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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108)화 (108/159)

108화

에블린은 가 보고 싶은 곳이 있다며 체이서에게 자신을 그곳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하였다.

두 사람이 출발한 시간은 이른 시간이었지만, 목적지가 수도원과는 꽤 거리가 되었기에 말을 타고 이동하였음에도 해가 저물 무렵에서야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자, 손잡고 조심히 내려와.”

먼저 내린 체이서는 긴 시간을 말을 몰았음에도 전혀 힘든 기색이 없이 그녀를 에스코트하였다.

에블린은 체이서가 내민 손을 붙잡고서는 천천히 말에서 내려 눈 앞에 펼쳐진 건물을 올려다보았다.

‘하나도 변하지 않았네.’

3층짜리의 크지 않은 목조 주택은 관리가 잘되고 있는지 겉으로 보면 평범한 별장같이 보였다.

‘루이사답게 철저하다고 해야 하나.’

체이서가 무엇이든지 들어주겠다며 간절히 속삭였을 때 곧바로 떠오른 건 바로 루이사의 시험장이었다.

끔찍한 운명을 안겨다 준 곳이 어째서 떠오른 걸까.

그 의문을 해결하고 싶어 에블린은 이곳에 저를 데려다 달라 요청하였다.

‘막상 오기는 왔는데…….’

멀쩡한 건물을 보고 있으니 기분이 말로 표현할 수 없게 이상했다.

“관리가 잘됐네요.”

목을 타고 나오는 목소리는 평상시 그녀의 목소리와 달리 차갑기 그지없었다.

“아무래도 주기적으로 관리하니까.”

‘아, 알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에블린은 제 감정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불쾌한 거였어.’

자신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버린 이곳은 엉망이 된 에블린과 달리 너무도 멀끔하였다.

‘불공평해.’

에블린의 표정이 좋지 않자 체이서가 그녀의 눈치를 살피더니 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일단 안으로 들어갈까?”

시간과 일정도 고려하지 않고 막무가내로 출발하였기에 시간이 많이 늦어졌다.

‘여기서 하룻밤 자고 가야겠네.’

달갑지 않았지만, 이 또한 에블린이 자초한 일이었다.

“네, 밤이 늦었으니 여기서 자고 가요.”

체이서는 예상치 못한 말에 조금 당황한 듯싶었다.

“……불편할 텐데 괜찮겠나?”

“안 괜찮더라도 어쩔 수 없잖아요.”

에블린의 시선이 닿은 하늘은 검푸르게 물들어 가고 있었다.

이 건물은 숲 깊은 곳에 있었고, 어둠 속에서 숲을 돌아다니는 건 그리 현명한 결정이 아니리라.

“어차피 마물은 미로에만 있을 테니 지하로만 가지 않으면 문제가 될 것이 없지 않나요?”

“시험이 끝나면 마물은 모두 죽여. 그리고 새로운 시험이 열리기 1년 전부터 마물을 모으기 시작하지.”

정말 알고 싶지 않은 진실이었다.

“그러니까 내 말은 그런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는 거야.”

에블린의 구겨진 얼굴에 체이서가 다급히 말을 덧붙였다.

“어차피 당신이 있으니까 마물은 별로 무섭지 않아요.”

체이서가 나선다면 아무리 흉악한 마물도 다 잿더미가 되어 버릴 텐데 두려울 리가.

“꼭 마물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고……. 아무래도 이곳에서는 좋은 기억이 없을 테니까.”

“좋은 기억도 있어요.”

“……무슨 기억?”

“당신을 만난 거.”

에블린은 고민도 없이 툭 말을 내뱉고는 체이서를 제치고 앞장섰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그는 놀라 멍하니 서 있었다. 그러다 저를 가볍게 스쳐 지나가는 에블린을 놓칠세라 정신을 차리고서는 뒤늦게 따라붙었다.

“잠깐, 그래도 혹시 위험할지도 모르니 앞장서지 마. 내 뒤에 딱 붙어 있도록 해.”

체이서는 에블린을 등 뒤로 보내고서는 앞장섰다. 그가 문을 열자 크고 넓은 어깨 너머로 작은 로비가 펼쳐졌다.

‘을씨년스럽네.’

