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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102)화 (102/159)

102화

마야의 말에 체이서는 신경질적인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체이서라고 더스틴을 찾아가 보지 않았을 리가.

그는 에블린의 부재를 알게 된 날 곧바로 그녀의 행적을 보고 받았다.

에블린이 저택을 나서기 전 별관에 들렀다는 사실에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그를 찾아가 보았지만 건질 수 있는 정보는 없었다.

더스틴은 금방이라도 소리를 지르며 화내고 싶은 얼굴을 하면서도 화를 꾹꾹 눌러 참고 있었다.

이야기해 줄 것이 없다며 고개를 돌리는 모습은 평소의 더스틴답지 않았으나 감옥에 다시 갇혔으니 서서히 제 처지를 깨닫는 것이라 생각하며 가볍게 넘겼었다.

“……별관에 들렀다 나오신 후에 표정이 조금 후련해 보이셨습니다.”

“후련하다고?”

“굉장히 밝게 웃고 계셨는데 행복해서 웃는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습니다. 마치 모든 짐을 내려놓은 것같이 후련하다는 쪽이 맞는 것 같았어요.”

“…….”

“어쩌면 선대 가주님과의 대화를 통해 무언가를 깨달으신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무래도 웃어른이시니 조언을 얻은 게 아닐까…….”

마야의 말은 끝까지 이어질 수 없었다.

그녀의 말을 듣다 말고 체이서가 결국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방을 나서 버렸기 때문이다.

체이서의 머릿속이 또다시 복잡해지고 말았다.

함께 루이사의 시험을 치렀고, 잃어버린 기억도 돌아왔으며, 더스틴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해 똑똑히 알고 있으면서 결국 그에게 의지했다는 것이 체이서에게는 큰 충격과 배신감으로 다가왔다.

‘결국은 친가족이라는 건가?’

그렇게 사랑에 빠진 얼굴로 저를 쳐다보며 애정을 갈구했으면서 결국에는 사랑하는 사람을 뒤로하고 친부모를 선택하겠다?

체이서의 머릿속으로 사이좋은 부녀의 모습이 스쳐 지나갔다.

울먹이는 에블린과 그런 그녀를 달래는 더스틴. 그는 이때다 싶어 아무도 모르는 은신처를 알려 주며 도망가 있으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혹은 체이서가 알지 못하는 연락 수단을 통해 가신들에게 에블린을 맡겼을지도.

‘누가 도와주고 있으려나.’

트렐로니 백작 사건 이후 가신들을 통제하는 데 성공했다고 생각했지만, 혹시 모를 모든 수를 고려해야 했다.

‘더스틴의 목적은 역시 권력이겠지.’

더스틴은 루이사의 세 형제를 극도로 증오하였고, 그들은 아직 저주에 걸려 있는 상태였다. 저주가 해주되지 않는 이상 능력을 맘껏 떨치지 못하는 불완전한 몸이나 다름없었다.

권력과 야망이 넘치는 더스틴이라면 자신의 친자식인 에블린을 가주로 세워 가주직에 물러난 지금에도 권력을 유지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에블린이라면 더스틴의 간사한 속삭임에 넘어가 친부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받아들였을 확률 또한 높았다.

절대로 사이가 좋아질 수 없는 사이라고 해도 피가 이어진 가족이라는 건 특별함을 띠고 있었다.

그러니 더스틴도 에블린을 그리 찾았던 것이고, 에블린 또한 자주 그를 찾아가 부녀의 정을 쌓았을지도 모른다.

‘바로 내 눈을 피해서 말이지.’

이 저택에서 제 눈을 피해 멋대로 일을 저지른 것이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인지, 혹은 모든 모습이 거짓임은 아니었을지 뒤통수가 얼얼하며 자꾸만 불쾌함이 높아져만 갔다.

‘그럴 이가 아닌데.’

이렇게 치미는 배신감 속에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에블린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이 못마땅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체이서는 어느덧 지하에 도착해 그 앞을 지키는 기사들을 모두 물렸다.

더스틴은 지난번 만남 때보다 더욱 초췌해진 낯으로 벽에 기대어 침대 위에 앉아 있다가 인기척에 깜짝 놀라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더스틴의 눈에 순간 반짝하고 빛이 일렁이다가 나타난 이가 체이서임을 확인함과 동시에 그의 눈에 실망감이 가득 찼다.

“무슨 일이냐.”

그는 대수롭지 않게 평소와 같이 목소리를 내리깔며 말했으나 체이서는 평소와 다른 미묘한 차이점을 느꼈다.

‘지난번부터 묘하게 차분하군.’

언제나 강압적으로 굴던 더스틴의 태도가 변했다.

‘꼭 눈치를 보는 것 같은 모습인데.’

자기 딴에는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을 텐데 길길이 날뛰어도 모자랄 판에 감옥 안에 얌전히 있는 모습은 수상했다.

애초에 눈치를 보는 것은 더스틴답지 않았다.

‘……혹시 에블린과 연락이 닿지 않는 건가? 혹은 처음부터 닿지 않았다든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체이서는 그제야 이상한 그의 모습을 제대로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자기 몸을 끔찍이도 아끼는 더스틴의 손은 엉망이었다.

손톱으로 긁어내린 듯 일자로 난 생채기에는 검붉은 핏물이 굳어 있었고, 어딘가에 부딪힌 것처럼 손등 주위로 푸르스름한 멍이 들어 있었다.

“이곳에 다시 온 걸 보니 네 부인을 아직 찾지 못한 모양이지?”

지난번의 방문 목적을 떠올렸는지 내뱉는 말에 체이서는 툭 가볍게 대답했다.

“소식통이 끊기긴 한 모양이야. 답지 않게 아는 게 전혀 없군.”

