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3화
“저는 이렇게 뒤에서 험담하는 것이 더욱 비겁한 행동이라 생각이 들어서요. 더는 소공작에게 실망하고 싶지 않으니 앞으로 우연히 만나더라도 사적인 대화는 삼갔으면 좋겠네요.”
며칠이나 지났음에도 자꾸만 머릿속을 맴도는 말 때문에 세자르는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확실하게 저를 거절하고 밀어내는 모습은 상상했던 것보다 더 충격적이었고, 소중히 품어 온 연심에 상처를 입혔다.
괜히 그런 꽃을 선물했다며, 욕심을 부리지 말았어야 했다며 뒤늦은 후회를 해도 시간을 되돌릴 수 없는 현실에 후회만 깊어질 뿐이었다.
‘짝사랑이란 고달픈 감정이구나.’
에블린의 곁에 체이서가 아닌 자신이 서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룰 수 없는 꿈은 현실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 뿐이었다.
무심코 술잔을 기울이던 세자르는 잔이 비었음을 알고 새로운 술병에 손을 뻗는데 누군가가 그의 손을 막았다.
“소가주님, 근래 술을 너무 많이 드시는 것 같습니다. 이리 드시다간 속이 상하십니다.”
세자르는 자신을 막는 손을 뿌리치고서는 잔에 술을 가득 따랐다.
“소, 소가주님!”
필베르타 공작가의 집사는 항상 청명하고 반짝이던 소가주가 이리 망가져 가는 모습을 두 눈으로 지켜보고 있음에도 믿기지 않았다.
특별한 사연이 있지 않을까 싶어 이러는 이유를 물어보았지만, 세자르는 그 누구에게도 자신의 고통의 원인을 이야기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루이사 공작가와 관련이 된 것 같기는 한데…….’
현 루이사 공작이 크게 다쳐 저택에 칩거하고 있을 때 세자르는 몇 번이나 공작저로 병문안을 갔지만, 번번이 거절당하여 돌아오고는 했었다.
열심히 편지를 써서 보내도 돌아오는 답도 없어 실망이 커 보였는데, 며칠 전 루이사 공작저에 다녀온 후로 쭉 이러한 모습이라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루이사 공작님과 그리 친한 사이는 아니셨던 것 같은데…….’
친구의 부상을 걱정한다고 하기에는 꼭 실연당한 모습과도 같이 보이기도 했다.
양껏 술을 마신 세자르가 입가를 닦고서는 그제야 집사를 봐 주었다.
“……무슨 일이지?”
술에 한껏 취해 풀린 목소리에 집사가 조심스럽게 방에 들어온 목적을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황실에서 온 편지입니다.”
세자르는 곧바로 편지를 뜯어 보고는 내용을 읽자마자 이를 갈았다.
“무, 무슨 일이십니까?”
심상치 않은 모습에 집사가 놀라 물었고, 그가 바닥으로 내팽개친 편지를 곧바로 주워 들어 확인해 보았다.
“……출정 명령서? 이런 시기에 수도 밖으로 출정하라니요! 아무리 변경이 중요하다지만 수도에 기사단을 집중시킬 때가 아닙니까! 실제로도 기사단 회의 때 그리 결론을 내렸다 하지 않았습니까!”
분개하는 집사의 모습에도 세자르는 이럴 줄 알았다는 듯 허탈하게 웃었다.
‘체이서가 손을 썼나 보군.’
루이사 공작가의 입김이 들어간 게 아닌 이상 이런 갑작스러운 명령서가 올 리 없었다.
‘아버지께서 정계에서 계속 활동하고 계셨다면 막았겠지만…….’
현재 필베르타 공작은 병상에 누워 있었고 막강한 루이사 공작가의 추진을 반대할 이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체이서는 항상 이런 식이었지.’
제게 방해가 되는 존재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눈앞에서 치워 버리는 것이 참으로도 그다웠다.
‘그래도 내게 이런 적은 없었는데. 드디어 내 존재가 신경이 쓰이기라도 한 건가?’
세자르는 체이서를 훌륭한 라이벌이라고 생각하였고, 주위 사람들도 그리 생각하였지만, 체이서는 분명 그렇지 않을 것이다.
그를 인생 최대의 라이벌로 여겼기에 세자르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부족할 것 하나 없는 체이서는 부족함이 많은 자신을 라이벌로도 여기지 않았다는 것을.
