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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101)화 (101/159)

101화

어둠이 내려앉은 고요한 침실.

평소와 달리 재잘거리는 에블린이 없을 뿐인데 평생을 익숙하게 느껴 온 고요함이 낯설었다.

늦은 저녁 시간임에도 체이서는 불도 켜지 않은 채 서늘한 빈 침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밀리오 후작가에 마님의 행적을 물어보니 저택에서 함께 차를 마시고 마차를 타고 귀가하셨다고 합니다.’

사흘 전, 에블린이 아무런 말도 없이 공작저를 빠져나갔다는 소식에 블러드윈은 낭패한 얼굴을 숨기지 않았다.

‘누가 더스틴의 딸이 아니랄까 봐 제 신변에 해가 될 상황에서는 눈치가 빠르네.’

비겁한 모습이 똑같다며 비아냥거리던 블러드윈은 체이서에게 어서 추격대를 보내어 그녀를 잡아 와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냥 분노에 휩싸인 블러드윈과 달리 체이서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깨어나자마자 도망치듯 저택을 빠져나갔다는 소식은 그가 아는 에블린이라면 절대로 하지 않을 행동이기 때문이었다.

‘어차피 갈 곳도 없을 텐데 기다려 보지.’

에블린은 분명 데몬스의 폭주를 막으면서 잃어버린 기억을 전부 되찾았다.

작정하고 자신을 속인 것을 뒤늦게 깨달았으니 분명 극심한 배신감에 저를 찾아와 화를 낼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화는커녕 아무런 말도 없이 저택을 떠났다니?

갑자기 기억을 찾았으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체이서는 차분히 에블린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블러드윈은 못마땅함을 숨기지 못했지만, 체이서는 자신이 있었다.

에블린은 과거에도, 현재에도 자신의 곁을 떠나지 못했으니까.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결국엔 제 곁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그리 생각하였다.

그러나 자신만만했던 것과 다르게 사흘이 지났음에도 에블린은 돌아오지 않았다.

체이서는 차분한 듯 평소의 겉모습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그의 속은 그가 피워 내는 불꽃만큼이나 거세게 요동치고 있었다.

‘왜 돌아오지 않는 걸까.’

에블린의 행동반경이 모두 예상 범주 안에 들어 있다 자신하였는데 사흘이라는 시간은 그의 오만을 천천히 무너트리고 있었다.

‘겁에 질린 건가?’

들키고 싶지 않은 출생의 비밀을 모두에게 들켰으니 또다시 목숨을 위협받을 거란 생각에 도망을 쳤을지도 모른다.

자신 넘쳤던 며칠 전과 달리 지금의 체이서는 모든 기억을 찾은 현재의 에블린이 어떠한 행동을 할지 쉽사리 예상이 가지 않았다.

밀리오 후작가에서 보낸 서신에 의하면 두 사람은 함께 후작가로 들어갔고, 에블린만이 마차를 타고 나서는 것을 본 목격자들도 많았다.

그러나 그 마차가 공작저로 들어가는 것을 본 사람도, 그 후의 행적을 아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수도의 성문을 지키는 경비병들에게 물었으나 에블린으로 보이는 이는 본 적 없다고 단호히 답하더라.

‘그렇다면 수도 안에 숨어 있다는 건데. 설마 세자르에게 도움을 요청하러 간 건 아니겠지? 아니, 그럴 리가.’

진작 필베르타 공작저 근처로 사람을 보내 조사해 보았지만, 이미 세자르는 며칠 전에 수도를 떠난 상태였다.

데몬스의 폭주가 일어나기도 전에 그가 떠났으니 에블린과 모종의 협상을 진행하기에는 시기가 맞물리지 않았다.

‘차라리 밀리오 후작 영애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편이 더 빠르지.’

하지만 이성이 올바른 결론을 내려도 자꾸만 불쑥 치미는 이러한 가정은 자꾸만 체이서를 혼란스럽게 하였다.

‘혹시 세자르 외에 친분이 있는 남자가 있는 건 아니겠지?’

에블린의 외모는 아름답고 성격도 상냥하니 그 모습에 반한 사람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혹시 이 기회를 틈타 에블린에게 접근한 사람이 체이서의 눈을 가리고 있는 거라면?

쓸데없는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휘젓는 건 퍽 불쾌한 감각이었다.

“젠장.”

말도 안 되는 가정에 체이서는 결국 작게 욕설을 내뱉었다.

어차피 수도에서 체이서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귀족은 없을 테니 불안해할 필요도 없었다.

‘불안? 내가 불안하다고? 아니, 이건 불안이 아니라 불쾌함이다.’

비록 진심이 아니었다고 한들, 에블린에게 체이서는 자신에게 사랑을 고백한 남자였다.

그런데 그런 사람을 감쪽같이 속이고 사과도 없이 자취를 감춘다?

괘씸한 행동에 결국 아슬아슬 유지되던 체이서의 인내심은 한계에 달하고 말았다.

체이서는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별관으로 들어선 그는 더스틴이 있는 지하 대신 위층으로 올라가 오른쪽 복도의 가장 끝방으로 향했다.

앞을 지키는 기사들이 체이서의 등장에 두말하지 않고 문을 열자 방 안에 있던 마야가 고개를 숙였다.

“가주님을 뵙습니다.”

마야가 무릎을 꿇은 채 인사를 건네자 체이서는 익숙하게 그녀의 앞에 놓인 의자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현재 마야는 에블린의 도망에 협조한 혐의로 별관에서 홀로 근신을 받는 중이었다.

