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7화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일단 나가서 이야기하는 건 어때.”
“싫어요. 여기서, 여기서 할래요.”
지금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이 현실임을 알아도 에블린은 이 순간을 쉽게 믿을 수가 없었다.
이곳을 나갔다가 다시 돌아오면 제리가 신기루처럼 다시 사라질까 두려웠다.
에블린의 떨리는 목소리에 체이서는 제 의견을 억지로 들이밀 수가 없었다.
그가 입술을 달싹이며 말을 꺼내지 못하니 둘 사이에 적막이 흘렀다.
지금껏 조용히 두 사람을 지켜보던 하소가 빙긋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에게 말했다.
“아무래도 두 분께서 할 이야기가 있으신 것 같은데 제리가 깰 수도 있으니 나가서 이야기하고 오시는 건 어떠세요? 제리의 옆에는 제가 있을게요.”
하소의 말에 에블린은 불안한 눈빛을 하였지만 망설임 끝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제리의 방 옆에 또 다른 방이 있어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이야기를 시작할 수 있었다.
‘누가 살던 곳 같아.’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다고 하나 사람이 생활하던 흔적이 느껴졌다.
체이서는 에블린을 작은 탁자 앞으로 안내하였고, 의자를 빼내 그녀를 앉혀 주었다.
그는 곧 물을 끓이고는 그녀의 앞에 따스한 차 한 잔을 내려놓았다.
에블린이 즐겨 먹는 향긋한 허브차의 향기가 물씬 풍기자 그녀의 시선이 잔에 향했다.
그녀가 마시지 않고 가만히 있으니 체이서가 다른 찻잔에 새로운 차를 따르고서는 한 모금 들이켰다.
“약 같은 건 안 탔어.”
그러니 걱정하지 말고 마시라는 말에 에블린은 조심스럽게 찻잔을 쥐었다.
열이 펄펄 끓었었다는데 목감기도 함께 왔는지 목이 찢어질 정도로 아팠다.
와중에 펑펑 울기까지 했으니 목이 괴로워할 만도 했다.
조심스럽게 차를 넘기자 따스한 기운에 그녀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체이서는 그 모습에 미소를 지으며 건너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깨어날 줄은 몰랐어. 꼬박 하루를 앓았거든.”
“…….”
“몸은 괜찮아? 어디 아픈 곳은 없고?”
“괜찮아요.”
에블린이 궁금한 건 제 몸의 상태가 아니었다.
그녀는 불안한 듯 손을 매만지며 듣지 못한 질문을 다시 던졌다.
“제가 궁금한 건 딱 한 가지예요. 제리가 왜 여기 있는 거죠?”
에블린은 지금 이 상황 자체가 이해되지 않았다.
“분명 제리는……, 제리는 죽었잖아요.”
그래, 제리는 분명 에블린의 앞에서 체이서의 검에 의해 죽었다.
제리뿐만이 아니라 다른 가족들 모두 비극적인 그날 밤 죽은 것을 분명 제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지 않았나.
하지만 조금 전 보았던 비석에는 유일하게 제리의 이름만이 없었다.
건물 안에 다시 뛰어 들어온 것 또한 그런 이유에서였다.
말이 안 되지만 혹시나 제리가 살아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작은 희망 때문에.
“어떻게 살아서 여기에 있는 거죠? 아니, 애초에 여기는 어딘가요? 도대체……!”
차분히 말하고 싶었는데 감정이 실린 목소리는 점점 커지기 시작했다.
한껏 흥분한 모습을 자각하고 다시 입을 다물었지만 붉어진 얼굴과 씩씩거리는 숨소리는 그녀의 감정이 격해진 것을 보여 주고 있었다.
체이서는 그런 에블린을 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보다시피 제리는 살아 있어. 이야기가 조금 길어질 텐데 괜찮겠어?”
“괜찮아요.”
열정적이기까지 한 모습에 체이서는 씁쓸한 미소를 감추고선 에블린의 비극인 참사의 밤을 떠올렸다.
체이서는 쓰러진 에블린을 마차에 옮겨 놓았고, 시신과 수도원을 확실하게 처리하기 위해 다시 수도원으로 향했다.
