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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96)화 (96/159)

 96화

어두운 시야 너머로 누군가의 그림자가 일렁이더니 무언가 보이기 시작했다.

숲속의 큰 목조 저택 앞, 어린 날의 에블린은 트렐로니 백작의 손에 붙들려 그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갑작스럽게 깨달은 전생의 기억은 에블린을 혼란스럽게 하였지만, 닥친 것은 현실이었기에 계속 충격에 잠겨 있을 수는 없었다.

‘살아남아야 해.’

저택 안에서 만난 가면을 쓴 시험관의 말에 의하면 시험이 시작되기까지는 하루가 남았다.

에블린은 어떻게든 새로운 삶의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이제 겨우 전생을 기억해 냈는데 이렇게 허무하게 엑스트라로 남아서 죽고 싶지는 않아.’

첫 번째 삶에서의 죽음이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지나친 과로로 인해 피곤이 쌓인 몸을 이끌고 퇴근하다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던 허무한 삶.

이번 생은 그리 끝내고 싶지 않았기에 하루의 시간 동안 ‘루이사의 정원’에 대한 미약한 기억을 모두 끄집어내야 했다.

다음 날, 지하에 모인 아이들은 에블린을 포함하여 총 열 명이었다.

‘아, 일러스트에서 본 적 있던 애들이다.’

에블린의 시선은 어린 체이서와 블러드윈에게서 멈췄다. 

“저쪽으로 가서 서라.”

시험관의 말에 그녀는 조금 고민하다가 블러드윈의 옆으로 다가가 섰다.

에블린은 아무런 이능력이 없었기에 혼자 탈출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녀에게는 조력자가 필요했다.

‘제일 강한 건 체이서이기는 하지만…….’

그녀는 제일 앞줄에 서 있는 체이서의 뒤통수를 보다가 고개를 내저었다.

‘체이서는 악역 중의 악역이라서 안 돼. 우선 블러드윈을 내 편으로 만들어서 함께 탈출하자.’

에블린은 뒷일은 살아남고서 생각하기로 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녀의 시선을 느꼈는지 블러드윈이 고개를 돌리다 눈이 마주치니 게임 속에서 본 일러스트처럼 싱긋 웃었다.

‘확실히 성격이 좋아 보여.’

에블린이 다른 생각을 하는 사이 시험관 중 대표로 보이는 이가 나와 설명하기 시작했다.

“시험의 기간은 총 14일. 미로 곳곳에 마물이 존재하며 이능력을 이용해 마물을 무찌르거나 도망치지 않으면 죽는다. 마물을 죽이고 나면 탈출구에 대한 힌트가 나오며, 마지막 날에 출구가 열린다. 그때 출구를 통해 나오지 못하면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이 미로 속에서 죽음을 맞이하게 될 거야.”

그들은 약간의 음식과 응급 키트, 나침반을 나누어 준 뒤 아이들을 미로로 내몰았다.

“자, 살아남고 만나자꾸나.”

마지막 인사는 가소롭다는 비웃음이었다.

시험관들을 뒤로한 채 에블린이 마지막으로 미로에 들어섰을 때, 아이들은 서로 자기소개를 하고 있었다.

“내 이름은 젝시, 메마른 땅에서도 풀을 피워 낼 수가 있어. 이걸로 마을의 농작물의 풍작을 일으켰지.”

“나는 제이콥, 뭐든 폭발시킬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어. 폭발 범위는 차차 넓히는 중.”

아이들은 개인적으로 돌아다니는 대신 함께 하기로 마음먹은 듯했다.

‘이러면 계획이랑 틀어지는데.’

혼자 남은 블러드윈에게 다가가 친해지려고 했던 계획이 초장부터 어긋나 버렸다.

“나는 블러드윈, 상대방의 기억을 읽을 수가 있어. 아마 마물의 기억도 읽을 수 있을걸?”

마지막인 블러드윈까지 소개를 마치자 모여 있는 이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향했다.

