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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100)화 (100/159)

100화

에블린은 제 머릿속에 가득 찬 복잡한 생각들을 모두 오려 내었다.

치밀어 올랐던 죄책감과 배신감, 두려움, 그리움, 그리고 사랑.

필요 없는 모든 것을 비워 내고 나니 남은 것이 없었다.

모든 것을 정리한 이 순간에서야 에블린은 목숨을 버릴 준비가 되었다.

‘그래도 어차피 버릴 목숨이라면 루이사답게 효율적으로 버려야겠지?’

자신에게 구원이 없다면 다른 이들이라도 구원해야 하지 않겠나.

그녀는 뒤따라온 두 하녀를 뒤로한 채 침실에 마련된 편지지에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마님, 분명히 가주님께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신 걸 거예요.”

“마, 맞아요. 분명 크게 다치신 모습을 보고 화가 나서 그런 말씀 하셨던 걸 거예요.”

마야와 로피는 어떻게든 에블린의 기분을 달래주기 위해 노력했지만, 그녀는 귀담아듣지 않고 묵묵히 편지만 써 내렸다.

그리고는 잠시 후, 그 편지를 봉투에 넣어 밀랍으로 잘 봉한 후 마야에게 건네며 말했다.

“라리사에게 보내는 편지야. 지금 당장 그녀가 받아 봤으면 하니 믿을 만한 사람을 보내렴.”

“예? 네, 알겠습니다.”

당황하던 마야는 편지를 그대로 로피에게 전달해 주고선 최대한 빠르게 전달해 주라고 명하였다.

로피가 방을 빠져나가고 둘만 남았을 때 에블린은 제 계획의 일부를 털어놓았다.

“공작저를 나갈 생각이야.”

“예? 하지만, 마님!”

“조금 전에 들었지? 체이서는 내게 단단히 화가 나 있고 내가 깨어나면 당장 쫓아낸다고 하잖아.”

“분명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신 거예요. 그러니 그런 마음 갖지 마시고…….”

“온전히 떠난다는 게 아니야. 그냥 잠시 여행을 떠나는 거야.”

이 저택을 나가기 위해서는 조력자가 필요했다. 그리고 하녀장인 마야야말로 도움을 주기 완벽한 존재였다.

“나는 혼자서 이 수도도 빠져나갈 수 없겠지. 그래서 라리사에게 부탁을 좀 했어. 만약 라리사가 내 부탁을 들어줄 생각이라면 분명 곧 마차를 끌고 찾아올 거야. 잠시 그녀와 함께 있을 테니 너무 걱정하지 말고.”

결국 참다못한 마야의 눈가에 눈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흑, 흐윽. 가여운 우리 마님. 어째서 아무 잘못 없는 마님께서 이런 가혹한 시련이…….”

“나는 아직 이혼하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그래도 해야 한다면 나는 이 여행으로 마음을 정리하고 올까 해.”

마음에도 없는 변명을 담으며 에블린은 작게 미소를 지었다.

“내가 이 저택의 공작 부인으로서 하는 마지막 부탁인데 들어주지 않겠어?”

“……짐을, 당장 짐을 쌀게요.”

“아니야, 짐은 필요 없어. 그냥 아무것도 안 가지고 나가고 싶어. 애초에 이곳에 내 것은 아무것도 없잖니? 아, 체이서에게는 내가 너와 로피를 협박했다고 말하도록 해. 괜히 내 부탁을 들어줬다 말해 큰 벌을 받지 말고. 알겠지?”

결국 마지막 말에 마야는 참던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괜찮아, 모두 잘될 거야.”

그래, 잘될 것이다.

어차피 시간을 돌리고 나면 애초에 이 또한 없던 일이 될 테니까.

에블린은 제 손가락에 껴 있는 가주의 반지를 매만지며 웃었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배웅하겠다는 마야의 제안을 거절하고서 정문으로 향했다.

아니, 향하려고 했다.

그녀는 정문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그대로 돌려 별관으로 향했다.

폭주가 있었던 탓인지 별관은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음에도 그 앞을 지키는 이들이 있었다.

“마, 마님?”

