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화
방 안의 모든 물건이 공중에 떠올라 바람에 휩쓸려 매섭게 날리고 있었다.
당황하여 굳은 고개를 억지로 움직여 주위를 보니 물건 정도로는 부족하다는 듯 별관 건물 전체가 흔들리고 있었다.
“그래, 차라리 이렇게 폭주하여 콱 죽어 버리거라! 너 같은 쓸모없는 놈은 그리 죽어야 해!”
급격히 커지는 바람의 움직임에 더스틴이 에블린의 어깨를 붙잡고선 제 곁으로 끌어당겼다.
‘폭주? 능력을 조절하기 어렵다는 건가? 그렇다면 능력 과부하로 저주가 발동될 텐데!’
더스틴은 그걸 노리고 있었는지 더욱 욕설을 내뱉으며 그를 부추기고 있었다.
“안 돼요, 데몬스! 정신 차려야 해요!”
하지만 에블린이 아무리 외치며 그를 불러도 이미 폭주 상태에 들어간 데몬스는 정상으로 돌아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가만히 있어라, 에블린. 이렇게 해서라도 한 놈을 제거하면 너도 편하고, 나도 편한 게 아니더냐!”
‘아, 한계야.’
에블린은 더는 이 끔찍한 사내를 상대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자신을 붙들고 있는 더스틴을 거칠게 밀어 넘어트렸다.
곧 중심을 잃고 넘어진 그가 데몬스의 이능력을 못 이기고 천천히 위로 떠 오르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짓이냐, 에블린! 내 지금 너를 위해서 이리 힘을 쓰고 있건만! 정신 차리지 못해? 가주가 되려면 이 아비에게 잘 보여야 하지 않겠느냐!”
“그딴 것 될 생각 따위 없어! 이 역겨운 자식아!”
거대한 바람 소리 사이로도 욕설이 충분히 전해졌는지 더스틴의 이마가 일그러졌다.
“그래도 되겠느냐? 반지가 내 손에 있는데?”
이 어리석은 늙은이는 아직도 제가 이 집안의 실세라도 되는 줄 아나 보다.
에블린은 금방이라도 떠오를 것만 같은 다리에 힘을 주고선 한쪽 입꼬리를 한껏 끌어 올렸다.
“아, 이거요?”
그녀는 보란 듯이 루이사 가주의 반지를 보여 주더니 제 손가락에 꼈다.
“고마워요, 덕분에 반지를 얻었네요!”
에블린은 경쾌한 웃음과 함께 기다렸다는 듯 반지의 크기가 그녀의 손가락에 맞춰 줄어들었고, 그 광경에 더스틴은 너무 놀라 눈만 깜빡이고 있었다.
조금 전 더스틴이 에블린을 보호하기 위해 그녀를 자신의 쪽으로 잡아 끌어당겼을 때 바로 그의 옆에 반지가 굴러다니고 있었다.
더스틴이 데몬스에게 정신이 팔린 사이 무사히 반지를 손에 넣은 덕분에 더는 그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다.
“쓰레기 같은 놈!”
에블린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데몬스를 향해 달려가기 시작했다.
폭주하는 힘이 넘칠 정도로 흐르자 데몬스가 고통을 참지 못하고 헐떡이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데몬스의 입가에서 울컥하고 피가 솟아올랐다.
‘이럴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허공을 떠다니는 물건들이 에블린을 공격하며 데몬스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을 막기 시작했다.
이러다 더스틴의 저주가 정말로 데몬스의 목숨을 앗아 갈 것 같아 덜컥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안 돼요, 제발 진정해요, 제발 진정하란 말이에요, 데몬스!”
다급히 데몬스를 불러 보았지만, 그의 눈은 공허했다.
에블린의 목소리는 닿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가서 부를 수밖에 없어.’
거센 장애물들의 반격에 입은 상처를 무시하고 에블린은 겨우 데몬스의 코앞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에블린은 부디 데몬스가 깨어나기를 바라며 간절함을 담아 그의 어깨를 붙들었다.
“데몬스! 이러다가 죽어요, 정말 죽는다고요. 그러니까 정신 차려야 해요.”