“뭐?”

“내 부인은 진작 저택으로 돌아왔다는 뜻이야.”

과연 이 거짓말에 어떠한 반응을 보일까. 체이서는 에블린을 향해 느꼈던 배신감과 복잡한 생각들을 잠시 접어 두고 이성을 유지한 채 유심히 더스틴을 지켜보았다.

“……돌아왔다고?”

그는 어떻게든 평정을 유지하려고 하는 듯싶었으나 분노로 파르르 떨리는 눈가까지는 막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나를 안 만나러 와?”

무심코 나오는 본심에 체이서는 놓치지 않고 물었다.

“내 부인이 왜 당신을 만나러 와야 하지?”

“그건……!”

더스틴은 욱하고 치밀어오르는 감정을 토해 내려는 모습에 체이서는 코웃음을 쳤다.

“당신이 가문의 웃어른이니 안부를 물어야 한다?”

“…….”

“아니면 에블린이 당신의 친딸이니 돌아왔으면 당연히 친부를 만나야 하나?”

“그걸 어떻게…….”

기절한 더스틴이 다시 깨어난 곳은 감옥이었기에 그는 체이서가 에블린의 정체를 알게 되었다는 정보를 접할 수가 없었다.

제 편 하나 없는 고립된 장소에서 이루어진 피폐한 삶은 결국 더스틴의 이성을 끊어 버리고 말았다.

“네 놈 알고 있었구나!”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이가 분노에 찬 얼굴로 체이서의 앞까지 뛰어왔다.

언젠가 마물이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감옥의 창살을 붙잡고서 으르렁거리는 모습을 체이서는 여유롭게 내려다보았다.

“네놈이 손을 쓴 게야. 그렇지 않고서 내 딸이 내게 이럴 리 없다!”

이성을 잃은 모습에 체이서는 빙긋 웃었다.

그가 예상한 최악의 시나리오와 달리 에블린의 탈출과 더스틴은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였다.

적어도 가신들이 얽혀 있지 않다면 에블린을 찾는 건 금방일 것이다.

씨근덕거리며 저를 노려보기만 하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더스틴에게 체이서는 비웃음을 아끼지 않았다.

“에블린이 나를 너무 사랑해서 벌인 일인데 그걸 내 탓을 하면 어떡하나.”

“너 같은 것 때문에 내 딸이 나를, 나를 버렸다고? 다른 누구도 아닌 내 딸이?”

자꾸만 자신의 딸임을 강조하는 모습은 에블린을 꼭 물건을 다루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보자마자 내 딸인 것을 알아봤는데! 어째서, 에블린!”

분노에 찬 모습에 체이서는 문득 한 가지를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에블린은 더스틴을 만난 뒤로 내게 마음을 다시 열었지.’

자신의 큰 부상으로 인해 사랑하는 마음을 깨닫게 했다 생각하였지만, 에블린의 마음을 움직인 건 죄책감이었다.

자신의 아버지인 더스틴 때문에 고통받는 체이서의 모습에서 느낀 죄책감. 

그녀의 탓이 아닌 것을 알면서도 그저 친부가 더스틴이라는 이유로 사랑이 아닌 죄책감이 그녀가 제일 먼저 품어야 할 감정이 되어 버린 것이다.

진심을 담아 고백한 것도 아니었건만 거절당한 기분인지라 꽤나 기분이 불쾌했다.

“네 딸이 아니라 내 부인이지.”

체이서의 정정에 더스틴은 다시금 달려들며 소리를 질렀다.

“저주가 풀렸다고 기고만장해졌구나, 체이서!”

“……뭐?”

더스틴은 체이서의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는지 그간 느꼈던 울분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나는 루이사의 가주다! 이제 막 능력을 깨친 애송이의 봉인 따위 오래 가지 않아! 곧 네 몸의 저주가 다시 깨어나 너를 괴롭히고 끝없는 고통으로 내몰 것이다!”

한계까지 다다른 인내심은 체이서가 묻지 않았음에도 그의 비밀을 모두 털어놓게 하였다.

뒤늦게 체이서의 놀란 표정을 확인한 더스틴이 무언가 이상함을 깨닫고 입을 닫았으나 이미 늦었다.

“하하.”

체이서는 차오르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는 입가를 가리지도 않은 채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조금 전까지 차오르던 불쾌한 기분은 놀랄 만큼 한숨에 증발해 버렸다.

‘이게 네가 말하는 사랑인가?’

에블린은 배신당한 상황에서도 떠나기 직전까지 저를 온전히 미워하지 못했다.

만약 그녀가 체이서를 증오하고 원망했다면 급박한 상황에서도 체이서를 괴롭히는 저주를 봉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뒤늦게서야 심장을 억죄던 불길한 기운이 사라졌다는 걸 깨달은 체이서는 오래간만에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건 단순한 죄책감만으로 행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죄책감 그 이상의 감정, 그래 사랑하지 않고서 불가능한 일이었다.

‘빌어먹게도 처음이나 지금이나 똑같은 여자야.’

어쩌면 그러한 모습이 다른 이들과 달리 빛나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던 건지도 모른다.

어릴 적에야 어차피 제 것이 될 수 없으니 놓아버린 빛이었으나 이제는 상황이 달라지지 않았나.

에블린이 제게 품은 감정 중 사랑이 우선이라면 이리 기특한 짓을 했으니 옆에 두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그래, 어차피 더스틴은 죽을 이인데 혈족이 무슨 상관일까.’

체이서는 길게 숨을 뱉고서는 후련하다는 듯 웃었다.

지난 며칠간 수도를 샅샅이 뒤졌지만 나오지 않는다면 그녀가 갈 장소는 단 한 곳이었다.

수도원, 에블린은 분명 그리로 향하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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