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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99)화 (99/159)

99화

체이서는 그리 말하고선 물러났다. 그러자 블러드윈이 에블린의 앞에 섰고, 무언가 알 수 없는 게 그녀의 몸을 타고 흘러오기 시작했다.

‘무슨 짓을 하는 거야?’

에블린의 시선에 블러드윈은 죄책감이 어린 표정으로 작게 사과했다.

‘모두 잊어.’

어린 블러드윈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어 온다.

‘너는 우리와 만난 적도 없고, 능력도 없어서 이 미로에서 혼자 조용히 지내다가 가까스로 탈출한 거야.’

세뇌라도 하는 듯 울리는 목소리에 머릿속이 백지가 되듯 지워져 간다.

‘우리와 함께 한 기억도 잊고, 이곳에서의 마지막 순간도 모두 잊어야 해.’

블러드윈의 등 뒤로 엉망이 된 몰골의 체이서가 화가 난 것처럼 표정을 잔뜩 찡그리고 있었다.

아니, 그는 조금 슬퍼 보였다.

가물가물 멀어지는 의식 사이로 어느새 가까이 다가온 체이서의 목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네가 능력을 사용할 때면 여름의 향기가 나. 나는 여름이 싫었지만, 너와 함께 있으면서 여름이 좋아졌어.’

‘설마 우는 거니?’

체이서는 결국 놓았던 에블린의 손을 다시 붙들었다. 곧 그녀의 손등 위로 따스한 물방울이 떨어졌다.

어쩌면 체이서는 생각보다 자신을 좋아하는 걸지도 몰랐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너의 향기를 영영 모르도록, 너조차도 모르도록 잊고 살아.’

체이서의 이기적인 바람이 블러드윈을 타고 에블린의 머릿속에 각인되기 시작했다.

“……시, 싫어. 나는 싫어. 너희랑 갈래.”

“……체이서, 에블린이 이렇게까지 말하는데 그냥 같이 가면 안 되는 거야?”

블러드윈이 이능력을 사용하려고 머뭇거렸으나 체이서는 단호히 말했다.

“너는 이 가문이랑 어울리지 않고 언제나 방해가 될 뿐이야. 그러니까…….”

체이서는 눈을 감더니 마지막으로 속삭였다.

“넌 평범하게 살아, 에블린.”

의식의 가라앉으며 시야가 다시 어둡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온전히 기억이 끊기기 전 마지막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 에블린.”

슬픔이 담긴 마지막 인사가.

***

에블린은 서서히 눈을 떴다.

강제로 지워진 기억을 떠올리고 처음 눈을 떴을 때는 마치 긴 꿈을 꾸고 깨어난 것만 같았다.

휘몰아치는 기억들과 감정들이 뒤죽박죽 섞여 버렸다.

에블린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를 위로해 주던 모습도 거짓, 더스틴 루이사의 마물 감염화에 대한 것도 거짓, 그리고 에블린의 이능력을 알고 있음에도 없다며 단호히 말하던 모습도 거짓.

몇 번이고 기억을 되돌려 줄 수 있었음에도 끝까지 에블린을 속인 것은 분명한 기만이었다.

하지만 마음 놓고 미워하고 싶어도 기억을 지우기 전 보였던 얼굴들이 자꾸만 눈앞에 아른거렸다.

‘기억을 지울 거면 차라리 못되게라도 굴지. 왜 자기들이 상처받은 사람들처럼 괴로워하냔 말이야.’

이렇게 되면 저를 기만한 행동을 마음 놓고 증오할 수도 없지 않은가.

배신감과 죄책감, 그리고 그들이 그런 결정을 내려야 했던 것에 대한 과거의 궁금증.

뒤엉킨 감정들은 올바른 선택으로 향하는 길을 방해하고 있었다.

‘나는 이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미로 속에 갇힌 그때나, 지금이나 혼자 결정하고 행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한심하기도 하지.’

