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화
물론 에블린은 포기하지 않았다.
체이서가 옆에 누군가를 두었다는 건 그녀에게도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뜻.
블러드윈의 이죽거림에도 에블린은 굴하지 않고 더욱 체이서의 곁에 얼쩡거렸다. 어찌 된 영문인지 블러드윈은 못마땅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둘 사이를 방해하지 않았다.
그런 그녀의 노력이 헛짓이 아니었는지 드디어 변화가 찾아왔다.
시험이 시작된 지 일주일째, 체이서가 잠에서 깨어나는 에블린을 기다려 준 뒤로 세 사람은 그 이후로부터 같이 다니게 된 것이다.
“난 네가 마음에 들어서 우리 옆에 있게 두는 게 아니야. 네가 있으면 체이서가 조금 더 편해하니까 그냥 두는 거지.”
가끔 참다못한 블러드윈이 한 소리를 했지만, 에블린은 익숙하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그 후로도 체이서는 혼자서 마물을 해치우러 다녔고, 그가 얻어 온 힌트를 블러드윈이 해석해 길 안내를 시작했으며, 에블린은 가만히 둘을 따라다니는 나름의 마스코트 같은 역할을 했다.
그렇게 평화롭게 탈출하나 싶었지만.
사건은 예기치 못하게 일어났다.
***
“야, 에블린. 너는 왜 무능력인데 여기에 끌려온 거야?”
체이서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마물과 싸우고 있었고, 에블린과 블러드윈이 사이좋게 몸을 구겨 앉아서 그가 마물을 무사히 해치우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체이서가 다칠까 봐 조마조마한 에블린과 다르게 블러드윈은 그가 알아서 해치울 것을 믿고 있는지 태평하게 질문을 던졌다.
“부모님이 팔아서.”
“부모님이? 왜?”
“돈에 눈이 멀었나 보지.”
“너 귀족 출신이라며? 돈 많지 않아?”
“바보야, 원래 귀족들이 돈 더 좋아해.”
“이게 누구보고 바보래?”
에블린이 귀찮다는 듯 손을 휘적이자 블러드윈이 발끈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때 갑자기 누군가가 벌떡 일어난 블러드윈의 등을 차 앞으로 넘어트렸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니 블러드윈이 속해 있던 무리의 아이들이 매서운 눈길로 두 사람을 노려보고 있었다.
“우리한테 쫓겨나서 어디 갔나 했더니 얘네랑 같이 다니고 있었냐?”
“어차피 능력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는 게 빌붙을 인간 찾아서 좋디?”
곱지 못한 말투, 금방이라도 싸우고 온 듯 엉망이 된 몰골.
미로에는 마물 말고 곳곳에 함정도 있었는데 가끔 운이 좋으면 그 안에서 출구를 향한 힌트가 나오고는 했다.
얼마 전에 함정에서 힌트를 찾았다더니 아무래도 다른 아이들과 시비가 붙어 싸운 모양이었다.
“좋은 말 할 때 지금까지 얻은 힌트 내놔!”
하필이면 체이서가 마물과 싸우고 있어 두 사람을 도와줄 수가 없었고, 이들은 그것을 노리고 온 것 같았다.
체이서가 있는 방향으로 비열하게 웃는 모습을 보면 확실했다.
“하, 이것들이 귀찮게 하네.”
보통이라면 곤란해야 할 블러드윈이 의기양양하게 일어났다.
“어디서 여유로운 척이야? 능력도 제대로 못 쓰는 게?”
무리의 아이들은 블러드윈의 말에 비웃었지만, 에블린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서는 움찔 떨었다.
“에블린, 저리 물러나 있어 봐.”
괜한 일에 휘말리고 싶지 않기에 에블린은 블러드윈의 말을 따라 멀리 떨어졌다.
체이서는 여전히 마물과 싸우고 있었는데 다행히 크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그럼 블러드윈을 지켜봐야지.’
혹시 블러드윈이 아이들에게 밀리면 몸싸움이라도 해서 그를 도와줄 생각이었다.