죄 없는 데몬스가 자신 때문에 죽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에블린은 눈물도 닦지 못하고 손을 내려 그대로 데몬스의 손을 소중하게 꼭 쥐어 잡았다.
“제발, 제발 죽지 말란 말이에요.”
눈물이 후드득 떨어짐과 동시에 순간 흐릿해진 시야 사이로 무언가가 비추었다.
아니, 느껴졌다.
그것은 환한 빛이었고, 밤하늘에 떠오른 별의 반짝임과도 같이 찬란했으며, 메마른 땅을 적셔 주는 단비와도 같은 힘이었다.
이 힘이 무엇이라고 확실하게 단정 지을 수는 없었지만, 에블린은 제 몸속에서 무언가 끓어 넘치기 시작했다는 걸 느꼈다.
그리고 이 힘을 끌어당긴다면 데몬스를 살릴 수 있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두려워할 필요 없어요, 데몬스. 저딴 멍청한 인간이 다시는 당신 앞에서 얼굴도 들지 못하게 할 테니까.”
텅 빈 데몬스의 눈이 에블린에게로 향했다.
순간이지만 그 안에서 빛을 본 것 같다고, 에블린은 감히 그런 생각을 하며 웃어 보았다.
거칠게 요동치던 건물의 움직임이 멈추기 시작하고, 높이 떠올랐던 물건들이 중력의 힘을 받아 아래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폭풍이 몰아친 것만 같이 방이 엉망이 되었지만, 에블린은 제 손을 꼭 붙잡은 데몬스의 모습에 안도할 수 있었다.
그는 마치 에블린의 마음을 다 이해한다는 듯한 편안한 얼굴로 그대로 잠이 들었다.
‘다행이야, 죽지 않았어.’
상황이 모두 끝나니 그제야 잊고 있던 고통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머리부터 시작하여 온몸이 두드려 맞은 것같이 아파 거친 숨을 내쉬는데 누군가가 그녀의 어깨를 거칠게 잡아채더니 그대로 끌어당겼다.
“해냈다, 해냈어! 그럼 그렇지. 내 딸이 능력자가 아닐 리가 없지!”
“으윽.”
일부러 다친 어깨를 붙잡은 손에 힘을 가하는 것이 절대로 그녀를 놓지 않겠다는 욕심이 담겨 있었다.
“네가 자격이 왜 없느냐, 응? 이리도 훌륭한데! 데몬스의 힘이 얼마나 강력한데. 폭주하는 그 힘을 막아냈으니 자랑스러워해도 좋다!”
“이것 놔…….”
고통에 앓는 소리에도 더스틴은 미친 사람처럼 낄낄 웃고 있었다.
에블린이 떨쳐 내려면 할수록 어깨를 붙잡은 손아귀에 힘만 더 들어갈 뿐이었다.
“이것 놓…….”
순간 눈앞의 사내가 여러 명으로 보이더니 시야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대로 기절하면 안 되는데.’
억지로 입술을 깨물며 버티려 해도 정신이 자꾸만 멀어진다.
한계라고 느낀 그 순간.
누군가가 더스틴을 거칠게 떼어 내어 벽으로 던졌고, 그를 대신하여 에블린의 어깨를 붙들었다.
“너 뭐야.”
익숙한 목소리에 에블린이 눈을 깜빡였다.
“너 뭐냐고!”
어깨가 흔들릴수록 입에서는 고통에 잠긴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럼에도 사내는 에블린의 고통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똑같은 말만 하며 답을 재촉할 뿐이었다.
‘아, 누군지 알겠다.’
경계가 가득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블러드윈이었다.
그를 인지하자마자 흔들리는 시야 너머로 그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혼란스러운 감정과 분노가 가득한 얼굴에 에블린은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모두 잊어.’
어린 소년의 목소리가 귓가를 파고들어 온다.
‘너는 우리와 만난 적도 없고, 능력도 없어서 이 미로에서 혼자 조용히 지내다가 가까스로 탈출한 거야.’
세뇌라도 하는 듯 울리는 목소리에 머릿속이 백지가 되듯 지워져 간다.
‘우리와 함께한 기억도 잊고, 이곳에서의 마지막 순간도 모두 잊어야 해.’
소년의 등 뒤로 언젠가 꿈속에서 보았던 또 다른 소년이 보였다.