다른 사람들 눈에는 평범한 별장으로 보일지 모르겠으나 아주 오래전부터 이곳에서 죄 없는 이들의 목숨을 갈취해 갔다는 것을 아는 에블린으로서는 꼭 이 저택이 사람을 잡아먹는 장소처럼 느껴졌다.

달칵 소리를 내며 문이 닫혔고, 체이서가 벽에 걸린 촛불에 불을 붙이기 시작했다.

‘편리한 능력이네.’

크게 불꽃을 피워 내는 것만 보다가 저런 모습을 보니 조금 색달랐다.

그와 함께 어릴 적 기억이 스멀스멀 떠오르기 시작했다.

함께 다닌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에블린이 춥다고 중얼거리는 소리에 그가 홀로 미로를 돌아다니며 마른 나뭇잎들을 모아 작은 모닥불을 피워 준 적이 있었다.

‘그래, 그랬던 적도 있었지.’

에블린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미로로 향하는 지하실 문에 닿았다.

처음 이곳에 도착하고 저 안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얼마나 겁에 질리고 두려움에 떨었던가.

‘아무렇지 않다면 거짓말이야. 애초에 왜 여길 오겠다고 한 건지.’

체이서에게는 그와 만남이 좋았다고 하였지만 그건 입바른 말에 불과했다.

애초에 이 건물에서 좋았던 기억이 뭐가 있겠는가.

이곳에서 죽었던 많은 이들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와 꼭 자신의 목을 조를 것만 같았다.

홀로 불안함을 떨쳐 내지 못하고 있으니 어느 순간부터 귓가에 환청 같은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어째서 너는 죽지 않았느냐고, 같이 죽어야 하지 않느냐고.

악몽에서만 들리던 증오가 가득한 목소리가 머릿속에 끊임없이 울렸다.

가슴이 불안하게 뛰며 당장이라도 이 건물에서 나가기를 원하고 있었다.

“위층에 방이 있어. 그리로 가서 여독을 좀 풀까 하는데.”

머릿속을 가득 채우며 괴롭히던 환청은 놀랍게도 체이서가 곁에 다가오자마자 빠르게 흩어졌다.

“……안 그래도 피곤했는데 잘됐네요.”

“위층으로 올라가지.”

“예전에 쓰던 방이 기억나요. 그곳에서 자고 싶은데.

“혼자서는 안 돼.”

단호한 말이었다.

에블린은 홀로 두리라고 기대도 하지 않았기에 거절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

두 사람이 들어온 방은 에블린의 기억 속보다 훨씬 작은 크기였다.

어린아이의 키에 맞춰진 책상과 의자, 그리고 침대만 단조롭게 놓인 이 방은 다른 방과 달리 특별하게도 커다란 창문이 딸려 있었다.

체이서는 창문을 굳게 잠그고는 에블린에게 침대를 양보한 후 그대로 침대를 등진 채 바닥에 앉았다.

“왜 이곳에 오자고 한지는 모르겠지만 오래 있기 좋은 곳이 아니야.”

그는 궁금한 것이 많을 것 같은 얼굴을 하면서도 굳이 질문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말 안 해도 내일은 돌아갈 거예요.”

체이서는 어디로라고 묻는 대신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하였다.

두 사람은 대화를 나누는 대신 조용히 잠을 청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에블린이 일어나더니 굳게 닫힌 창을 열었다.

시원한 바람이 뺨을 간질였고, 음울하게 가라앉았던 눈에는 달빛이 차오르는 듯 서서히 빛이 돌아왔다.

그녀는 자주 해 본 사람처럼 익숙하게 창틀에 걸터앉았다.

몸을 내던지면 금방이라도 바닥에 처박힐 것만 같았다.

홀린 듯 멍하니 아래를 내려다보는데 누군가 그녀의 손을 붙들었다.

“위험해.”

잡힌 손목에 따스한 온기가 닿았다.

“당신이라면 안 자고 있을 줄 알았어요.”

에블린은 저를 붙잡은 체이서를 올려다보며 빙긋 웃었다.

그녀는 창틀에서 일어나는 대신 몸을 돌려 방문이 시야에 잡히도록 자세를 바꾸어 앉았다.