에블린은 얼버무리다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아이들은 침묵의 뜻을 알아차렸는지 에블린을 제외하고 무리를 짓기 시작했고, 그 안에는 블러드윈도 함께였다.

‘시작부터 망했다.’

네 명씩 서로 의견을 맞춘 이들은 두 무리가 되어 흩어졌고, 에블린은 혼자 남은 제 처지에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 지금 당장은 블러드윈이랑 함께 움직이기는 무리일 것 같지.’

분명 그가 포함된 무리의 아이들은 에블린을 반기지 않을 것이다.

‘체이서는 무리에 들지 않았네.’

그렇다면 남은 마지막 동아줄은 체이서와 함께 다니는 것이겠지만.

“하……. 아무도 없네.”

애초에 체이서는 그들에게 관심이 없었기에 아이들이 무리도 짓기 전에 진작 사라진 지 오래였다.

에블린은 울고 싶은 감정을 참고선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아무리 악역이라지만 아직 어린애니까 충분히 교화가 가능할 거야. 어떻게든 체이서와 함께 다녀 보자.’

물론 이 계획은 미로 속에서 체이서와 재회를 하자마자 장렬히 실패하고 말았다.

***

체이서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에블린을 매정하게 거절했다.

“내가 굳이 짐 덩이를 끌고 다닐 이유가 있나?”

하지만 저를 무시하는 말투와 재수 없는 눈빛에도 에블린은 포기하지 않았다.

체이서는 에블린과 남매가 될 생각이 없으며 이곳에 있는 모두를 죽이고 유일한 루이사의 후계자가 될 거라고 하였다.

하지만 에블린은 포기할 수가 없었다.

‘나는 허무하게 이런 게임 속에서 죽기 싫단 말이야.’

에블린은 체이서의 마음에 드는 것만이 이 미로에서 살아나가는 유일한 방법임을 알고 있었기에 더욱 필사적일 수밖에 없었다.

마침 운이 좋게도 마물과 싸우고 지쳐 있는 체이서를 발견한 에블린은 당장 그곳으로 달려가 그의 곁에 앉았다.

“내가 몇 번이나 말했을 텐데. 나는 너랑 같이 다닐 생각이 없다고.”

“그래도 혼자보다는 낫지 않아?”

에블린이 헤실헤실 웃으며 익숙하게 제 옆에 앉자 체이서가 질린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등을 돌렸다.

“가까이 오지 마.”

“조금도 안 돼?”

“안 돼.”

“왜?”

체이서는 에블린을 없는 사람처럼 무시하던 초반과 다르게 닷새가 지나고 나니 포기한 듯 나름 성실하게 에블린의 물음에 답을 해 주었다.

“너한테서 여름의 냄새가 나. 그리고 난 여름을 싫어하고.”

“왜 싫어하는데?”

“여름은 내가 태어났던 계절이야. ……내가 왜 너한테 이런 것까지 이야기해야 하지?”

인내심의 한계에 달했는지 체이서는 짜증을 내며 일어났다.

“귀찮게 좀 하지 마.”

그리고선 자리를 박차고 떠나 버렸다.

“확실히 저번보다 몸의 회복이 빠른 것 같네.”

체이서는 에블린을 대하는 것뿐만 아니라 자신의 이능력을 사용하는 것에도 익숙해져 있었다.

덕분에 초반에 다른 무리의 괴롭힘을 받던 모습은 더는 볼 수 없었고, 미로 안의 마물들은 대부분 그의 손에 의해 죽었다.

수많은 힌트를 손에 얻은 덕인지 마음의 여유가 생긴 듯 에블린이 곁에 와도 예전보다는 덜 짜증을 내고는 했다.

‘이대로라면 체이서 손에 죽지 않고 같이 무사히 살아나갈지도?’

에블린은 체이서가 이 시험에 통과하여 게임 ‘루이사의 정원’ 속에서 악역이 되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모든 일이 당연한 일이라 여겨 몰랐다.