“하녀장은 꽤 현명한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

“지금 모습을 보니 아니었나 보군.”

다리를 꼰 채 오만하게 앉아 있는 체이서의 모습에 마야는 하녀장으로 임명이 되었을 때를 떠올렸다.

갑작스러운 더스틴의 감염화. 하필이면 마야의 선배들은 입이 가벼웠고, 공작저의 비밀을 밖으로 유출시킨 혐의로 모두 벌을 받고 저택에서 쫓겨났다.

아니, 주위에는 그렇게 쫓겨났다고 알려졌지만, 그들은 더스틴의 배 속에 던져졌다.

그녀들의 안일한 행동으로 인해 비밀을 듣게 된 가족들 또한 마찬가지였다.

체이서는 그 모습을 직접 본 마야에게 물었다.

‘지금 네가 무얼 봤는지 설명해 봐.’

‘아무것도 보지 못하였습니다.’

마야는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속에서 현명히 답하였다. 그에 체이서는 그녀에게 하녀장 자리를 위임해 주며 그녀를 살려 주었다.

아무런 감정도 싣지 않고 내려다보는 눈빛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끼쳐 가끔 그때의 악몽을 꾸기도 하였다.

그리고 체이서는 그때와 같은 얼굴로 마야를 향해 원하는 답을 내놓으라 명령하고 있었다.

“에블린은 어디로 갔지?”

“저는 모릅니다.”

지난번과 같은 대답에 체이서는 답답함에 이어 짜증이 몰려왔다.

“네가 모른다면 누가 알겠느냐. 다시 묻겠다. 에블린은 어디로 갔지?”

마야는 침묵으로 답을 하였다.

원하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 속에서 체이서는 속에서 차오르는 화를 차분히 눌러야 했다.

얼마 전 능력의 과부하로 인해 쓰러진 전적도 있으니 조심해야 함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에블린을 숨긴 이들을 모두 찾아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그녀의 행적에 대해 토해 내게 하고 싶은 생각이 자꾸만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가까스로 인내심을 유지하는 중,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마야가 결연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가주님께서는 왜 마님께서 불편한 몸을 이끌고서 저택을 빠져나갔는지 이유가 궁금하지는 않으신가요?”

“이유가 중요한가?”

지금은 이런 시시콜콜한 잡담을 할 때가 아니었다. 이유는 에블린을 찾아서 직접 물어보면 되었으니까.

“마님께서 그렇게 쓰러지신 후, 깨어나자마자 가주님과 대화를 하고 싶다며 불편한 몸을 이끌고 가주님께 찾아갔습니다.”

“……뭐?”

“그리고 가주님과 공자님의 대화를 들으셨고,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시다면서 제게 도와달라 부탁하셨어요.”

체이서는 그날의 일을 머릿속에 그려 보았다.

‘나한테는 솔직히 말해도 괜찮잖아. 그 여자를 사랑해서 못 놓는 것 아니야?’

‘……내가 그 여자를 옆에 두는 건 쓸모가 있어서야. 빈 공작 부인 자리를 채우기에 나쁘지 않았고, 능력의 과부하를 막아 줄 쓸 만한 이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단지 그뿐이야.’

적대시하는 블러드윈과 마찬가지인 자신이 떠올랐다.

제게 사랑을 속삭이던 연인이 그 사랑을 부정했다.

지금껏 자신의 기억을 지운 채 기만하던 모습까지 더해졌다면 과연 심약한 에블린이 버틸 수 있었을까?

“그래서 도망을 갔다고?”

“……이혼하고 싶지 않으시다고 하셨어요.”

분명 조금 전까지 화가 머리끝까지 차올랐었는데 마야의 말에 놀랄 만큼 그의 화가 빠르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주님께서 이혼을 원하신다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며 생각을 정리하고 싶다고 하셨고요.”

“이제 와 이런 말을 하는 이유는 뭐지?”

사흘 전에도 마야를 찾아왔지만, 그녀는 이 일에 대해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가주님께서 물어봐 주시길 기다리고 있었으니까요. 적어도 마님을 찾아 데려오고 싶으시다면 마님이 그렇게 행동한 이유를 여쭤보실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이는 제가 책임지고 가주님께 말씀을 올릴 테니 집사장에게도 말하라 하지 말라 부탁하였고요.”

마야는 씁쓸한 얼굴로 눈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이대로 가다간 영원히 묻지 않으실 것 같으셔서 말씀드렸습니다.”

진심이 담긴 발언에 체이서는 무어라 답하는 대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다면 수도 밖으로 나갔겠군.”

냉철한 하녀장은 짧은 기간에 제 주인에게 온전히 마음을 연 모양이다. 그렇다면 설득하기 더 쉬웠다.

“에블린을 나를 만나기 전까지 산속에서만 살았어. 그러니 홀로 여행한 적도 없고 세상 물정도 모르지. 사람 위험한 줄을 모르니 어디서 험한 일을 당할지도 모르겠군.

그에 마야의 두 눈이 두려움으로 잘게 흔들렸다.

동요하고 있는 모습에 체이서는 어서 답하라며 그녀를 종용했지만, 마야는 고개를 내저었다.

“정말로 모릅니다.”

원하던 대답이 아님에 인상을 쓰던 찰나.

“다만 떠나시기 전 선대 가주님을 만나 뵙고 가셨으니 그분을 찾아간다면 어쩌면 목적지를 알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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