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화
“분명 부부가 아니라 남매가 되어 있을 텐데. 그럼 한 침대는커녕 서로를 불편해하고 있지 않았을까요?”
에블린은 일어나지 않은 과거를 상상해 보았다.
만약 그녀가 이능력을 가지고 있었고, 능력을 통해 루이사의 시험에 합격했더라면 과연 어땠을까.
에블린이 원치 않았음에도 더스틴의 계획에 따라 두 사람은 불편한 관계가 되어 사이가 틀어졌을 것이다.
혹은 친밀한 관계를 맺기도 전에 체이서와 블러드윈이 이른 나이에 목숨을 잃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자꾸만 쓸데없는 생각만 하게 되니 마음이 무거워져 에블린은 체이서의 품에 얼굴을 기대었다.
“그냥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시간이 멈추었으면 좋겠어요.”
“나 또한 그래.”
조용히 에블린을 내려다보던 체이서가 그녀의 이마 위에 가볍게 입술을 내리눌렀다.
“이능력의 여부가 어땠든 우리 둘 다 그 시험에서 살아남았고, 앞으로는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해.”
“…….”
“보면 내 부인은 항상 생각이 많단 말이야. 가끔은 그저 마음이 이끌리는 대로 하면 좋을 텐데.”
‘그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이 관계를 시작한 건 체이서였지만, 결국 끝을 최악으로 망치는 건 에블린이 될 것이다.
그건 곧 다가올 미래고 도망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체이서의 몸 상태도 좋아졌으니 다시 출근하게 될 테고. 이제 더는 미룰 수 없는 일이야, 짧지만 충분히 즐겼으니 괜찮아.’
고백에 대한 답을 기다리는 체이서에게는 미안하지만, 에블린은 조금 전의 대화로 확실히 결론을 내렸다.
‘답을 하지 말자.’
수락하든, 거절하든 체이서의 마음을 모욕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그럴 바에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덤덤히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리라.
***
데몬스가 수도로 돌아옴과 동시에 체이서가 기사단으로 복귀하였고, 그를 따라 블러드윈 또한 가주의 업무에서 해방되었다.
저택에 남은 루이사라고는 에블린과 더스틴뿐.
일상으로 되돌아왔다.
‘슬슬 끝내야 할 때가 왔구나.’
가주의 반지만 얻게 된다면 지금의 현실은 순간의 꿈이 되어 사라질 것이다.
원래 자신의 것이 아닌 건 욕심내면 안 되기에 에블린은 미련을 내려놓기 위해 애를 써야 했다.
그렇게 사흘이라는 시간을 더 보낸 후 드디어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을 수가 있었다.
에블린은 홀로 산책하다 별관에 들르고 싶다며 마야와 로피를 먼저 돌려보냈다. 그녀는 조용한 정원에서 제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미적지근한 여름 바람에 슬피 웃었다.
혼자만의 시간은 충분히 즐겼으니 이제 별관으로 향할 때였다.
“그럼 이제 아버님을 만나러 가 볼까.”
없는 의욕도 끌어 올리기 위해서 일부러 씩씩하게 말을 꺼낸 그녀가 천천히 발걸음을 내디뎠다.
달성해야 할 목표가 앞에 있기 때문일까.
에블린은 누군가 뒤에서 자신을 몰래 따라오는 기척을 느끼지 못한 채 별관으로 향했다.
***
“에블린, 이 아비가 참으로 섭섭하구나. 어째서 이리 드문드문 찾아오는 게냐. 얼굴을 자주 보여 주면 어디가 덧나는 것도 아니고.”
투덜거리는 목소리에 에블린은 빙긋 웃었다.
“별관에 자유롭게 드나드는 걸 허락받지 못했거든요. 보시다시피 그이는 걱정이 많아서요.”
“내가 너를 잡아먹는 것도 아니고. 쓸데없이 감은 예리해선.”
쯧쯧, 혀를 차는 소리에 에블린은 활짝 웃으며 그의 기분을 풀어 주기 위해 노력했다.
