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5화
에블린이 검을 쥔 손에서 힘을 빼자 체이서도 그녀의 손을 놔주었다.
그녀는 두 손을 체이서의 가슴 위에 올렸고,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를 느끼며 서서히 목을 감싸기 시작했다.
체이서 또한 키스에 열중한 채 두 손으로 그녀를 껴안아 제 품으로 끌어당기려고 했다.
그리고 에블린은 그 잠깐의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그녀는 체이서의 목을 끌어안으려던 손으로 두 어깨를 거세게 밀쳤고, 갑작스러운 충격에 그의 몸이 뒤로 밀려 쓰러졌다.
에블린은 바닥에 가지런히 놓여 있는 단검을 쥐었다. 그리고 그가 붙잡기 전에 다시 검을 높이 치켜들어 올린 순간.
에블린은 무심코 체이서를 보고 말았다.
그리고 다시는 볼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감정을 맞부딪히게 되었다.
참으로 이상했다.
‘어째서 저런 표정을 짓는 거야?’
그저 에블린을 자신의 편리에 의해 사용한 도구에 불과하면서 왜 저리 슬퍼하는 얼굴을 하는 걸까.
체이서의 얼굴은 마치 루이사의 시험장에서 그녀의 기억을 지우기 전 보았던 것과 같았다.
마치 자신이 죽는 게 끔찍이도 싫은 사람처럼 보이자 그녀는 마음먹은 것과 달리 제 목 앞까지 다다른 검을 목에 찔러 넣을 수가 없었다.
그 순간 체이서는 에블린의 손을 붙잡고 다시는 그녀가 검을 쥘 수 없도록 이번에야말로 검을 빼앗아 저 멀리 던져 버렸다.
그리고 에블린을 제 품에서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꽉 끌어안았다.
“내가 구한 목숨이야.”
“…….”
“미로에서 죽을 뻔한 너를 내가 살렸고, 시체들 틈에 섞어 살린 채 내보냈어.”
“…….”
“잊고 살았음에도 다시 내 눈앞에 나타난 건 너잖아.”
에블린을 껴안고 있는 체이서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
마치 두려운 것을 목격한 듯 겁에 질린 모습이 참으로 낯설었다.
“몇 번이고 다시 너의 목숨을 구해 냈으니까 네 목숨은 내 것이야.”
처음으로 듣는 그의 속마음에 에블린은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지쳤는데, 이제 모든 걸 끝내고 싶어 그러겠노라 마음을 먹었는데 어째서 이 사내는 저를 방해하는 것일까.
한참을 반응 없이 있으니 체이서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나를 사랑하지 않아?”
사랑했다.
너무도 사랑해서 그의 옆에 있는 게 괴로웠다.
다시금 속눈썹에 빗물이 달라붙어 마치 물속에 있는 것처럼 시야가 일렁였다.
체이서의 표정이 보이지 않았다.
평소라면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 진심을 내보였겠지만, 그녀는 이미 너무 지쳐 버렸다.
에블린은 입을 달싹이다가 이내 한 마디를 꺼내었다.
“사랑하지 않아.”
작은 목소리였지만 가까이 붙어 있는 체이서에게는 어떠한 말보다 크게 들렸다.
체이서는 더욱더 거세게 에블린을 끌어안았다.
“……그래도 소용없어. 난 널 절대로 죽게 두지 않을 거니까.”
“내가 죽고 싶다고 해도?”
“네가 죽고 싶다고 해도.”
돌아온 단호한 답에 에블린은 허탈함을 느끼고 힘없는 웃음을 내뱉었다.
“당신이 이렇게까지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
에블린의 초연한 목소리에 체이서는 그녀를 껴안은 채 주먹을 꽉 쥐었다.
체이서 또한 마찬가지였다.
어째서 에블린의 죽음을 막기 위해 이렇게까지 스스로가 필사적으로 될 수 있는 건지 그 자신도 알 수 없었다.
그래, 조금 전까지 말이다.
에블린이 죽음 앞에 도달한 이 순간, 깨달은 감정은 그가 그토록 부정하고 거부하던 사랑이었다.
자신에게 있을 리 없는 감정을 깨닫고서야 체이서는 모두가 이해하지 못했던 제 행동의 이유를 알아낼 수 있었다.
에블린이 모두에게 걸린 저주를 봉인하고 떠난 것을 알게 되자마자 체이서는 곧바로 아스트 산맥으로 떠날 채비를 하였다.
갑작스러운 여행 소식에 블러드윈도 보좌관도 모두 말렸지만, 그는 멈추지 않았다.
그저 지금 당장 에블린을 만나서 그녀를 다시 공작저로 데려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제 손을 멋대로 벗어난 에블린을 되찾아 오겠다는 생각이었다. 저를 이상하게 보는 블러드윈의 시선에도 이 행동들은 모두 제 것에 대한 올바른 소유권이라 생각하였고, 타당한 행동이라 여겼다.
수도원에 도착하여 에블린을 발견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자신을 보면 에블린은 깜짝 놀랄 것이다.
그리고 더스틴의 딸임을 숨겨서 미안하다 사과를 할 것이고, 함께 돌아가기를 거절할 게 분명했다.
하지만 체이서는 에블린이 어떤 사람인지, 그녀가 품고 있는 사랑이라는 감정의 무게를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자기 잘못 또한 사과하며 그녀를 설득하여 공작저로 데려갈 생각뿐이었다.
