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화
블러드윈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미로 위쪽에서 목소리가 널리 퍼지기 시작했다.
[마지막 시험을 시작한다. 조금 전 미로의 유일한 출구가 북쪽에서 열렸다. 출구가 열려 있는 시간은 총 여섯 시간, 여섯 시간이 지나면 출구는 닫히고 너희는 그곳에서 영원히 닫히게 된다.]
아직 약조한 14일에서 사흘이라는 시간이 남아 있었기에 당황스러운 공지일 수밖에 없었다.
[미로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함구되니 어떤 일이 일어나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 선착순은 단 세 명, 그럼 무운을 빌지.]
세 사람은 서로 시선을 마주했다.
그리고 첫날 받은 나침반을 꺼내어 현재 위치를 확인해 보았다.
현재 위치는 남쪽, 미로의 북쪽이라면 정반대였다.
세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망설이지 않고 나침반이 북쪽을 가리키는 방향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세 사람은 쉬지도 못하고 길을 찾으며 달렸다.
한참을 달렸을까.
나름 미로를 잘 찾아가고 있다고 생각한 순간 예기치 못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다.
웅성거리는 목소리와 여러 명의 인기척.
세 사람을 제외한 나머지 다섯 명의 생존자가 무리를 이끌어 그들 앞에 나타났다.
“뭐야, 어떻게 이렇게 빨리 쫓아왔지?”
“다른 무리 중에 위치 추적하는 능력이 있다는 걸 몰래 들은 적이 있었는데……. 아무래도 탈출 직전이 되니까 서로 연합했나 봐.”
남아 있는 아이들은 다섯 명뿐인 걸 보니 아무래도 오는 길에 함정에 빠지거나 남아 있는 마물에게 죽은 모양이었다.
‘그럼 현 생존자는 총 여덟 명이고…….’
무리에서 공격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이는 체이서뿐이었고, 블러드윈은 능력의 조절을 어려워하는 중이었다.
에블린은 이제 갓 능력을 깨우쳤기에 이들의 능력을 막을 것에 자신이 없었다.
‘마물을 무찌른 지 시간이 꽤 지났다지만 그 후로 계속 달리기만 해서 분명 체력도 떨어졌을 텐데.’
아이들은 무리를 나누어서 앞과 뒤를 포위하여 세 사람의 도주로를 모두 막아 버렸다.
“이런다고 너희가 루이사가 될 수 있는 건 아닐 텐데.”
체이서의 낮은 경고에 그를 공격하고 몇 번 데어 본 아이들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그리고 우리를 막는다고 쳐도 너희 중 세 명은 누가 될 건데?”
에블린의 물음에 다른 아이들은 진지한 얼굴로 답하였다.
“그건 너희를 모두 죽이고 나서 생각할 거야.”
죽이겠다고 말하는 아이들의 눈에는 증오가 서려 있었다.
많아 봤자 고작 10대 초반의 아이들의 눈에 서린 살기에 지독히도 살벌했다.
그래도 첫날에 만났을 때 이 정도로 날카로운 아이들이 아니었는데 루이사에서 몰아붙인 극단적인 상황은 아이들을 망가트리고 말았다.
아무래도 옆에서 다른 아이들이 죽는 걸 직접 목격하였으니 저러한 반응을 보이는 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에블린은 진심으로 이 가문이 싫어졌다.
“루이사는 최악이야…….”
가만히 에블린의 말을 듣던 블러드윈이 한숨을 내쉬고선 그녀를 등 뒤로 내보냈다.
“왜? 또 우리한테 최면이라도 걸려고? 기억을 읽을 줄 안다더니 우리를 속여? 그거 어차피 눈만 안 마주치면 되는 것 아니야?”
눈을 마주치지 않았지만 무리의 아이들에 떠밀려 함께 도망쳤던 아이가 코웃음을 쳤다.
능력의 허점을 들킨 블러드윈이 이를 갈며 앞으로 나서려던 때, 그를 막고 체이서가 두 사람의 앞에 섰다.
“말이 길어. 덤빌 거면 그냥 한꺼번에 덤벼.”
“체이서!”
