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4화
‘수도에 가고 몸이 더 약해지기는 했구나.’
예전에는 어렵지 않게 올랐던 산길이 왜 이렇게 힘이 드는지.
에블린은 쉬엄쉬엄 올라왔음에도 벅찬 숨을 내뱉으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쳤다.
“정말 새까맣게 탔네.”
수도원의 건물은 폐허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로 기둥 몇 개를 제외하고는 폭삭 무너져 내려 있었다.
발걸음 하나 쉽게 얹을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한 모습이었지만, 에블린은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천천히 예전의 기억을 되짚어 보며 수도원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그래 봤자 계단도 모두 불타 없어졌기에 남아 있는 터를 둘러보는 것에 그쳤지만.
“아무도 살지 못하겠는걸.”
이래서는 갈 곳 없는 거지나 도망자들도 인상을 찌푸리며 피할 게 분명했다.
‘분명 감염을 예방하기 위해서 모두 불태워 버렸겠지.’
에블린은 근처 커다란 바위에 앉아 잠시 숨을 골랐다.
아이들이 잘 뛰어놀던 마당도 모두 불에 그슬려 엉망이 되어 있었고, 빨래방이고 뭐고 제대로 남아 있는 게 없었다.
“그래도 처음 이곳에 왔을 땐 되게 커 보였는데.”
어린 에블린은 이런 낡은 수도원이 평생 자신의 마음의 고향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 했을 것이다.
‘이곳이 너의 새로운 집이야. 이제부터는 나와 함께 살자꾸나.’
죽음의 끝에서 도망쳐 만난 안식처, 그리고 처음으로 진심 어린 따스함을 안겨다 준 사람.
겁먹은 에블린을 이끌고 수도원을 이곳저곳 소개하던 라사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후 일상생활에 적응해 나가다가 동생들을 만났고, 진정으로 새로운 삶을 선물 받았다고 생각했었다.
“아.”
에블린이 자각하기도 전에 뺨을 타고 턱 아래까지 주르륵 눈물이 흘러내렸다.
더는 슬프지도 않다 생각했는데 하염없이 눈물이 흘러나왔다.
적어도 웃으면서 떠나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감정은 이를 쉽사리 허락해 줄 생각이 없나 보다.
“다시 보고 싶은데 볼 수 없겠죠?”
이곳에서 죽은 제 가족들에게 던진 질문에 대한 대답은 당연하게도 돌아오지 않았다.
에블린이 작은 가방을 열고 엎어 버리자 손수건에 쌓여 있던 단검이 툭 떨어졌다.
마야가 준 여비는 나무가 아닌 일반 마차를 타기에도 충분했다.
그럼에도 에블린은 이 단검을 사기 위해서 돈을 아껴 나무 마차를 타며 오랜 시간을 이동해 왔다.
상인은 날이 아주 날카로워 짐승의 목덜미는 단번에 베어 버릴 정도로 위협적인 단검이라 했다
고통에 오래 시달리고 싶지 않아 한 번에 죽기 쉬운 물건으로 고른 것이었다.
이왕 죽는 거 아프지 않게 죽고 싶었지만, 자신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었다.
‘반지에 제물로 바칠 이의 피를 떨어트리고, 제물이 죽으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고 했었지.’
실수하지 않기 위해 몇 번이고 되새기며 떠올린 터라 헷갈리지 않았다.
에블린이 간절히 바라는 소원은 시간을 되돌려, 부디 수도원의 가족들이 이와 같은 참사를 겪지 않고 행복하게 잘살기를 바라는 것이었다.
루이사 공작가에도 플레이어가 나타난다면 체이서와 블러드윈 그리고 데몬스까지 그녀가 모두 구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에블린이 없어야 가능한 일이었다.
‘괜히 살겠다고 아등바등 발버둥 치지나 말걸.’
미로 속에서 체이서가 내쳤을 때 그냥 정해진 죽음을 받아들였다면 이런 후회를 겪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죽음을 앞에 두고 있어서 그런지 자꾸만 여러 생각들이 튀어나왔다.
‘똑같은 후회는 그만. 더 이상 생각하지 말자.’
어차피 이미 낭떠러지 끝에 선 그녀에게 되돌아갈 곳은 없었으니 상념에 잠길 필요 없었다.
오히려 죽음으로 모든 걸 끝내는 게 에블린을 위한 구원이고 안식이었다.
‘너무 걱정하지 말자. 소원은 분명 이루어질 거야.’
이곳이 게임 속인 이상 분명히.
에블린은 몸을 일으켜 불탄 수도원 중앙을 향해 걸어갔다.
석양이 지던 하늘은 어느덧 어둡게 물들었고, 구름이 가득한 날씨 덕에 달빛도 보이지 않았다.
툭, 투둑.
해가 저물기 무섭게 떨어지던 빗방울이 점점 무거워지기 시작했다.
마치 수도원 가족들이 모두 죽은 그날처럼 거세게 내리기 시작한 비에 에블린은 어쩐지 홀가분했다.
에블린은 반지를 빼고 조심스럽게 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검지를 가볍게 찔러 송골송골 맺힌 핏방울을 반지에 떨어트렸다.
그러자 반지가 희미한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반응을 보이는구나.’
모든 것을 버리지 못해 이제껏 미뤄 왔던 일을 드디어 해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에블린은 오래간만에 행복함을 느끼며 조금 더 손가락을 깊이 찔렀다.
피를 머금으면 머금을수록 반지는 더더욱 빛을 내뿜기 시작했다.
이능력과는 또 다른 묵직한 기운이 반지에서 흘러나오고 동시에 예사롭지 않은 바람이 에블린의 주위를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제 목숨을 바친다면 수도원의 가족들이 돌아올 것을 확인받는 기분이었다.