“의심받지 않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어요.”
그간 별관 밖으로 나가지 못해 스트레스를 받는다더니 확실히 지난번보다 태도가 까칠했다.
“아쉽게도 그 녀석의 몸이 벌써 회복기에 들어갔더구나. 능력을 자주 사용하게 해서 몸을 망가트려야 할 텐데 좋은 수가 없으려나.”
“다급할수록 일은 틀어지기 마련이에요.”
“그래도 네가 빨리 가주 자리에 앉는 것을 봐야 내가 마음이 편해지지!”
버럭 소리를 높이는 것에 에블린은 슬프다는 듯이 눈을 내리깔았다.
에블린은 더스틴을 말로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권력 가문 속에서 자란 그와 소시민처럼 살아온 에블린의 삶은 너무도 달랐고, 그를 설득하기에는 말재주가 부족하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방심하게 해야지.’
더스틴은 애초에 에블린을 자신의 목표를 위해 수단으로 사용하는 것뿐.
저보다 부족한 존재라고 여기고 있기에 나약한 모습을 보여 그가 방심하게 만들어야 했다.
“사실은 자신이 없어요. 과연 제가 그렇게 가주가 되어도 다른 이들이 저를 인정해 줄까요? 가신들은 루이사의 사상에 따르는 이들이니 분명 능력이 없는 저를 내치고 말 거예요.”
“내가 그리되지 않게 손을 쓴대도! 너는 내 말만 들으면 되는데 왜 이리 약한 소리를 하는 거냐!”
“하지만…….”
구슬픈 얼굴로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하니 더스틴이 당황한 듯 그녀의 달래 주기 시작했다.
“이 아비가 있는데 그게 무슨 걱정이냐. 응? 울지 말거라, 에블린. 내가 너를 가주 자리에 앉히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데!”
“……역시 이런 일 옳지 않은 것 같아요. 저는 가주의 자리에 어울리지도 않고, 체이서를 대신할 자신도 없어요.”
“네가 그 녀석보다 부족한 게 뭐가 있다고!”
체이서의 이름이 나오자 더스틴은 참다못해 씩씩거리더니 벌떡 일어나 서랍을 뒤지기 시작했다.
“보거라, 루이사 가주의 반지다. 이 반지를 낄 수 있는 건 이 저택에서 나와 너뿐인 거야. 선대 공작인 내가 인정하겠다는데 가신들이 무어라고!”
“하지만 저는 무능력자잖아요. 자격이 없는걸요!”
그들의 의견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며 성을 내던 더스틴이 갑자기 뚝 말을 멈추었다.
“아버지……?”
에블린은 울다 말고 의아한 눈으로 더스틴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살벌한 눈으로 문 쪽을 노려보더니 거침없이 문을 벌컥 열었다.
“어디서 쥐새끼가 엿듣나 해더니.”
에블린은 문 너머로 보이는 인물에 화들짝 놀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데몬스 님?”
바로 데몬스가 문 앞에 엉덩방아를 찧은 채 경악이 서린 얼굴로 더스틴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저, 저는 그저 형수님이 걱정되어서 따라왔다가……. 아, 아버지께서 원래대로 돌아오신 줄 몰라서…….”
데몬스가 복귀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더스틴에 대해 천천히 이야기를 꺼내려 했는데, 설마 이렇게 마주치게 될 줄은 몰랐다.
“이 빌어먹을 새끼가 감히 우리 이야기를 엿들어?”
그런데 더스틴의 반응이 생각보다 격했다.
엿듣는 행동이 옳다는 건 아니지만 평소보다 심하게 과한 반응이었다.
“내가 누누이 말했지. 네 놈의 눈을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나쁘니 똑바로 눈 마주치지 말라고!”
더스틴의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데몬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고, 말이 떨어지기도 전에 그가 곧바로 고개를 숙였다.
어정쩡하게 서서 그들을 바라보던 에블린이 다급히 문가로 달려갔다.
“자, 잠시만요! 아버님, 진정하세요!”
