계속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체이서!”
에블린이 화들짝 놀라 소리쳤지만, 체이서는 제 검지에 반지를 끼고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처럼 빙긋 웃었다.
“왜? 어차피 시간을 돌리면 모두 다 제자리에 있을 텐데.”
“…….”
“제물로 바치는 이는 제자리로 돌아갈 수 없나 보군.”
에블린이 일부러 이야기하지 않은 부분을 홀로 추론해 낸 그는 그녀의 반응을 보며 확신을 얻었다.
에블린이 불안한 얼굴로 입술을 깨물자 그가 엄지로 조심스럽게 그녀의 아랫입술을 눌렀다.
“만약 네가 모두의 시간을 되돌리고 나면 너는 어디로 가지?”
“……그런 것까지는 몰라요.”
“아마도 존재가 지워지겠지. 그러니 내가 대신 죽겠다 하니 이러한 반응을 보이는 것 아닌가?”
체이서는 자신이 원하는 답을 듣기 전까지는 절대로 물러나지 않을 기세로 에블린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결국 에블린은 반지에 대해 제가 아는 모든 정보를 털어놓았다.
“……그래요, 당신 말이 맞아요.”
에블린은 크게 심호흡하고 숨을 찬찬히 내뱉었다.
“과거의 내가 사라진다면 수도원의 가족들도 루이사도 모두 별 탈 없이 흘러갈 테니 차라리 내가 없는 게 낫다고 생각했어요. 솔직히 그렇지 않나요?”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진 얼굴 위에 서린 것은 괜한 말을 내뱉었다는 후회였다.
보여 주고 싶지 않은 밑바닥을 보인 것만 같아 기분은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하지만 체이서는 그런 에블린을 보며 더욱 안타까움을 숨기지 못하였다.
“내가 말했잖아. 나는 너를 사랑한다고. 네가 없는데 왜 내 인생이 문제없이 흘러갈 거라고 생각하는 거지?”
“…….”
“에블린, 내 마음을 강요할 수는 없지만, 자꾸 외면하려고 하지 마.”
그는 슬픈 얼굴을 감추며 그녀의 손바닥에 뺨을 묻고는 속삭였다.
“난 네가 없이 행복하게 살아갈 자신이 없어.”
“…….”
“그러니 차라리 내 목숨을 바치도록 하지.”
“당신은 루이사의 후계자예요. 인생을 바쳐서 이루려던 목표가 있잖아요. 그 모든 걸 포기하고 고작 나 때문에, 내 소원 때문에 목숨을 바치겠다는 건가요?”
필사적이기까지 한 설득에 체이서는 고민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고작이라니. 내가 사랑하는 너의 소원이지 않나.”
“체이서!”
에블린이 정신 차리라는 듯 목소리를 높였으나 그는 꿈쩍도 하지 않고 그대로 웃을 뿐이었다.
금방이라도 제 목숨을 바칠 것만 같은 기세에 오히려 에블린이 초조해졌다.
“하지만 너는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지?”
“…….”
“나를 사랑할 테니까.”
“내가 분명 아니라고…….”
“정말로 나를 사랑하지 않아?”
이어진 물음에 에블린은 쉽사리 말할 수가 없었다.
지난밤처럼 아니라고 확실하게 말해야 하는데 도무지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흔들리는 두 눈동자에 비친 체이서의 얼굴에는 미소가 서려 있었다.
“네가 시간을 돌려 달라 소원을 빌면 나는 되돌아간 시간 속에서 소원을 빌 거야. 다시 너를 되돌려 달라고.”
“…….”
“그런 건 보고 싶지 않지? 너는 내가 죽기를 원치 않을 테니까.”
일자로 굳어 있던 그의 입가가 부드러운 호선을 그렸다.
지금까지와 달리 여유가 느껴지는 웃음이었다.
“나를 사랑하잖아.”
체이서는 제 뺨과 맞닿은 손바닥에 몇 번이고 입술을 누르고서는 웃었다.
“죽으러 가는 순간에도 내게 걸린 저주를 풀어 주려고 했던 것을 봐. 이게 사랑이 아니면 뭐야?”
자신이 있는 것을 넘어 오만하기까지 해 보이는 미소였다.
결국 에블린의 표정이 무너지고 말았다. 건드리면 톡 터질 것 같은 눈물방울이 눈가에 가득 맺히기 시작했다.
“그래서 에블린, 너의 답은 뭐지?”
분명 조금 전과 다름없는 여유로운 얼굴이었으나 마주한 그의 눈빛에는 긴장이 가득하였다.
체이서는 애타는 마음을 숨기고 에블린의 입이 열리기를 기다렸다.
“……나는 살고 싶어요.”
언젠가 체이서가 해 주었던 말.
행복하게 살아서 그들의 곁으로 돌아가라 했던 말은 그의 입에서 나왔음에도 에블린의 신념이 되었고, 그녀의 소망이 되었다.
“남은 내 소중한 사람을 지키고, 아끼고, 또 사랑하면서 살고 싶어.”
에블린의 입에서 튀어나온 간절한 진심에 체이서는 마치 환희에 찬 사람처럼 웃었다.
“나 또한 마찬가지야.”
체이서는 붙잡은 손을 제 곁으로 끌어당겨 에블린을 품에 안았다.
그리고 그대로 뒤로 풀썩 누워 버렸다.
“거짓말투성이인 우리가 과거를 잊고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는 없겠지. 서로를 향한 신뢰가 없을 테니까.”
그는 얼떨결에 제 몸 위에 올라타게 된 에블린의 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며 그녀가 그랬던 것처럼 보여 주고 싶지 않은 제 모습들을 보여 주었다.
“당장에 모든 과거를 잊고, 나를 사랑하고자 마음먹는다 해도 쉽지 않을 거야. 내가 원망스럽고, 또 미울 테니까.”
정말로 이런 말까지 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체이서는 변한, 제 모습에 미소를 띤 채 속삭였다.
“그러니 나를 가여워해.”
“…….”
“너의 사랑을 갈구하는 나를 동정하고, 가엽게 여겨. 너무도 불쌍한 나를 네가 거두어 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