어쩌면 이런 우유부단하고 어리석은 모습에 체이서는 에블린이 루이사에 어울리지 않는다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에블린은 자조적인 감정을 삼키며 무거운 몸을 힘겹게 일으키기 시작했다.

‘일단은……. 대화를 해 보는 게 좋겠지.’

에블린이 묻고 싶은 말이 많은 것처럼 그 또한 분명 그녀와의 대화할 시간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겨우 허리를 세우던 찰나 침실의 문이 조심스럽게 열렸다.

“헉, 마님! 깨어나셨군요!”

발소리를 죽이고 안으로 들어오던 로피가 에블린이 깨어난 것에 깜짝 놀라 빠르게 다가왔다.

“몸은 좀 괜찮으세요? 의사 말로는 가벼운 뇌진탕이라고 하기는 했는데 상처에서 피도 많이 흘러 가지고 얼마나 걱정되었는지 몰라요.”

머리뿐만이 아니라 온몸이 두드려 맞은 것같이 아팠다.

‘벽에 그리 세게 부딪혔으니 당연한가.’ 

에블린은 쓸데없는 소리를 하는 대신 몸을 일으켰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니?”

“하루가 꼬박 지났어요.”

“그래?”

에블린은 이 저택에서 유일하게 죄가 없는 한 사람을 떠올리며 씁쓸한 얼굴로 물었다. 

“데몬스 님은?”

“공자님께서는 이능력의 부작용으로 아직 의식을 못 차리셨어요. 의사의 말에 의하면 능력이 폭주했다는데 며칠은 깨어나기 어려우실 수도 있다고 하셨어요. 그래도 몸 상태는 나쁘지 않다고 하셨으니 금방 깨어나실 거예요!”

“그렇구나.”

그나마 안도할 수 있는 소식이었다.

“체이서를 만나러 가고 싶은데…….”

“가주님께서는 집무실에 계세요. 안색이 너무 안 좋으신데 침실에서 기다리시는 건 어떠실까요?”

“미안, 당장 만나고 싶어서. 부탁 좀 할게.”

에블린의 간절한 목소리에 로피는 안절부절못하더니 이내 그녀를 부축해 주기 시작했다.

다행히 로피의 도움을 받으니 천천히 속도를 내며 걸을 수가 있었다.

“고마워, 로피. 그 후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설명 좀 해 주겠니?”

“그럼요!”

로피는 책임감이 서린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곤 곧바로 입을 열었다.

데몬스가 폭주한 그 시간, 마침 블러드윈이 이르게 저택으로 돌아왔다가 별관이 흔들리는 것을 발견했고 사용인들을 제치고 급히 홀로 별관으로 향했다고 한다.

그리고 데몬스가 폭주 후 쓰러진 것과 그를 말리다 기절한 에블린, 마찬가지로 그에 휩쓸려 다친 더스틴을 발견하였고 빠르게 그들을 옮겨 조치를 취했다고 한다.

“그 외 특별한 건 없었고?”

“사실 공자님께서 마님을 예전 침실로 옮기라고 하셨어요. 의아했지만 우선 명령에 따라 그곳으로 모셨는데 후에 보고받은 가주님께서 직접 마님을 다시 부부 침실로 옮기셨어요. 그 후로 두 분이 말다툼을 조금 하셨고요.”

분위기가 많이 안 좋았다는 말에 에블린은 블러드윈이 체이서에게 그녀의 태생의 비밀에 대해 말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블러드윈이 일부러 나를 다른 방에 넣어 놨는데 체이서가 그의 의견을 무시하고 옮긴 건가?’

블러드윈은 에블린의 태생에 분노하고 있음이 분명했고, 아직 이에 대한 체이서의 생각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이 모든 건 대화를 하면 분명히 알 수 있을 것이다. 에블린은 그리 생각하며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몸을 옮겼다.

