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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106)화 (106/159)

106화

가라앉은 의식 속에서 어렸을 적의 기억이 떠올랐다.

‘에블린, 수도에 가는 건 어떻니?’

‘네?’

‘너는 아직 어리잖니. 이런 시골보다 수도로 올라가면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아질 거란다.’

라사냐, 에블린의 따스한 수녀님은 그녀가 마음이 상하지 않도록 설득하고는 하였다.

그럴 때마다 하는 에블린은 이리 말하고는 하였다.

‘아뇨, 저는 수녀님이랑 동생들 옆에 있을래요.’

‘우리는 신경 쓰지 말고 네 인생을 살아야지.’

‘싫어요. 아무리 힘들다고 해도 제가 다 책임질 거예요. 저는 가족들 덕에 살아가고 있으니까요.’

장난스러운 웃음이 더해진 말에 라사냐는 씁쓸함을 감추며 웃었고, 에블린은 모른 척 일상 이야기를 꺼내며 말을 돌리고는 하였다.

왁자지껄 떠들던 아이들의 목소리가 사그라 들고, 다정히 미소를 지어 주던 라사냐의 모습이 지워진다.

홀로 남은 에블린은 슬픈 얼굴로 이내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울먹거렸다.

‘하지만 가족들이 없다면 저는 이제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살아도 되는 걸까요?’

에블린의 모습 또한 서서히 지워지고, 깜깜한 어둠 속에 희미한 빛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빛 한가운데 서 있는 건 비에 흠뻑 젖은 채 에블린을 바라보고 있는 체이서였다.

이내 그의 모습마저 사라지면서 수면 아래 잠겨 있던 의식이 깨어났다.

깜빡, 깜빡.

에블린은 무겁게 가라앉은 눈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여기는 어디지?’

낯선 천장임에도 무언가 익숙하게 느껴졌으니.

에블린은 멍한 얼굴로 눈을 깜빡이다가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묘하게 달랐지만 분명 이곳은 에블린의 집이었던 수도원 그녀의 방이었다.

에블린의 두 눈동자가 기대감과 두려움에 하염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설마 되돌아온 걸까?’

체이서가 나타나 자신을 막은 것은 그녀의 상상이고 반지에 소원을 비는 게 성공한 걸지도 모른다.

반지가 에블린 또한 과거로 함께 보내 준 것일까 하는 기대감에 심장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에블린의 시선이 문으로 향했을 때, 서서히 차오르기 시작하던 희망은 너무나도 쉽게 꺼져 버렸다.

‘의자가 멀쩡하네…….’

에블린이 쓰던 의자는 다리 한쪽의 높이가 맞지 않아 덜컹거렸는데 이 방에 있는 의자는 멀쩡하였다.

‘의자뿐만이 아니야.’

그녀가 머물던 방과 똑같아 보이지만 지나치게 깔끔하고 새 건물 티가 난다는 것에서 분명 다른 공간이었다.

‘바보 같아.’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무엇을 기대했던 걸까.

에블린이 한숨을 내쉬며 얼굴을 감싸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방을 빠져나가다 말고 저도 모르게 또 멈춰 서고 말았다.

‘……수도원의 복도랑 똑같아.’

하지만 낡았던 수도원의 건물과는 다르게 지어진 지 얼마 안 된 새 건물처럼 깨끗하고 튼튼해 보였다.

‘내가 지금 꿈을 꾸는 건가.’

에블린은 제 뺨을 꼬집어 봤다가 곧바로 인상을 찌푸렸다.

“아파.”

아픈 걸 보니 꿈은 아닌 게 분명한데 이건 어떻게 된 상황인 걸까.

애초에 이곳에 어떻게 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분명 체이서가 찾아와 나를 막은 건 기억나는데.’

이곳으로 자신을 데려온 것은 체이서일 것이다.

마지막에 보았던 사람이 그뿐이니까.