금방이라도 데몬스에게 달려들 것 같은 기세에 에블린은 더스틴의 허리를 붙잡았다.
“왜? 내 꼴을 보며 비웃으러 왔느냐? 가뜩이나 빌어먹을 네 형들 때문에 이리 갇혀 있으니 내가 아무것도 못 할 것 같았어?”
까랑까랑 울리는 목소리에 데몬스가 무릎을 꿇고선 정신없이 외치기 시작했다.
“죄, 죄송합니다. 아, 아버지 죄, 죄송…….”
“내가 분명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 했을 텐데! 네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나 보구나! 이 빌어먹을 사생아 자식이!”
“아버님, 제발 그만……!”
에블린이 필사적으로 허리에 매달린 채 더스틴을 말렸으나 그는 거추장스러운 물건을 다루듯 에블린을 벽으로 내던졌다.
흉흉한 기새에 데몬스는 온몸을 동그랗게 말고선 귀를 막고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었다.
“아, 아, 가, 가주님.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미친 듯이 사죄하고 있는 데몬스는 무자비한 학대에 고통받은 이의 모습이었다.
‘젠장.’
야윈 몸에 어디서 힘이 그리 넘치는지 벽에 부딪힌 몸뚱어리가 고통스럽다고 외치기 시작했다.
에블린은 참지 못하고 격한 기침을 내뱉으며 몸을 일으키다 앞에 펼쳐진 광경에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눈을 크게 떴다.
더스틴이 제 분노를 참지 못하고 의자를 붙들고 높이 치켜들어 올리고 있었다.
그러나 데몬스는 몸을 안쪽으로 만 채 귀를 틀어막고 있었기에 그러한 기색을 눈치 못 챈 듯했다.
“안 돼!”
더스틴이 의자를 내리치려 들어 올린 순간 에블린이 다급히 달려 나가 데몬스를 감싸 안았다.
곧이어 조금 전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격한 통증이 머리와 왼쪽 어깨를 짓누르며 찾아왔다.
“아악!”
고통을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르니 무언가 이상을 느낀 데몬스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혀, 형수님?”
데몬스는 에블린을 보다가 바닥에 널브러진 의자 부서진 의자 파편을 발견하였다.
그리고 당황한 더스틴을 보며 조금 전 제게 무슨 상황이 일어났는지를 파악하였다.
“괜찮으세요?”
에블린의 물음에 데몬스가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 저는 괜찮지만 형수님께서…….”
에블린이 괜찮다고 말하려는 순간 삐이- 하고 귓가에서 이명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자꾸만 눈앞이 흐려졌다.
에블린은 정신을 차리기 위해 손톱으로 손바닥을 꽉 누르며 힘겹게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그럼요. 괜찮고, 말고요.”
“저, 저 때문에…….”
“저리 비키거라 에블린. 그놈은 맞아도 싼 놈이야! 천한 신분에 주제도 모르고 매번 거슬리는 행동만 하는 아주 빌어먹을 버러지란 말이다!”
“저런 말 귀담아듣지 마세요. 데몬스 님은 그런 사람이 아니에요. 그러니까…….”
말을 채 잇기도 전에 그녀의 이마를 타고 끈적한 액체가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붉게 충혈된 데몬스의 흑색 눈동자 안에 에블린의 처참한 모습이 비쳐 보였다.
더스틴이 내려친 의자에 머리를 잘못 맞았는지 그녀의 이마를 타고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어쩐지 마비된 것같이 얼굴에 아무런 감각이 느껴지지 않더라니.’
다시금 들려오는 이명 소리에 에블린이 눈을 질끈 감았다.
머리가 어질어질하여 눈앞까지 뒤흔들리는 기분에 속이 울렁거렸다.
‘아니, 잠시만. 진짜 뒤흔들리는 것 같은…….’
데몬스를 안고 있던 몸이 갑작스러운 부는 바람에 튕기듯 바닥을 굴렀다.
에블린이 고개를 들어 무슨 상황인지 파악하기도 전에 눈앞의 거센 바람이 그녀의 뺨을 할퀴며 지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