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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103)화 (103/159)

103화

에블린은 낡은 마차에서 내리며 허리를 두드렸다.

공작저 생활에 익숙해졌는지 매번 고급 마차만 타다가 평민들이 타고 다니는 나무 마차를 타니 허리가 끊어질 것만 같았다.

‘이것도 수도원에 있는 시절엔 상상도 못 하던 거였는데,’

다른 마을로 넘어가야 할 일이 있다면 상단에 부탁하여 짐마차를 얻어 타 움직이고는 했었다.

‘배가 불렀네.’

낡은 마차를 여러 번 옮겨 타느라 생각보다 시간이 더 걸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드디어 목적지에 도착했다.

‘오래간만이네.’

에블린은 그리운 눈빛으로 눈 앞에 펼쳐진 작은 마을을 바라보았다.

아스트 산맥 안에 있어 이름조차 없는 작은 마을, 그 초 입구 앞에선 에블린은 조금 고민하다가 몸을 돌렸다.

애초에 그녀의 목적지는 마을이 아니라 수도원이었기 때문에 굳이 마을 안으로 들어갈 필요는 없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목적을 해결하고자 하는 마음에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혹시 너 에블린이니?”

저를 부르는 이름에 반사적으로 멈춰 뒤를 돌아보니 마을의 동년배였던 로사가 그녀와 눈을 마주치자마자 활짝 웃었다.

“세상에나, 정말 에블린이구나!”

로사는 반가운 얼굴로 뛰어오더니 다급히 에블린의 팔에 팔짱을 꼈다.

“그간 잘 지냈어? 말도 없이 떠나서 얼마나 놀란 줄 알아? 그런데 너 머리 색이…… 원래 금발이었나? 염색한 머리는 아닌 것 같은데. 어머, 눈 색도 그렇고…….”

예상치 못했던 만남에 에블린은 당황하다가 그냥 진실을 말했다.

“응, 사실 원래 모습이 눈에 띄어서 숨기고 다녔어.”

“세상에나. 갈색 머리도 예뻤지만 지금 머리도 너무 예쁘다. 눈 색도 너무 상큼하고! 그러고 보니 피부도 좋아지고, 손톱도 가지런해지고, 막 윤기가 나네.”

로사는 한참을 에블린을 살펴보더니 두 손을 허리에 얹고선 뾰로통한 얼굴로 말했다.

“결혼식 초대는 못 하더라도 떠난다고 말이라도 해 주지 그랬어.”

“응? 내가 결혼한 건 어떻게 알았어?”

“젊은 귀족이랑 결혼한다고 마을에 소문이 다 났잖아. 몰랐어?”

에블린은 눈을 깜빡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체이서가 약방에서 나서 준 덕에 그런 소문이 흘렀었지.’

소문이 뒤바뀌어서 다행이라며 체이서와 대화까지 해 놓고서는 깜빡하다니 그동안 정신없이 살기는 했나 보다.

“미안해, 사정이 좀 있었어. 아파서 쓰러졌었는데 눈을 뜨니 남편의 집이지 뭐야.”

“진짜? 그렇게 많이 아팠어? 난 그런 줄도 모르고…….”

“내가 원래 잔병치레가 좀 잦잖아. 금방 떨치고 일어났어.”

괜찮다며 웃었지만 로사의 얼굴에 떠오른 미안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난 괜찮아, 로사.”

“으응, 다행이다.”

걱정 말라며 단호히 말하는 것에 로사는 안심하며 웃을 수가 있었다.

“그보다 여기는 혼자 어쩐 일이야?”

“잠시 고향이 그리워 여행을 왔어.”

“여행?”

로사는 커다란 눈을 깜빡이더니 웃음을 터트렸다.

“뭐야, 가출했구나?”

로사의 말에 이번에는 에블린이 답하지 못하고 당황한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가끔 우리 엄마도 아빠랑 싸우면 친정에 다녀오겠다며 외출하시거든. 말이 외출이지 말없이 나가 버리니 가출이나 다름없어.”