마찬가지로 멀리 떨어진 제리의 시신 또한 처리하고자 하였으나 상황은 그가 예상치 못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에블린과 제리를 처음 발견한 곳에 마물의 시체가 없었다.
소각되어 버린 흔적 하나와 어린아이만 쓰러져 있을 뿐.
마물에서 원래 사람의 모습으로 돌아온 제리를 발견한 그는 조심스럽게 접근하였다.
가까이 다가가도 제리가 갑자기 마물로 변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분명 마물이 된 것을 확인했는데.’
무엇보다 숨을 거두었다고 생각하였는데 미약하지만, 아이의 숨소리가 들려왔다.
조심스럽게 맥을 짚어보니 느리지만 분명히 살아 있었다.
‘변종인가?’
보통은 어린아이나 노인일 경우 전염의 속도가 더욱 빠르고 위험하였기에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었다.
감염화가 진행이 된 것을 두 눈으로 보았으니 확인 사살을 위해 목숨을 거두는 것이 맞았지만 사람으로 돌아온 어린아이에게 칼을 겨눌 수는 없었다.
‘꼭 죽일 필요는 없겠지.’
제리 또한 에블린과 마찬가지로 치료제 개발에 도움이 될지 모른다.
체이서는 제리의 목숨을 거두지 않고 치료제의 변수를 위해 제리를 지켜보기로 하였다.
불에 탄 수도원의 재건을 명목으로 원래 건물 위치 옆에 새로운 수도원을 지어 그곳에 제리를 격리 후 치료하였으나 아이는 시간이 지나도 눈을 뜨지 않았다.
에블린과 다시 마주하는 이 순간까지도.
“의사의 말로는 몸에 큰 이상은 없다지만 충격이 커서 깨어나지 않는 거라 하더군.”
“……그러니까 죽지 않았다고요? 처음부터?”
“……그래.”
눈치를 보며 내뱉은 대답에 에블린은 손에 잡힌 찻잔을 꽉 쥐었다.
‘또 나를 속였구나.’
서로에게 거짓만 속삭이는 이 관계는 정말이지 해로웠다.
“제리를 살린 이유가 그것뿐인가요?”
“처음에는 그랬고…….”
체이서는 머뭇거리다가 깊은 한숨과 함께 또 다른 진실을 털어놓았다.
“너를 붙잡을 수단이 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
“제리는 인질이었군요.”
에블린은 기가 찬다는 듯 허탈한 웃음을 내뱉었다.
죽기 직전 모든 감정을 털어 냈다고 생각했건만 다시금 분노가 치솟았다.
하나, 이 분노가 의미가 있을까.
“이럴 때 너를 위해서 살려 두고 보호하고 있었다고 거짓말을 했다면 제 화가 풀리고 감동할지도 모르는 일인데 솔직한 답이네요.”
“거짓말을 하면 네 기분이 풀릴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건 그때일 뿐이지 않나.”
“맞아요. 당신이 아무리 달콤한 말을 속삭여도 나는 못 믿었을 거예요.”
체이서의 행동은 현명했다. 지금의 에블린에게는 그의 배려와 행동이 곧이곧대로 닿지 않았을 테니까.
“에블린, 나는 너를 곁에 둬야 했어. 뒤늦게서야 내 마음을 깨달았지만 적어도 이 마음이 이제 막 피어난 감정은 아니야. 아주 오래전부터 어쩌면 우리가 처음 만났던 미로에서부터 이어진 감정일지도 모르지.”
체이서의 목소리에는 짙은 후회가 담겨 있었다.
“지난밤 끊임없이 내 행동들을 돌이켜 보았어. 나는 네가 아니니 그 고통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겠지만 내 행동은 분명 옳지 않다 확실히 답할 수 있어. 하지만 되돌아가도 나는 변치 않을 거야. 그렇게 자라 왔으니까.”
잘못을 시인하는 것과 달리 그의 목소리는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칭하기에는 퍽 여유로움이 가득하였다.