한참을 서로 마주 보며 대치하던 아이들이 먼저 달려들려는 순간, 블러드윈의 주위로 묵직한 무언가 꿈틀거리는 것만 같이 공기가 무겁게 느껴졌다.
“뭐야?”
금방이라도 달려들려던 아이들이 멍청한 표정으로 멈춰 서 있었다.
“아, 아직 어렵네.”
처음 아이들을 보며 기억을 읽을 줄 안다고 말했던 건 순 거짓말, 블러드윈은 사실 제 능력은 기억을 조작하는 능력이라며 최면을 걸 수 있게 능력을 갈고닦는 중이었다.
그는 아이들과 한 명 한 명씩 눈을 마주치더니 중얼거렸다.
“너희는 이제부터 나를 무서워한다, 무서워한다.”
꼭 술에라도 취한 것처럼 해롱해롱 돌아가는 눈동자에 에블린은 감탄하며 그 모습을 지켜봤다.
‘능력 조절 중이라더니 성공한 모양이네.’
아이들이 블러드윈의 말처럼 겁먹은 얼굴로 그를 보다가 이내 꽁지가 빠지게 도망치기 시작했다.
“축하해! 드디어 성공했네!”
에블린은 블러드윈의 훌륭한 성과를 칭찬해 주기 위해 다가갔지만, 그는 다급히 그녀를 향해 손을 뻗으며 막았다.
“자, 잠깐만. 나 지금 능력 조절이 안 돼! 그러니까 다가오지 마!”
“뭐?”
블러드윈은 에블린과 눈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서 체이서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고, 곧 뒤에서 이상한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체이서와 대치하고 있던 마물이 갑자기 멈춰서더니 블러드윈을 보고선 벌벌 떨기 시작했다.
체이서는 의아한 눈으로 이쪽과 마물을 번갈아 보다가 블러드윈의 찌푸려진 얼굴을 보며 대략의 상황을 짐작한 듯 망설임 없이 무방비해진 마물의 몸에 불을 붙였다.
화르륵 타오르는 불꽃을 보던 체이서는 검게 물든 손을 털어 내며 두 사람 쪽으로 다가왔다.
이능력이 강한 사람은 자신보다 약한 이능력자의 능력이 통하지 않는다.
과연 괜히 악역은 아닌지 마물과 다르게 체이서는 멀쩡했다.
아이들도 내쫓았고, 마물들도 무사히 물리쳤으니 이제 걱정거리는 블러드윈뿐이었다.
‘언제쯤 가라앉으려나.’
마물과 싸우다가 이능력이 폭주한 다른 무리 중 한 명의 최후를 본 적 있었는데 참으로 고통스럽게 죽더라.
‘어린아이 몸으로 이능력이 폭주하는 걸 견딜 수가 없는 거지.’
며칠 함께 시간을 보냈다고 정이라도 들었는지 블러드윈의 능력이 무섭다기보다는 걱정밖에 들지 않았다.
‘눈만 안 마주치면 되겠지?’
에블린은 안일한 생각을 하며 블러드윈에게 다가갔다.
“아, 오지 말라니까! 너 나 무서워하고 싶냐고!”
버럭 짜증을 내는 게 걱정해 준 보람이 없게 하는 모습이었다.
에블린은 괘씸한 블러드윈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하나도 안 무섭거든.”
“응? 뭐지?”
평소라면 다시 화내야 할 블러드윈이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에블린과 눈을 마주쳤다.
에블린이 아차 하며 눈을 피하려다가 아무렇지도 않자 피식 웃었다.
“능력 사용도 짧네. 폭주까지는 안 가서 다행이다.”
“무슨 소리야. 나 아직 능력 사용 중이야! 너, 너 나 안 무서워?”
“응, 안 무서운데?”
“……야, 나 한 대만 더 때려 봐!”
“뭐야, 싫어.”
“하, 한 대만! 빨리!”
너무나도 간절한 목소리에 에블린은 감정을 실어 다시 블러드윈의 머리를 쥐어박았다.
그 순간 블러드윈은 무언가 깨달은 듯 눈을 크게 뜨더니 갑자기 에블린의 손을 잡았다.
“너, 너!”