빗속에서 죽지 말라며 절절한 목소리로 사랑을 고백하던 모습이 떠오르자 그녀는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그런 모습은 처음이었지.’

지금까지 사랑을 속삭이던 모습과 달리 여유가 없고 절박하기까지 한 모습을 보고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정말로 그 전에 보여 주던 말과 감정 모두가 거짓이었음을.

만약 체이서가 조금이라도 자신의 마음을 일찍 깨달았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잘 모르겠어.”

어차피 모두 끝난 일이지 않나.

에블린은 더는 ‘희망’에 목매고 싶지 않았다.

‘실패했다면 다시 하면 돼.’

체이서가 정신없이 사랑을 속삭이는 틈을 타 반지를 다시 손가락에 끼워 두었었다.

‘애초에 체이서가 찾아올 줄 알았으면 이곳으로 오지 않았을 텐데.’

에블린을 실패를 되새기며 체이서가 나타나기 전에 자리를 떠나고자 지친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소름 끼칠 정도로 수도원을 닮은 이 건물을 나가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곳을 찾으리라 생각하며.

‘앞문을 지키고 있을지도 모르니 뒷문으로 나가자.’

만약 이 건물이 수도원과 똑같은 구조로 지어진 게 맞는다면 분명 부엌 쪽에 문이 하나 더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에블린의 예상대로 부엌에는 뒷마당과 통하는 쪽문 하나가 있었다.

망설임 없이 문을 열고 나오자 어제와 달리 맑은 하늘이 그녀를 반겨 주었다.

오래간만에 맞이하는 산의 상쾌한 공기에 희미한 미소를 짓는 에블린의 눈에 이상한 무언가가 밟혔다.

‘비석?’

누군가의 무덤과 함께 비석 하나가 놓여 있었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에블린은 자신도 모르게 비석 앞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그 위에 적힌 이름에 화들짝 놀라고 말았으니.

“수녀님의 이름이 왜 여기에…….”

비석에는 라사냐의 이름과 알렌, 리제, 리모, 수잔 총 네 명의 이름이 더 적혀 있었다.

그 앞에 놓인 국화를 보고서 에블린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분명 체이서의 손에 있어야 할 그들의 시신이 이곳에 묻혀 있었다.

‘잠깐만…….’

순간 머리를 내려친 것만 같은 충격에 그녀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서 조금 전에 보지 못했던 문을 발견하여 벌컥 열어젖혔다.

“지하?”

그러자 보인 것은 지하실로 내려가는 긴 계단이었다.

수도원에는 분명히 지하실이 없었는데 수도원을 쏙 빼닮은 이 건물에는 지하가 존재하다니.

어서 떠나야 한다는 이성과 다르게 그녀의 몸은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지하실 아래로 향하는 길은 어둡지 않고 따스한 랜턴의 빛이 감싸고 있어 길이 잘 보였다.

2층 정도 되는 계단을 내려가니 지하실의 문이 보였다.

그 문을 열고 들어가자 또다시 여러 개의 문이 나왔다.

에블린은 그중 불이 스며나오는 방문의 손잡이를 잡고 고민도 하지 않고 열었다.

“……에블린?”

문이 열리는 소리에 안에 있던 두 사람이 대화하다 말고 고개를 돌렸다.

한 명은 체이서였고, 다른 한 명은 이곳에 있으리라 짐작하지 못한 하소 경이었다.

“……몸은 괜찮아?”

에블린은 예상치 못한 두 사람의 등장에 당황하여 그대로 문을 닫고 도망치려다 멈칫 굳어 버렸다.

‘장난감…….’

커다란 인형들과 교구들이 한쪽에 쌓여 있었고, 동화책으로 보이는 책들이 잔뜩 책꽂이에 꽂혀 있었다.

심지어 어린아이들이 뛰어놀다 다치지 않기 위한 부드러운 러그가 바닥에 가득 깔려 있었다.

“어제 비를 너무 많이 맞았어. 조금 더 쉬는 게 좋은…….”