“내 잘못을 용서해 달라는 말은 하지 않을게. 네가 원한다면 잠시 거리를 두어도 좋으니 내 곁을 떠나지 말아 줘.”
당당하게 제 의견을 표현하는 것과 달리 달리 체이서는 에블린의 두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도 못하고 있었다.
평소와 다르게 시선도 마주하지 않은 채 두 손을 맞잡은 채 탁자만 내려다보고 있음에 에블린은 답답한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턱을 붙잡고 휙 치켜올렸다.
“……!”
이런 행동을 예상치 못했는지 체이서의 두 눈이 커졌다.
그는 변명하듯 다급히 말을 이어 갔다.
“그래, 이런 사과로는 화가 풀리지 않겠지. 네가 내 곁을 떠나는 것을 제외하고는 어떤 것이든 들어줄게. 그러니 제발 내 곁을 떠나지 말아.”
그리 말하며 체이서는 제 턱을 잡은 에블린의 손을 잡았다.
손가락 사이사이에 깍지를 껴 도망가지 못하도록 움켜쥔 손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여유로워 보인다 생각한 것이 무색하게 그는 초조해하고 있었다.
에블린이 제 곁을 떠날까 봐 두렵다는 이유로 말이다.
“그것만으로 괜찮겠어요?”
“…….”
“내가 거리를 두고서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다고 하면 어쩌려고요?”
그 말에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렇게 두지 않을 거야.”
“또 그때처럼 저택에 가두려고요?”
“……이제 네가 싫어할 짓은 하지 않아. 약속하지.”
‘멍청이.’
밖으로 내뱉지 못하는 욕을 속으로 삼키며 에블린은 천천히 그의 손을 떨쳐 냈다.
불타 없어진 수도원과 똑같은 건물, 가족들을 위한 묘와 비석, 그리고 살아 있는 제리와 그를 보호해 주는 전문가들.
체이서는 자신의 이익을 위해 이러한 짓을 했노라 하였지만, 에블린의 눈에는 그리 보이지 않았다.
모습이 조금 달라졌지만, 에블린에게 소중한 것을 되찾아 주려고 한 것만 같았다.
어리석은 생각임을 알아도, 더는 체이서의 말을 믿을 수 없었음에도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믿어 보는 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아니지, 내가 제일 멍청이지.’
독이 든 찻잔임을 알면서도 꿋꿋이 마시고자 하는 제 모습이 제일 어리석었다.
“울지 마.”
화가 나면 눈물이 난다고 하더니 그 말이 딱 맞았다. 슬프지 않고 스스로에게 화가 난다는 이유로 눈물이 흘렀다.
“나는 이제 네가 울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체이서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대로 에블린을 제 품에 끌어안았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모습은 참으로 낯설어 이상하게 웃음이 흘러나왔다.
애초에 죽고자 했다면 수도원으로 찾아와서는 안 되었다.
‘수녀님, 제일 어리석은 사람은 저였어요.’
에블린은 체이서의 가슴팍에 그대로 고개를 묻은 채 훌쩍였다.
모든 미련을 버렸다고 생각하였지만, 그녀조차 모르는 삶에 대한 희망이 그녀를 이곳으로 안내하였다.
결국 이렇게 살고자 하는 의지를 만들어 주었으니. 에블린은 쓴 독을 그대로 삼켜 고통 속에서도 살아가고 싶어졌다.
무엇보다 이제는 죽음이 그녀에게 안식을 가져다주지 못할 것이다.
에블린이 세상을 떠나면 제리는 결국 모든 가족을 잃고 혼자가 될 테니까.
어린 동생에게 자신이 겪었던 고통을 그대로 안겨 줄 수 없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은 죽고 싶지 않음에 스스로 하는 합리화일지도 모른다.
“제발 울지 마. 이러다가 또 쓰러질지도 몰라.”
애타는 목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온다.
에블린은 눈물 젖은 눈을 곱게 휘며 웃었다.
그리고 무엇이든 들어준다는 그를 향해 자그마한 부탁을 속삭였다.
체이서는 놀란 듯싶었지만, 자신이 꺼낸 말을 지키기 위해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