갑작스러운 도발에 에블린과 블러드윈이 당황하여 그를 막으려 했으나 아이들이 덤벼드는 것이 더 빨랐다.
“젠장!”
블러드윈은 갑작스러운 대치에 당황하다가 머리를 거칠게 털더니 짜증을 내며 싸움의 중심에 끼어들었다.
졸지에 홀로 남은 에블린은 어쩔 줄 몰라 하며 발을 동동 굴렀다.
버석버석한 돌밭에서 식물 줄기가 피어났다. 그리고 다른 쪽에서는 벼락이 내치기 시작했다.
감당할 수 없는 이능력의 싸움터에서 에블린은 에라 모르겠다 하는 심정으로 가장자리에 있는 아이들에게 달려들었다.
에블린은 멀찍이 서서 체이서에게 능력을 사용하는 아이들의 등을 떠밀었다.
물론 아이들의 능력이 잠잠해지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우왓, 뭐야!”
효과가 정말 있는 걸까?
순간적으로 아이들의 능력이 멈칫거리며 싸움의 맥이 뚝뚝 끊기기 시작했다.
넘어진 아이가 짜증을 내면서 일어나기 시작하자 에블린이 후다닥 멀리 도망쳤다.
영문도 모르고 넘어진 아이는 다시 능력을 쓰기 시작했고, 에블린은 기회를 틈틈이 보며 그들의 능력을 막으려 노력했다.
“야, 자꾸 얼쩡거리지 말고 꺼져!”
이쯤 되니 그들도 에블린의 능력을 눈치챘는지 그녀가 다가올라치면 멈칫거리며 피해서 더 이상 기습도 불가능해졌다.
‘애초에 이제 막 능력을 자각했으니 쉽지 않다는 건 알고 있지만…….’
멀리서 아이들과 대치하고 있는 체이서가 더는 가까이 다가오지 말라며 눈빛으로 경고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있다가 너희가 다치면 어떻게 하라고.’
체이서는 이미 지쳐 있었고, 블러드윈도 이리저리 도망치느라 정신없어 보였다.
어떻게 하면 저 둘을 도와 무사히 셋이서 탈출을 할 수 있을지 고민하는 찰나.
앞장서서 덤비던 아이가 살금살금 체이서의 뒤로 향하더니 달리기 시작했다. 에블린은 그 아이의 능력이 무엇인지 떠올리기도 전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직였다.
“죽어라!”
체이서와 가까워지기 시작하자 소년의 손에서 나타난 단검이 나타났고, 곧바로 체이서를 향해 달려갔다.
“안 돼!”
어째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모르겠다.
에블린은 체이서의 등을 막아섰고, 소년이 무작정 휘두른 검에 팔이 찔렸다.
“아악!”
끔찍한 고통에 소리 지르자 곧 제가 찌른 이가 체이서가 아니라는 걸 알아차린 소년이 분이 넘치는 얼굴을 하며 에블린을 거칠게 밀쳤다.
그리고 제 기습이 틀어지자 분노를 담아 그녀를 마구잡이로 걷어차기 시작했다.
에블린은 조금이라도 고통을 줄이기 위해 애벌레처럼 몸을 둥그렇게 말았다. 칼에 찔린 상처에서는 흐르는 피는 바닥에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그때 머리 위로 뜨거운 공기가 훅 지나갔다.
곧 따스한 손길이 에블린을 감싸 안았고, 그제야 그녀는 머리를 감싸던 팔을 풀고선 저를 안은 이를 확인하였다.
“체이서, 나 너무 아파.”
저를 구한 이가 체이서라는 사실에 안도하며 에블린은 상처에서 느껴지는 고통에 우는 소리를 내었다.
동시에 눈에서 후드득 하고 눈물이 떨어졌다.
“감히…….”
에블린은 후다닥 눈물을 닦아 내다가 주변의 공기가 이상해짐을 느꼈다.
“체이서?”
그리고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체이서의 눈에서 초점은 나가 있었고, 동공은 풀려 있었다.
주변의 접근을 막았던 불꽃들의 크기가 점점 커져 나갔다.
“체이서? 진정해 봐, 체이서!”
아무리 에블린이 체이서를 불러도 그는 그 목소리에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본능적으로 이 현상이 이능력의 폭주 증상인 걸 느낄 수가 있었다.