체이서가 다가와 에블린을 다시 방으로 내보내려고 어깨를 잡자 그녀가 저도 모르게 그의 손을 내쳤다.

“……아.”

에블린이 놀라 한 걸음 물러서자 체이서는 내쳐진 것을 내색하지 않으며 다시금 부드럽게 그녀의 어깨를 붙들었다.

“당신, 열이 펄펄 끓었어. 조금 더 쉬어야 해.”

체이서의 걱정 어린 말과 느껴지는 하소의 시선에도 에블린은 고개를 내저었다.

이 방에 들어서니, 마치 그리운 무언가를 되찾은 듯 마음이 소란스럽게 울렁이기 시작했다.

적어도 이 기분이 무엇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체이서의 만류에도 에블린은 방 안으로 들어섰다.

이상하게도 방 깊숙이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자꾸만 심장이 두근거리고, 숨이 가빠져 오기 시작했다.

그건 어쩌면 기적적인 재회를 본능적으로 깨달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에블린이 하소가 서 있는 곳을 향하니 그녀가 체이서의 눈치를 보다가 슬쩍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그녀가 가리고 있던 작은 침대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그 침대에 가지런히 누워 있는 어린아이를 발견할 수 있었다.

“……제, 리?”

에블린의 작고 소중한 막냇동생이 침대에 누워 곤히 잠을 자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그녀의 몸은 애처로울 정도로 떨리고 있었다.

새근새근 숨을 내쉬며 자고 있었지만, 이 또한 그녀의 바람에서 일어난 환청일지도 모른다.

에블린은 천천히 손을 뻗어 제리의 코 밑으로 가져가 보았다.

“숨을…….”

숨을 쉬고 있었다.

착각이 아니라는 듯 제리가 코끝을 찡그리더니 몸을 휙 돌렸다.

몸을 동그랗게 말고 이불을 돌돌 감싸는 모습은 평상시 잠버릇과 똑같았다.

“……!”

에블린은 비명이 터져 나올 것 같음에 입을 틀어막은 채 자리에 주저앉았다.

깜짝 놀란 체이서와 하소가 다가와 그녀를 일으켜 주려고 했지만, 에블린은 고개를 내저었다.

그녀의 눈에서는 어느새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리고 있었다.

떨어지는 눈물은 방해만 되어 소매로 눈가를 거칠게 쓸어내렸지만,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막을 수는 없었다.

“흑, 흐윽.”

숨소리조차 새어 나가지 않도록 입을 꽉 틀어막고 있었지만 터져 나온 울음은 그 틈을 빠져나가 결국 서러운 울음소리를 만들어 내었다.

일어나서 다시 제리를 확인해 보고 싶었지만, 다리가 풀렸는지 몸이 말을 듣지를 않았다.

빠르게 눈치챈 체이서가 다가와 에블린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내 몸에 기대서 일어나.”

에블린은 눈물 고인 눈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 몸을 맡겼다.

힘겹게 몸을 일으켜 침대를 내려보니 제리는 여전히 잠들어 있는 상태였다.

훌쩍이는 울음소리와 여러 명의 인기척에도 어찌나 곤히 자는지 에블린은 울면서도 입가에 미소를 띠었다.

제리는 에블린의 기억 속의 모습보다 조금 더 자라 있었다.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제리의 머리를 쓸어 보자 부드러운 아이의 짧은 머리카락이 닿았다.

서서히 손을 내려보니 아이의 보들보들한 뺨이 만져졌다.

살아 있음을 보여 주듯 느껴지는 따뜻한 체온에 에블린은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끼며 다시금 무너질 뻔하였다.

체이서가 붙잡아 주지 않았더라면 분명 그녀는 다시 털썩 주저앉았을 것이다.

“제리가, 제리가…….”

죽었으리라 생각했던 가족의 생존 소식에 에블린은 쉽사리 말을 잇지 못했다.

마치 흑백으로 물들었던 세상에 색이 차오르는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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