“그런가.”

“그런데 어차피 수녀님이랑 동생들은 수도에 있지 않아? 분명 같이 데려갔다고 들었는데.”

“……응, 다들 수도에 잘 있어. 나만 잠시 홀로 나왔지.”

대충 얼버무린 거짓말에 로사가 눈을 반짝 빛내었다.

“가출은 부부 싸움의 최후의 단계지. 거기서 서로 화해하면 다시 부부가 되고, 마음이 틀어지면 남이 되는 거니까. 그래서 에블린, 너는 뭣 때문에 싸웠어? 귀족 도련님이 막 함부로 대하고 그랬어?”

궁금증이 가득 담긴 질문에 에블린은 고개를 저었다.

“다정했어. 아주, 아주 많이.”

너무 다정해서 그 달콤함을 놓치고 싶지 않아 어리석은 짓을 반복할 정도로 감미로웠다.

“꺄아, 뭐야. 남편이 잘생기고 돈도 많고, 또 다정히 잘 대해 줬다고. 어머, 어머.”

로사는 이럴 때가 아니라며 안으로 들어가서 이야기하자며 팔짱을 낀 채 놓아주지 않고 걷기 시작했다.

“어, 어?”

대충 대화를 마치고 수도원에 찾아가 볼 생각이었기에 에블린이 당황함을 숨기지 못하고 산 쪽으로 자꾸만 시선을 던졌다.

“표정이 너무 안 좋아 보여. 다들 반가워할 테니 오래간만에 마을 사람들이랑 편히 이야기도 하면서 스트레스 좀 떨쳐내!”

메말라 버린 감정을 읽기라도 한 듯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에 에블린은 끌려가면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해가 하늘 높이 떠 있었다.

‘아무래도 대낮부터 죽는 건 조금 눈에 띄겠지.’

어차피 목적지와는 가까우니 잠깐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결혼식 이야기부터 신혼 이야기까지 모두 다 얘기해 줘야 해? 대신 차는 내가 살 테니까!”

신이 난 로사의 모습에 에블린은 미미하게 웃었다.

그저 마을에 도착한 것만으로도 마치 예전의 그때로 돌아온 것 같았다.

‘아니, 하지만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걸.’

모두가 돌아가도 에블린만은 돌아갈 수 없을 것이다.

마을 안으로 들어가자 이제 막 점심시간을 넘겨서인지 활동하는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세상에! 이게 누구야, 에블린 아니니?”

“어머나, 어머나! 머리가 그게 뭐야? 염색한 거야? 너무 예쁘다.”

“오랜만이네, 시집가서 잘살고 있니?”

갑자기 에블린을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고, 사람들은 이럴 게 아니라며 통행을 방해하지 말고 자리를 옮기자고 했다.

졸지에 대여섯 명을 끼고 찻집에 앉게 된 에블린은 혼란스러웠다.

‘갑자기 이게 뭐지?’

결혼한 여성과 미혼의 여성이 고루고루 섞인 집단은 에블린을 향해 궁금한 질문들을 던져 댔다.

“그래서 남편은 어떤 사람이라니? 귀족들은 어떨지 너무 궁금하다.”

한 미혼 여성의 질문에 에블린은 조금 고민하다가 솔직한 제 느낌을 말했다.

“뭘 하려고 하면 절차가 많고, 복잡하고, 되게 귀찮아요.”

“귀찮대!”

누군가 꺄르르 웃음을 터트리자 사람들은 다 함께 웃기 시작했다.

‘뭐가 재미있는 거지?’

그들의 웃음을 따라갈 수 없는 에블린은 멍하니 있었다.

“그런데 남편은 어디에다 두고 혼자 이렇게 왔니?”

“싸워서 가출했대요!”

에블린이 말하기도 전에 로사가 대뜸 그녀 대신 답을 해 주었다.

“어머머, 귀족 부부도 싸우기는 하는구나. 사람 사는 것 다 똑같네.”