블러드윈 때와 비슷했으나 체이서는 그보다 강력한 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인지 심상치 않아 보였다.
이대로 폭주 상태에 들어가게 되면 체이서는 정말로 죽을지도 몰랐다.
그가 죽을지도 모른다 생각하니 우습게도 그간 함께 했던 시간이 머릿속으로 빠르게 지나갔다.
체이서는 분명 ‘루이사의 정원’의 악역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게임의 설정.
에블린이 마주한 체이서는 게임 속 악역에 걸맞게 냉정하고 차가운 존재였지만, 지금은 잠든 그녀의 옆을 지켜 주던 든든한 친구와 같은 존재였다.
친구, 어쩌면 제 가족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는 사람.
이전부터 그를 향해 열린 마음은 그가 죽기를 원치 않고 있었다.
‘하, 할 수 있어.’
블러드윈의 폭주를 막아냈던 것처럼 분명 체이서의 폭주 또한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에블린은 두 눈을 감고 그를 꽉 끌어안았다.
‘체이서의 폭주를 잠재우는 거야.’
능력을 쓰고자 마음먹으니 주변에서 날카롭게 춤을 추는 뜨거운 기운들이 느껴졌다.
이 날뛰는 기운이 부디 잠재워지기를 바라며 에블린은 간절히 바랐다.
그리고 몸에서 무언가 거대한 기운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영혼이 모조리 빠져나가는 것만 같은 충격에 머리가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주변의 뜨거운 기운이 서서히 잠재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코끝을 스치는 건 청량한 여름의 향기였다.
‘아, 애들이 말하던 향기가 이런 거구나.’
에블린은 처음으로 제 능력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혼절하고 말았다.
잠시 후, 의식이 돌아왔을 때 에블린은 누군가의 등에 업혀 있었다.
에블린이 뒤척이는 것을 느꼈는지 그녀를 업고 있던 블러드윈이 물었다.
“눈 떴어?”
아무래도 체이서를 막아내느라 힘을 다 쓴 모양인지 말을 꺼내고 싶어도 기운이 나지 않았다.
“체이서는 무사히 진정됐고, 다른 애들은 불꽃에 휘말려 모두 죽어 버렸어. 미로의 출구를 찾아서 조금 전에 탈출했고.”
어쩐지 주변의 풍경이 미로가 아니라 시험을 시작하기 전 머물렀던 공간과 비슷한 공간이었다.
‘다행이다.’
에블린이 힘없이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눈 앞에 펼쳐진 광경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들의 근처에 성인 남자들의 시체가 널려 있었다.
그것도 아주 끔찍한 모습으로 불탄 채.
“우리를 이곳에 가둔 시험관들이야. 죽인 시체는 스스로 치우라고 하니까 체이서가 저들도 죽이고 함께 치우겠다고 해서.”
잠시 후, 볼일을 모두 끝마쳤는지 체이서가 이쪽으로 다가왔다.
“에블린은?”
“조금 전에 일어났어.”
블러드윈의 말에 체이서가 다가와 에블린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의 다정함이 익숙하지 않아 옅게 웃는데 그의 옷소매 끝에 물든 핏자국을 보자 미소가 순식간에 지워졌다.
‘……피는 언제 봐도 익숙해지지 않아.’
에블린이 눈을 질끈 감자 체이서는 멈칫하더니 조심스럽게 에블린의 뺨에 손을 얹었다.
“에블린을 내려 줘, 블러드윈.”
“진짜 할 생각이야?”
‘무얼?’
체이서는 고개를 끄덕였고, 블러드윈은 미안함이 가득한 얼굴로 그녀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에블린이 어리둥절한 낯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조금 피곤한 낯이었지만 체이서는 멀쩡한 얼굴로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제 이 둘과 남매가 되는 건가.’
시험이 끝났다는 안도감에 웃는데 이상하게도 체이서도 블러드윈의 표정이 어두웠다.
에블린이 이상함을 느낀 순간, 체이서가 그녀의 손을 매만지더니 이내 미련 없이 내려놓으며 말했다.
“너는 이 가문과 어울리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