여전히 일어날 생각이 없는지 처연한 얼굴로 미소만 짓고 있는 모습에 체이서는 붙잡은 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뒤로 몸을 던진다면 그대로 떨어질지도 모르는 아주 위험한 자세였다.

고작 2층이라지만 죽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크게 다칠 것이다.

체이서는 더 이상 에블린이 고통에 찬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기에 당장이라도 그녀를 끌어 내리고 싶었다.

“아픈데.”

하지만 억지로 안으로 끌어들였다가 더 큰 원망을 받을까 두려운 마음에 몸이 쉽사리 움직이지 않았다.

“안으로 들어오지 않은 이상 놓아줄 생각은 없어.”

“그럴 것 같았어요.”

입술에 지어진 흐린 미소는 숲을 둘러싼 안개와도 같이 보였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처럼 위태롭고 아슬아슬한 모습에 체이서는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한 채 입만 달싹였다.

“이러고 있으니 처음 루이사 공작저에서 눈을 떴을 때와 비슷한 것 같지 않아요?”

죽고 싶어 하는 에블린과 그런 그녀를 말리던 체이서의 모습.

두 사람 관계의 시작점을 떠올리며 에블린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당신도 이 건물이 기분 나쁘죠?”

“좋지는 않지.”

“그런데도 나를 여기까지 데려다줬네요?”

“약속했잖아. 뭐든지 다 들어주겠다고.”

싫은 기색 하나 보이지 않고 군말 없이 따라와 준 것이 고마워서일까.

에블린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원하는 게 뭐냐 할 때 갑자기 이곳이 떠올랐어요. 이유가 궁금해서 오고 싶었고 지금은 이유를 조금 알 것도 같아요.”

“말해 줄 수 있나?”

“이곳은 얼마나 엉망이 되어 있나 궁금했던 것 같아요.”

“…….”

“나는 이렇게 엉망이 되었는데 내 인생을 망친 시작점인 이곳이 멀쩡하다면 억울할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너무 멀쩡하네요.”

에블린은 입꼬리를 끌어 올리고는 자조적으로 웃었다.

“내가 체이서의 능력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당장 이 시험장을 불태워 버렸을 거예요.”

속마음을 털어놓고 후련해지고 싶었는데 마음이 더 무거워진 것만 같았다.

“체이서는 소원이 있나요?”

“네가 죽지 않고 내 곁에 있어 주는 것.”

대화의 흐름을 벗어난 뜬금없는 질문에도 체이서는 고민조차 하지 않고 빠르게 답하였다.

“저는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요. 이 모든 일이 없던 때로 돌아가면 지금보다 행복해질 수 있을 것 같거든요.”

자연스럽게 그녀의 시선이 제 손가락으로 향했다.

“가주의 반지?”

“네, 더스틴에게서 뺏었어요.”

좋지 않은 기억도 추억이기는 한지 굳게 다물려 있던 입이 쉽게 열렸다.

“체이서, 이 반지에 얽힌 비밀 혹시 알고 있나요?”

“유명한 연금술사가 만들었고, 그래서 착용자에 따라 반지의 크기가 변한다는 것 정도만 알아.”

“사실 숨겨진 비밀이 또 있어요.”

아주 중대한 비밀을 꺼내는 듯 에블린은 목소리를 죽여 작게 속삭였다.

“이 반지는 소원을 이루어 준대요.”

“그런 말은 처음 듣는데.”

“저는 소원을 이루고 행복해지고 싶었어요. 그래서 반지를 얻기 위해 더스틴에게 접근했었죠.”

에블린은 바람에 헝클어지는 머리카락을 귓가에 꽂으며 환히 웃었다.

눈꼬리를 부드럽게 접고, 입가의 호선을 그리며.

“소원을 이루어 주는 대가는 목숨이에요.”

당황한 체이서의 얼굴이 에블린의 눈동자에 담겼다.

그럼에도 에블린은 아랑곳하지 않고 환히 웃으며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제 속 마음을 털어놓았다.

“나는 내 행복을 위해서, 소원을 이루기 위해서 죽어야만 했어요. 하지만 결국 해내지 못했죠. 체이서, 이런 내가 계속 살아갈 이유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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