그 후, 더스틴을 블러드윈에게 넘겨 주고 더스틴을 끔찍한 고통 속에서 죽게 하겠다는 서로의 약속을 이행한다면 그의 분노 또한 잠재울 수 있을 테니 걱정할 건 없었다.
공작저로 무사히 데려가기만 한다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것이라고 그리 여긴 것이다.
그러나 곧 에블린이 스스로 죽기 위해 검을 치켜든 것을 본 그 순간, 체이서는 제가 예상 밖의 모습에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무사히 에블린을 막아내었지만, 그녀의 상태가 이상했다.
그 후로는 예상치 못한 일의 연속이었다.
스스로 죽고자 했던 에블린은 체이서에게 입을 맞추었고, 그는 그녀를 거부하지 않았다.
오히려 오래간만에 만나는 그녀의 모습에 더욱 애타며 그녀의 입술을 갈구했다.
결국엔 검을 내려놓으며 제게 매달리는 애타는 손길을 거부하지 않고 그녀를 제 품에 놓아 절대로 놓아주지 않으려고 하였다.
에블린이 자신을 밀치기 직전까지는 과정이 이상해도 제가 원하는 대로 흘러갈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다시금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하지만 않았더라면 그랬을 것이다.
결연한 에블린의 순간을 다시 마주했을 때의 느낌은 마치 세상이 무너지는 것만 같은 큰 충격을 체이서에게 안겨다 주었다.
에블린은 사랑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죽음을 택할 정도로 독한 이가 아니었다.
그러나 체이서가 마주한 것은 그가 알고 있던 그녀가 아니었다.
에블린이 손을 멈추지 않았더라면?
검을 빼앗아 저 멀리 던졌음에도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사랑의 달콤함을 느끼기도 전에 그는 사랑하는 이의 상실에 대한 두려움을 먼저 깨닫게 되었다.
에블린이 간절히 죽음을 바라는 모습을 목격한 순간부터 아득하게 느껴지는 공포가 감정을 지배하였다.
체이서는 에블린에게 제 소유를 주장했다.
그녀의 목숨은 제 것이니 멋대로 죽어서는 안 된다는 헛소리를 내뱉으며 자신을 사랑하는 그녀를 곁에 두려고 했다.
사랑하지 않냐는 물음에 사랑하지 않다고 답을 하기 전까지는 그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당연한 것, 그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에블린은 온전히 체이서의 생각대로 흘러가는 물건이 아니라 생각과 감정을 가진 사람이었으니까.
결국 모든 사실을 알게 된 에블린의 마음이 변했다. 그녀의 사랑은 떠나갔고, 남은 것은 스스로 죽음에 대한 갈망뿐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버린 에블린과 달리 체이서는 지금에서야 자신의 사랑을 자각하고 말았으니.
끝까지 아니라 부정했던 감정을 깨달은 순간, 마주한 것은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너를 사랑하니까.”
체이서는 목 끝까지 차올랐던 진심을 내뱉었다. 그러나 에블린의 표정은 조금 전과 다름이 없었다.
“그날 네가 들었던 블러드윈과의 대화는 모두 거짓이야. 그저 멍청한 이가 내뱉은 거짓말에 불과해.”
“…….”
“에블린, 나는 네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나는 너를 사랑하고 있어.”
체이서의 고백은 에블린에게 와 닿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신뢰의 불이 모두 꺼져 버렸으니 서로를 속이고 기만하던 행동에 대한 결과였다.
아무리 사랑한다고 속삭여도 에블린은 눈 깜빡하지 않았다.
비가 이렇게 내리는데도 입이 바짝 마르고 속이 타는 기분이었다.
“그만, 이제 이런 거짓말은 하지 말아요.”
속지 않는다고 말하는 에블린의 목소리는 차갑기 그지없었다.
체이서는 절망 속의 바다 한가운데 빠진 것만 같았다.
매사에 밝고 긍정적이며 언제나 제 풍부한 감정을 품던 그녀를 이리 만든 것은 체이서였다.
체이서가 제 마음을 전하는 것을 포기하지 않자 에블린이 나섰다.
“나는 더스틴 루이사의 친딸이에요.”
“알아.”
“당신과 당신의 형제들을 저주하는 이름으로 괴롭게 한 그 더스틴 루이사의 딸이라고요.”
“안다고. 상관없어.”
“상관이 없다고요? 다른 이들도 그리 생각할까요?”
에블린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헛웃음을 터트렸다.
“더스틴은 가신들의 눈을 피해 루이사에 자신의 피를 이을 생각이었어요. 당신은 내가 가주에 앉기 위해 억지로 끌려온 피해자라고요.”
처음 들으면 충격적인 소식일 텐데도 체이서는 마치 예상이라도 한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상관없어.”
아니, 예상한 것이 아니라 어떤 말이든 받아들이려 했기에 나온 반응이었다.
“나는 싫어요. 내가 더스틴의 딸이라는 것도 싫고, 이렇게 살아 있는 것도 싫어.”
그러나 체이서가 아무리 노력한다고 하더라도 이미 단단히 굳어 버린 에블린의 마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당신이 나를 사랑하든 말든 나와는 하등 상관없어요. 그러니 이만 나를 놔줘요.”
만약 에블린을 여태까지 속이지 않고 진심으로 행했더라면 그녀가 이러한 반응을 보였을까?
체이서는 지난 제 행적들을 후회하며 에블린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자신의 사랑만으로 에블린을 붙잡기에는 이미 멀리까지 와 버렸다.
그럼에도 놓지 못하는 미련한 감정 또한 사랑이었다.
“사랑해, 정말 온 마음을 다해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