별관을 지키던 기사들은 에블린을 발견하고서 화들짝 놀랐고, 걱정이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쓰러지셨다 들었는데 몸은 좀 괜찮으십니까?”

“괜찮네.”

엉망이 된 별관 앞을 기사들이 여전히 지키고 있다. 즉, 더스틴은 여전히 이 별관에 갇혀 있는 게 분명했다.

“나는 괜찮은데 아버님이 걱정되더군. 잠시 살펴만 보고 갈 생각으로 왔다네.”

기사들은 망설였으나 금방 나오겠다는 에블린의 단호한 명령에 어쩔 수 없이 문을 열어 주었다.

데몬스의 폭주를 일으킨 주범인 더스틴은 다시 감옥으로 이동되어 있었다. 마물화의 위험도 있었기에 이러한 조치는 당연한 결과였다.

에블린은 이제는 환하게 불이 밝혀진 지하의 복도를 걸으며 마찬가지로 감옥 앞을 지키는 기사들에게도 명령하여 그 안으로 들어갔다.

“에블린!”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창살 안에서 그녀를 부르는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째서 이제 왔느냐!”

“…….”

“응? 어째서 이제야 왔어! 아니, 아니다. 아비를 안 잊고 찾아와 주었으니 얼마나 기특해. 이 아비를 꺼내 주러 온 게지? 그래, 능력도 발현하였으니 이제 네가 가주가 될 일만 남았다. 자, 어서 나를 꺼내 주거라!”

더스틴은 마치 에블린이 그를 구하러 온 구원자라도 된 듯이 애걸하며 매달리기 시작했다.

“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아? 응? 에블린!”

하지만 에블린이 어떠한 대꾸도 하지 않고 메마른 표정으로 가만히 응시만 하고 있으니 인내심이 달았는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내 말에 당장 대답하지 못해!”

조금의 인내심조차 참지 못하고 언성을 높이는 모습에 에블린은 결국 참던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제가 왜 아버님의 딸일까요? 저번부터 자꾸 이상한 소리를 하시니 정말 걱정이 되네요.”

이 모든 사태의 원흉, 에블린은 더스틴이 자신과 같이 절망하기를 원했다.

“……에블린!”

에블린은 언제 비웃었냐는 듯 환히 웃으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 속삭였다.

“애초에 제가 반지를 목표로 친밀히 대했다는 것 정도는 눈치채셨잖아요? 그럼 제가 반지를 얻었으니 이리 변할 것도 눈치채셨어야죠.”

그에게만 들릴 정도로 소곤거리는 말에 곧 더스틴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네가 반지를 얻게 된 것도, 능력을 가지고 태어난 것도 모두 다 내가 너를 낳고자 계획했기 때문이다.”

으르렁거리는 목소리에 에블린은 잘 알고 있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잘 아는 것과 별개로 효도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네요.”

에블린은 창살을 붙잡은 더스틴의 거친 손 위에 제 손을 얹었다.

“제 능력은 다른 이능력자들의 능력을 진정시키는 힘을 가지고 있어요. 제가 무력화까지는 시키기 어렵겠지만 봉인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더라고요.”

“뭐?”

더스틴의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상황을 파악하고서 손을 빼내려고 했지만 이미 늦어버렸으니.

에블린은 더스틴의 몸속에서 흐르는 특이한 기운을 모조리 압살시키겠다는 듯 짓누르기 시작했다.

더스틴이 손을 떼어 내려고 발버둥쳐도 그의 손등을 할퀴며 억지로 붙잡는 한이 있더라도 끝끝내 그의 기운을 전부 억눌러 버렸다.

“이, 이년이!”

에블린은 등줄기에 흐르는 식은땀을 모른 척하며 약올리 듯 밝게 웃었다.

“이대로 세 형제에게 건 저주도 모두 말짱 도루묵이 되었네요.”

“에블린!!!”

감옥이 울릴 정도의 엄청난 노성에도 에블린은 끄떡하지도 않고 그대로 등을 돌렸다.

문 앞에 선 기사들은 더스틴의 난동에 당황한 듯싶었고, 에블린은 안타깝다는 듯 눈을 내리깔며 말했다.