체이서의 독보적인 질주에 다른 후보자 아이들이 조급해진 것을.

“뭐야? 또 마물이 죽었어?”

오래간만에 듣는 다른 아이들의 목소리에 에블린은 벌떡 일어났다.

블러드윈이 속한 무리의 아이들이 잔뜩 짜증을 내며 미로의 구석진 곳으로 들어왔다.

그런데 그들 사이로 블러드윈이 보이지 않았다.

‘걔는 어디 간 거지?’

눈에 띄지 않은 채 몰래 빠져나가고 싶었지만, 하필 뒤쪽은 막힌 길이었다.

그들은 쓰러진 마물의 사체와 에블린을 번갈아 보더니 물었다.

“저 마물 네가 죽인 거야?”

“쟤는 아무런 능력도 없잖아. 또 그놈이겠지.”

그놈은 체이서를 뜻하는 말이었다.

“아직도 걔한테 빌붙으려고 노력 중이냐?”

“그래 봤자 걔는 주위에 아무런 관심도 없을 텐데?”

“또 힌트를 다 불태우고 떠났나 보네. 야, 너 아는 거 없어?”

살벌한 물음에 에블린은 고개를 내저었다.

힌트를 알면 정말 좋겠지만 에블린은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

매번 그녀가 도착할 때마다 체이서는 미련 없이 힌트가 적힌 종이를 불태우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짓말하지 말고.”

“진짜 아무것도 몰라. 애초에 알려 줄 애였으면 날 데리고 다녔겠지.”

아이들은 그도 그렇다며 쉽게 긍정했다.

“그럼 나는 이만…….”

“어딜 도망가?”

에블린은 몰래 빠져나가려고 했지만, 저를 붙잡는 애들에게 꼼짝없이 잡혀 버렸다.

긴 시간 동안 경쟁을 유도하는 상황 속에서 인내심이 바닥이 난 아이들은 분풀이하듯 에블린을 거칠게 구타했다.

한참 뒤, 속이 시원하다며 아이들이 자리를 떠나자 에블린은 아이들의 분풀이에 맞아 욱신거리는 몸을 일으키며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이해가 안 돼. 이런 비인간적인 시험을 하도록 게임을 만들었다는 게.’

연고는 체이서에게 다 줬으니 치료는 할 수 없었다. 상처가 아팠지만 그래도 에블린은 씩씩하게 자리에서 일어났고, 절뚝거리는 발로 구석진 미로를 나섰다.

그 후 다시 만난 체이서에게 어디서 맞았냐며 한심한 시선을 받기는 했지만, 저를 걱정하는 듯한 눈빛과 처음으로 직접 자신의 이름을 알려 주는 것에 소득이 없지만은 않다며 웃을 수 있었다.

***

그리고 하루가 지난 뒤, 에블린은 볼을 빵빵하게 부풀리며 어제의 생각을 철회했다.

“너무해.”

“뭐가?”

“나랑은 같이 안 다닌다더니…….”

무리에서 보이지 않던 블러드윈은 체이서의 곁에 있었다.

언제 친해졌는지 몰라도 사이좋게 붙어 다니는 모습에 에블린은 크게 충격을 받았다.

에블린은 이 미로에 들어와 처음으로 울고 싶어졌으나 체이서와 블러드윈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체이서는 에블린의 속상함을 무시하고 마물이나 찾아보겠다며 떠났고, 그녀는 블러드윈과 단둘이 남게 되었다.

“빈대짓도 적당히 하는 게 낫지 않아?”

그리고 블러드윈은 체이서가 떠나자마자 얄밉게 제 속마음을 표현했다.

아주 가감 없이, 재수 없게.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주제에 옆에 있으면 방해가 될 뿐이야. 더는 귀찮게 굴지 말고 꺼져.”

그때 에블린은 깨달았다.

블러드윈은 성격이 좋은 게 아니라 좋은 척하는 것이며, 분명 저 성격 때문에 무리에서 쫓겨났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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