어느덧 응접실이 가까워져 갔다.

그러자 마치 겁먹은 것처럼 심장이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막상 대화를 하기 위해 찾아왔다지만 만약 그가 자신을 반기지 않는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대화를 하고 싶다는 것도 자신의 이기적인 마음은 아니었을지 마지막 발걸음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어떤 말을 할지 조금의 예상도 가지 않아서 인지 조금 무섭네.’

마침 응접실 앞에는 집사와 마야가 함께 그 앞을 지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에블린을 발견하고 깜짝 놀란 듯 목소리를 높여 인사를 하려다 그녀가 입가에 검지를 가져다 대는 것에 눈치껏 입을 다물었다.

“체이서는 안에 있니?”

“예, 그런데 지금은 둘째 공자님과 이야기 중이셔서…….”

그 순간 갑자기 안에서 무언가를 내리치듯 쾅, 하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응접실의 문이 제대로 닫히지 않았었는지 그 충격에 약간의 틈새가 생길 정도로 문이 열렸다.

“도대체 왜 그 여자한테 그리 지극정성인 건데! 정말로 그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하기라도 한다는 거야?”

블러드윈의 분이 가득한 목소리에 에블린을 제외한 세 사람이 동시에 숨을 들이켰다.

이렇게 문밖에서 인기척을 내도 못 느낄 정도로 두 사람은 감정적으로 크게 흥분한 상태인 것 같았다.

에블린은 차분히 그들의 대화를 듣기 시작했다.

“내가? 미쳤나?”

이어진 체이서의 대답에 세 사람이 그녀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나한테는 솔직히 말해도 괜찮잖아. 그 여자를 사랑해서 못 놓는 것 아니야?”

“……내가 그 여자를 옆에 두는 건 쓸모가 있어서야. 빈 공작 부인 자리를 채우기에 나쁘지 않았고, 능력의 과부하를 막아 줄 쓸 만한 이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니까. 단지 그뿐이야.”

우습게도 이렇게 대화를 엿듣는 이 중에서 가장 담담한 것은 당사자인 에블린이었다.

‘어쩌면 이렇게 될 걸 알고 있었나 봐.’

감정에 매달리기도 이제 지쳤는지 분노할 힘도 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언제까지 그 여자를 침실에 둘 생각인데?”

“일어나면 치울 생각이니까 그만해. 내가 알아서 할 부분이야.”

루이사에서 자라 왔던 체이서에게 에블린은 소중한 사람이 될 수 없었다.

그저 효율성 좋은 물건, 그 이상 그 이하도 될 수 없었다. 그렇기에 체이서는 이리도 쉽게 에블린을 버린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끝까지 미련을 가지고 체이서를 만나러 온 에블린과 다르게.

맹세하라며 소리 지르는 블러드윈의 목소리를 뒤로한 채 에블린은 발걸음을 돌렸다.

마야와 로피가 다급히 뒤따라오기 시작했지만, 에블린은 멈추지 않고선 제가 깨어났던 침실로 향했다.

‘어차피 엉망진창 엉킨 관계야. 풀리는 것도 불가능하고 정작 당사자들도 풀 생각이 없으니 이 이상 시간을 끄는 건 무의미한 일이겠지.’

애초에 고작 2주도 안 되는 시간을 함께 보냈을 뿐이지 않나. 그때의 기억으로 인생을 망친 원수를 품에 끌어안기에 두 사람은 너무도 멀리 와 버렸다.

‘내가 깨어났다는 걸 알면 이번에는 감옥으로 끌고 가려나? 아니면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이려나?’

혹은 제 능력을 이용하기 위해 어딘가에 가두어두고 필요할 때만 찾을지도 모른다.

에블린은 저도 모르게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이렇게 살아가기 위해 아등바등 살아온 게 아닌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이제는 어디서부터 잘못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에블린은 이제 더는 아무런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저 이 번뇌 속에서 해방되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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