“아무래도 아버님께서 상태가 많이 좋지 않으신 것 같구나. 정신이 오락가락하시는지 자꾸 내게 딸이라고 하시네. 아무래도 당분간 이곳에 계시는 게 맞는 것 같아.”

그에 기사들은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고, 에블린은 그대로 별관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착한 척도 적당히 해야 하는데.’

더스틴의 불행을 목적으로 행한 일이었으나 이건 세 형제에 대한 제 죄책감을 덜어 내는 마지막 이기적인 행동이기도 했다.

에블린은 마음속으로 스스로를 욕하고선 정문으로 향했다.

정문 앞에는 밀리오 후작가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가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야가 불안한 얼굴로 그 앞에 서 있었다.

“마님, 이건 별건 아니지만 급히 필요하실 때 쓰라고 조금 챙겼습니다.”

마야는 작은 주머니를 하나 꺼내어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괜찮아, 이런 것 없어도 돼.”

“아니에요. 기분전환 겸 나들이를 다녀오신다고 하셨지요? 저를 데려가지 않으신다면 여윳돈 정도는 챙겨 가셔야죠.”

“……고마워, 마야.”

“예, 가주님께는 마님께서 잠시 기분 전환 겸 나들이를 다녀오겠다고 이르고 외출하셨다 전하겠습니다.”

마야는 언젠가 에블린이 이곳에 돌아올 것을 대비할 생각인지 가출도 도망도 아닌 나들이라는 그럴싸한 변명을 붙여 주었다.

“꼭 다시 돌아오셔야 해요, 아셨죠? 제가 모시는 마님은 오로지 에블린 님뿐이니까요.”

“그래, 금방 돌아올게.”

에블린은 환히 웃으며 라리사가 기다리고 있던 마차에 올라탔다.

“꼭, 꼭 돌아오셔야 해요.”

마야의 애탄 바람에 에블린은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내 마차의 문은 닫혔고, 에블린은 저를 기다리고 있던 라리사의 건너편에 앉았다.

“맙소사, 에블린! 다쳤나요?”

에블린의 상태를 보고 기겁하는 라리사를 보며 에블린은 곧바로 본론에 들어갔다.

“갑작스러웠을 텐데 이렇게 나와 줘서 고마워요, 라리사.”

편지에는 평소와 달리 가벼운 인사말도 없이 본론만 적어 보내었다.

‘제가 라리사의 능력을 봉인시킬 방법을 알아요. 저를 수도 밖으로 나갈 수 있게 도와줘요.’

예의라고는 갖추지 않은 편지에도 라리사는 나와 주었다.

급박하게 보낸 에블린의 서신 때문인지 혹은 이능력의 부작용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일지도 모른다.

에블린은 굳이 사담을 이어 가는 대신 라리사의 손을 잡았고, 더스틴에게 했던 것처럼 그녀의 이능력을 아주 깊은 곳으로 봉인시켰다.

라리사는 저를 괴롭히던 고통이 사라진 것에 놀라움을 숨기지 않았고, 에블린은 그런 그녀에게 마야에게 했던 것처럼 작은 부탁을 하였다.

“잠시 수도 밖으로 여행을 다녀오고 싶어요. 사람들의 눈을 피해 몰래 다녀오고 싶은데 도움을 줄 사람이 라리사밖에 없었어요.”

솔직한 말에 라리사는 눈을 깜빡이다가 아직도 제 손을 붙잡고 있는 에블린의 손을 바라보았다.

“물론 거절해도 좋아요.”

어려운 부탁임을 알기에 에블린은 괜찮다며 말을 덧붙였지만, 라리사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에요, 도와드릴게요.”

라리사는 자세히 묻는 대신 에블린이 수도의 성문을 빠져나갈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헤어지기 직전, 라리사는 마야가 그랬던 것처럼 여행의 후를 기약했다.

“다녀와서 무슨 일인지 알려 줘야 해요?”

불안한 얼굴로 웃는 라리사를 보며 에블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수도 밖으로 향하는 마차의 문은 닫혔고, 에블린을 홀로 태운 마차는 그렇게 수도를 떠나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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