그는 엉망이 된 몰골로 에블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화가 난 것처럼 표정을 잔뜩 찡그린 채.
‘모두 잊어버리는 거야.’
아니 슬퍼 보이는 건가?
몇 번이고 강조하는 목소리에 정신이 몽롱해지며 다시 시야가 흐려지다 또렷해짐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소년의 짧은 금발이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린다. 그와 동시에 소년이 점점 자라나더니 그녀의 어깨를 붙든 채, 제 질문에 답하라며 채근하고 있었다.
‘그때와 같은 금발의 짧은 곱슬머리네.’
루이사의 시험이 이루어지던 미로 안, 분명 에블린은 어린 블러드윈과 체이서를 만난 적이 있었다.
“네가 더스틴 저 개자식의 딸이야? 어서 대답해!”
“……다 들었잖아.”
“하……. 정말로? 지금 네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아? 진심이야? 이딴 장난 재미없어!”
기억이 어긋난 퍼즐처럼 제 자리에 제대로 맞추어지지 않는다.
어느 부분의 기억은 통째로 오려졌고, 또 어느 부분의 기억은 함께 있는 사람의 얼굴이 지워져 있다.
마치 누군가 일부러 기억을 파내 버린 것처럼 엉망진창이었다.
에블린은 제게 소리를 지르는 블러드윈을 보며 허탈한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저도 모르게 옅게 웃어 버렸다.
“웃어? 웃음이 나와? 형님이 너를 얼마나……!”
블러드윈이 분을 참지 못하고 소리쳤고, 에블린은 웃었다.
마치 미친 사람처럼 한참을 웃어 버리는 에블린을 보며 블러드윈이 주춤하는 사이 그녀가 웃음을 뚝 멈추었다. 그리고 얼굴로 무덤덤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
“너 내 기억을 조작했구나?”
“너…… 기억이 났어?”
당황이 서린 눈동자를 보며 에블린은 정말이지 이 상황이 우스워서 참을 수가 없었다.
“…….”
블러드윈의 눈동자가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벽에 머리가 부딪힌 탓에 정신을 잃은 더스틴, 능력의 과부하로 쓰러진 데몬스 그리고 금방이라도 기절하기 직전의 에블린.
이 방에서 멀쩡한 사람은 블러드윈뿐이었다.
그는 그 사실을 눈치챔과 동시에 붉은 눈에 힘을 실었다.
불완전한 기억의 조각에도 에블린은 그가 무슨 수작을 벌이려는지 눈치챌 수 있었다.
“또 내 기억을 조작하게?”
에블린은 피식 웃으며 눈을 감았다.
“눈을 감았는데 이제 어떻게 조작할래?”
블러드윈의 능력은 기억 조작, 상대방과의 눈을 마주쳐야만 가능한 이능력으로 이러한 특성 탓에 그의 능력은 주위에 잘 알려지지 않았다.
“어떻게 사람을 이렇게 깜빡 속일 수가 있니?”
오랫동안 몸속에 잠들어 있던 기운들이 들끓으며 몸 전체를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에블린은 자유자재로 흔들리는 기운을 느끼며 콧가에 스치는 청량한 여름의 냄새를 맡았다.
‘네가 능력을 사용할 때면 여름의 향기가 나. 나는 여름이 싫었지만, 너와 함께 있으면서 여름이 좋아졌어.’
블러드윈이 아닌 다른 소년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기억이 어긋나기 직전의 순간, 블러드윈에 뒤에 서 있던 체이서는 눈물이 고인 얼굴로 다가오더니 에블린을 끌어안았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너의 향기를 영영 모르도록, 너조차도 모르도록 잊고 살아.’
체이서의 이기적인 바람이 블러드윈을 타고 머릿속에 각인되기 시작했다.
“또 멋대로 내 머릿속을 뒤집어 놓았다간 가만두지 않을 거야.”
에블린은 눈을 감은 채 딱딱히 굳어 있는 블러드윈을 향해 낮게 경고했다.
검게 물든 시야 너머로 어린 체이서가 울며 인사를 건네었다.
‘안녕, 에블린.’
마지막 인사를 떠올리며 에블린은 까무룩 정신을 잃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