누군가의 말에 다시 모인 여인들 사이에 웃음이 번졌다.

“남편이 잘해 주니? 평민 출신이라고 무시하지는 않고?”

아무래도 작은 시골 마을이기에 수도에는 널리 퍼졌던 루이사 공작가에 대한 소문은 모를 수밖에 없었다.

에블린은 조금 고민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무시하지는 않았지. 다정한 모습을 계속 보였으니까.’

비록 그게 연기일지라도 체이서는 에블린에게 최선을 다하기는 하였다.

“부끄러워서 말 못 하나 보다. 아까는 엄청 다정하다고 그랬어요! 막 지금 입은 것처럼 비싼 드레스도 사 주고, 맛있는 레스토랑에도 가고 그래?”

로사의 질문에 에블린은 제 옷차림을 살펴보았다.

‘나름 수수한 옷이고, 먼지를 뒤집어써 더러운 옷인데 이것도 좋아 보이는구나.’

고작 1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체이서는 에블린의 인식을 온전히 뒤바꿔 버렸다.

이상하게 입맛이 써 에블린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꺄악, 너무 부럽다. 진짜 결혼 너무 잘했어, 에블린. 네가 결혼한다고 했을 때 남자애들이 꽤 울었던 거 알아? 널 책임질 자신은 없으면서 네가 결혼하러 떠났다는 소식을 듣더니 막 울먹이곤 했다니까?”

“맞아, 맞아. 하룻밤 사이에 수도원은 불탔지, 안에 있는 사람들은 이주했다고 하지. 마지막 배웅도 하지 못했다며 훌쩍였다니까.”

한 중년 부인의 말에 에블린은 궁금한 점을 물었다.

“수도원은 아직도 불탄 그대로 남아 있나요? 저는 그날 밤 아파서 정신없이 이동했거든요.”

“기사 나리들이 와서 화재 정리하고 갔다고는 들었는데 아마 폐허처럼 남아 있을 거야.”

본래 수도원의 정리는 신전에서 해야 하지만 이런 낡은 시골 마을의 수도원을 신경 쓰지는 않았기에 어찌 보면 폐허 행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가끔 찾아가던 사람들의 발길도 뚝 끊어졌다니까? 가끔 보면 좀 음산해. 꼭 누가 죽은 것처럼 말이야.”

“얘는! 거기서 살던 애 앞에서 왜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는 그래! 그래도 그 옆에…….”

투닥거리는 두 중년 부인을 보며 에블린은 괜찮다며 두 사람을 말렸다.

에블린의 중재에 두 여인의 대화는 멈추었다.

“참, 참 그럼 이제 에블린도 귀족인 거야? 나 귀족을 만나는 건 처음인데.”

대화를 나누다 뒤늦게 깨달은 로사가 물었고, 모두의 시선이 에블린에게 집중이 되었다.

“그러네. 에블린 너도 귀족인데 우리가 너무 스스럼없이 대했다.”

한 중년 부인의 말에 신나게 날뛰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뭐, 뭐라고 불러야 하려나.”

“이렇게 멋대로 이름을 부르면 귀족 불경죄겠지?”

어색해지려는 순간, 에블린은 고개를 내저었다.

“괜찮아요. 이제 이혼할 거라.”

“뭐어? 왜?”

에블린은 이 순간만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 맛있게 잘 마셨어, 로사. 그럼 먼저 일어날게. 가 봐야 할 곳이 있거든.”

갑작스럽게 던진 폭탄 발언에 모두가 깜짝 놀라며 더 설명해 주기를 원했지만, 그녀는 그런 시선을 모두 뒤로한 채 찻집을 나섰다.

예전에는 이런 평화로움을 바랐던 것도 같은데 죽음을 앞에 두고 있으니 다 부질없다는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지배했다.

‘날씨 좋네.’

밖을 나오니 별 대화를 나누지 않았는데 어느덧 해가 저물고 있었다.

기다렸던 시간이 도래했음에 에블린은 희게 웃었다.

드디어 목적을 달성할 시간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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