조금은 두렵게 느껴졌던 죽음을 간절히 원하게 되는 순간, 에블린은 차오르는 기대감에 다시 활짝 웃었다.
‘내가 없으면 모두가 행복해지겠지?’
머릿속으로는 에블린이 없고 나서 행복해질 사람들의 얼굴이 지나갔다.
그녀의 존재도 잊은 채 서로를 의지하며 살아가는 수도원의 가족들의 얼굴에 웃음이 번져 있었다.
루이사 공작가는 새로 등장한 플레이어의 취향대로 꾸며지고, 결국 모두의 사랑을 받을 것이다.
에블린에게 거짓으로 사랑을 고했던 체이서는 진심으로 그녀에게 사랑한다고 속삭이며 연인이 되어 달라 간절히 빌 것이다.
체이서 답지 않은 행동이지만 사랑을 갈구하는 그의 모습은 행복해 보였다.
‘사실은 나도 함께 행복해지고 싶었어.’
차마 밖으로 꺼내지 못한 진심을 가슴 깊은 곳에 묻어 두고, 에블린은 숨을 크게 내쉬었다.
“과거로 시간을 되돌려 주세요. 제가 없는 세상 속에서 모두가 주어진 운명대로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도록 해 주세요.”
에블린은 반지의 빛이 사그라들기 전에 두 손으로 단검을 단단히 쥐고선 제 심장을 향해 겨누었다.
이제는 뺨을 타고 흐르는 것이 빗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정도였지만 에블린은 그 어떤 때보다 행복하게 웃었다.
그리고 망설이지 않고 심장을 향해 검을 찔러 넣었다.
아니, 찔러 넣으려고 했다.
“이게 뭐 하는 짓이야!”
하늘이 노한 듯 천둥과 번개가 요란하게 치기 시작했다.
에블린은 거세게 내리는 빗줄기에 힘겹게 눈을 떴고, 속눈썹에 송골송골 맺힌 빗방울들을 떨치고서야 그녀를 막은 사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니, 사실 직접 보지 않아도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안녕, 체이서.”
에블린의 앞에는 그녀와 마찬가지로 흠뻑 젖은 체이서가 그녀의 손아귀를 붙잡고 있었다.
“괜찮다면 이것 좀 놔줄래요?”
“놓으면? 죽으려고?”
한 자, 한 자 내뱉는 목소리에 분노가 가득하였다. 그러나 에블린은 예전과 달리 더는 체이서가 두렵지 않았다.
“보다시피.”
태연한 대답에 체이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아픈데.”
“검을 놓는다면 놔주지.”
어찌나 거세게 잡았는지 붙잡힌 에블린의 손이 새하얗게 질려 있었다.
“놔줘요.”
“검을 놔.”
요란하게 울리는 하늘 덕에 두 사람의 대치는 점점 길어졌다.
두 사람은 서로 지지 않겠다는 듯 눈을 마주친 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대체 왜 여기까지 쫓아와서 날 방해해요?”
에블린이 아는 체이서라면, 그녀를 물건으로 여기는 체이서라면 이래서는 안 되었다.
원수의 딸, 그를 기만한 배신자.
어떻게서든 목숨을 갈취하고 싶었을 텐데 이러는 이유가 뭘까.
이해가 안 가던 찰나 곧 답이 떠올랐다.
“아, 직접 죽이고 싶었구나.”
“뭐?”
“그럼 그렇다고 진작 말을 해 주지 그랬어요. 잘됐다. 사실 한 번에 죽을 자신은 없었거든요.”
에블린은 입꼬리를 올리며 해맑게 웃었다.
진심이 가득한 얼굴에 체이서가 사납게 으르렁거렸다.
“내가 너를 어떻게 살려 놨는데. 죽는 걸 가만히 보고만 있을 것 같아?”
“아니었어요?”
기대감이 가득했던 얼굴에 실망이 차올랐다.
“내가 너를 죽일 줄 알았나?”
그러한 에블린의 반응에 오히려 체이서는 충격을 받았다.
“당연한 것 아닌가?”
당연한 질문에 에블린은 조금씩 체이서가 귀찮아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나를 찾아온 거예요? 일부러 다른 사람들에게 폐 끼치기 싫어 이곳까지 온 건데.”
“……단순한 가출이 아니라 죽기 위해서 이곳까지 왔다고?”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이었지만 에블린은 굳이 대답해 주고 싶지 않았다.
어째서 체이서는 자신의 뒤를 쫓아왔는지 모르겠다만 제 죽음을 막으려 한다면 그는 방해꾼에 불과했다.
에블린은 여전히 붙잡고 있는 체이서의 손을 힐끗 바라보다가 다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생각보다 체이서가 자신을 미워하지 않는 것 같아서 충동이 든 것일까?
정신을 차렸을 때 그녀는 체이서의 입술 위에 제 입술을 맞대고 있었다.
체이서는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가 이내 그녀의 입안을 파고들며 거칠게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방심한 체이서의 키스를 받으며 숨이 딸려 할딱이는 와중에도 에블린은 눈을 감지 않고 기회를 노렸다.
그리고 기회는 금방 찾아왔다.
체이서의 한 손이 에블린의 허리를 잡아챘고, 나머지 손이 검을 든 그녀의 손을 지그시 눌렀다.
두 사람은 마치 사랑에 미친 연인처럼 쏟아 내리는 빗속에서 서로의 입술을 탐했다.
귓가를 때리는 거친 빗소리를 제외하고 들려오는 건 서로의 숨을 원하는 애달픈 숨소리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