그러고서는 말문이 막힌 듯 말을 얼버무렸는데 이 멍청한 대치는 체이서가 두 사람을 억지로 떼어 놓고서야 끝이 났다.
“너랑 닿으니까 능력이 가라앉았어! 아무래도 이게 네 능력인가 봐!”
“뭐? 그럴 리가.”
“아니, 진짜야. 금방이라도 폭주할 듯 막 몸이 들끓는 느낌이었는데 네가 꿀밤을 때리자마자 그 기운이 가라앉기 시작했어.”
블러드윈은 마치 기적을 본 사람처럼 제가 겪은 일을 읊기 시작했다.
“착각인가 했더니 아니었다고! 다시 능력이 들끓으려고 해서 너보고 때리라 했더니 그러니까 정말 가라앉았어! 이능력을 무력화시키는 건가?”
블러드윈이 다시 잡아 보라며 제 손을 내밀었고, 에블린은 미심쩍어하며 그의 손을 붙잡았다.
“아니, 그보다는 진정시키는 것에 조금 더 가까운 것 같아. 능력을 좀 더 갈고닦으면 능력을 무력화시키거나 원하는 만큼 봉인도 가능하지 않을까?”
“이런 장난 재미없어.”
에블린은 믿기지 않는다며 고개를 내저었고, 블러드윈은 자기 말을 못 믿냐며 억울함에 제자리를 팔짝 뛰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나는 아무런 전조 증상이 없었는걸.”
“이런 능력이면 주변에 이능력자가 없는 이상 모를 수밖에 없지 않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이는 블러드윈이 질 나쁜 장난이 아니라 진심인 것 같았다.
“들었어, 체이서? 나도 능력이 있나 봐!”
에블린은 기쁜 표정을 지었고, 그는 못마땅한 얼굴로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건데?”
짜증이 서린 목소리에 블러드윈이 빠르게 손을 놓았다.
그러고 나서 에블린을 슬쩍 밀어 체이서의 곁으로 가게 했다.
“왜 체이서가 매번 여름 향기가 난다고 했는지 알 것 같아. 평소에는 몰랐는데 조금 전에 손을 잡을 때 그 향기가 나더라. 아마 능력을 쓰면 나타나는 현상인가 봐.”
“그런데 나는 왜 밀어?”
“체이서도 능력을 썼으니까 조금 진정시키라고.”
뻔뻔한 블러드윈의 말에 에블린은 어이없다는 듯 그를 노려봤다,
평상시에는 작작 붙어 있으라며 뭐라고 하더니 태세 전환이 정말 순식간이다.
‘그래도 도움이 된다니 버려질 일은 없겠다.’
체이서는 언젠가부터 에블린을 챙겨 주고 있었지만, 시험의 끝에서 죽이겠다고 한 말을 철회하지 않았기에 불안함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런데 능력이 있었고, 심지어 꽤 쓸모도 있는 능력이란다.
에블린은 신나는 얼굴로 체이서를 돌아봤다.
“내 능력 꽤 쓸 만한 것 같지 않아?”
“난 내 능력 충분히 조절할 줄 알아서 딱히.”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 생길 수 있잖아. 루이사가 돼도 꽤 쓸만하지 않겠어?”
“네가?”
비웃음이 서린 얼굴에 에블린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이런 체이서의 모습은 언제나 꼭 살겠다는 의지를 더욱 불태워 줄 뿐이었다.
“아무튼 이제 도움이 될 수 있다니 기쁘다.”
체이서는 에블린의 말을 무시하고선 블러드윈에게 힌트 쪽지를 건네주었다.
“어라?”
그런데 쪽지를 확인하는 블러드윈의 반응이 무언가 이상했다.
“왜 그래?”
지난번 쪽지에는 성인 남성 크기만 한 보라색 거미 마물을 해치우라고 되어 있어 기겁했었는데 설마 이보다 더한 것일까?
에블린을 조마조마한 눈으로 블러드윈의 입에서 나올 답을 기다렸다.
“……이 쪽지를 확인한 순간부터 딱 여섯 시간만 출구가 열린다고 쓰여 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