‘이것 참 기뻐해야 하는 건지 슬퍼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군.’
세자르는 술병째로 술을 들이켜기 시작했다.
집사가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로 제발 안주라도 함께 드시며 마시라고 하는 찰나 복도 다급한 발소리가 침실 밖을 울렸다.
“소가주님, 가, 가주님께서 또 사라지셨습니다.”
문밖에서 들려오는 겁에 질린 목소리에 세자르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아. 도대체 감시를 어떻게 하면 아버지께서 자꾸만 사라지시는 건가! 지난번처럼 지하를 서성이고 계실 수도 있으니 당장 가서 찾아와 침실로 모셔 오도록 해라.”
아니나 다를까, 필베르타 공작은 지난번과 마찬가지로 오늘도 지하를 헤매고 있었다.
사용인들은 무사히 필베르타 공작을 침실로 모시고 돌아왔지만, 그의 반항은 생각보다 더욱 거셌다.
“이것 놓아라! 나는 해야 할 것이 있다! 쓸모없는 너희들과 다르게 필베르타 공작가의 번영을 위해 달성해야 할 일이 있어!”
자꾸만 사용인들에게 화를 내며 그들을 뿌리치는 모습에 결국 세자르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하고 말았다.
“그만하시죠, 아버지. 도대체 언제까지 주위 사람들을 힘겹게 할 생각입니까! 환자라면 제발 좀 얌전히 있으시란 말입니다!”
“……술 냄새? 이놈이 대낮부터 술을 마셨느냐? 내가 너를 그리 가르쳤느냐! 이능력도 없고, 실력도 매번 루이사 공작가에 밀리는 녀석이 무얼 잘했다고 낮부터 음주를 즐기고 있느냐!”
그러나 필베르타 공작은 만만치 않은 성격이었고, 그는 언제나 그랬듯 세자르를 향해 익숙하게 폭언을 내뱉었다.
“하.”
그 말은 어린 시절부터 폭언에 억눌린 세자르의 마음을 터트리는 기폭제가 되어 버리고 말았다.
“아버지께서 이능력자였다면 저 또한 이능력자였겠지요. 아버지께서도 언제나 패배자였으면서 어떻게 제게 승리자가 되기를 바라십니까!”
참고 참던 울분이 터지기 시작하자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말들이 자연스럽게 흘러나왔다.
“그것 아십니까? 제가 아버지의 자식인 이상 저는 승리자가 될 수 없습니다. 원하는 건 아무것도 손에 넣을 수 없겠지요! 바로 아버지처럼 말입니다!”
필베르타 공작가는 단 한 번도 1등을 손에 쥐어 본 적이 없었다.
주위의 평판, 가문의 실적 그리고 사랑마저도.
필베르타 공작이 전대 루이사 공작 부인이 미혼 시절 사랑을 갈구했던 것은 사교계의 유명한 이야기기도 했다.
그리고 참으로 우습게도 세자르 또한 그의 아버지와 같은 절차를 밟고 있었다.
언제나 루이사 공작가의 그늘에 가려진 평생 2등밖에 하지 못하는 필베르타 공작가다웠다.
“저는 곧 출정을 나가야 합니다. 그러니 부디 그전까지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계세요.”
“……출정이라니? 공작가를 계승할 준비를 하지 않고?”
“어쩌겠습니까. 황실의 명을 거역할 수 없는 것인데요. 저는 루이사 공작과 달리 황실과 친하지 않지 않습니까. 아버지께서도 그러시겠지만.”
충격이 서린 필베르타 공작의 얼굴에 세자르는 괜한 말을 했다 후회를 하며 방을 나섰다.
속 시원히 말을 했다고 생각했는데 마음속 답답함은 가시지 않았다.
두 부자의 마지막 대화는 그렇게 서로에게 상처받은 채로 끝나고 말았다.
***
오래간만에 하소 경이 루이사 공작저에 찾아왔다.
체이서의 상태를 검진하고, 에블린의 피를 채혈하기 위해서였다.
“온 김에 선대 공작님도 만나 뵙고 가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검진을 마친 하소가 짐을 정리하다 말고 얌전히 앉아 있는 체이서에게 물었다.
“그래, 공작저까지 찾아왔으니 보러 가긴 해야겠지.”
평소 더스틴을 찾아가고 싶지 않아 하던 모습과 달리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습은 꽤 즐거워 보였다.
“가주가 된 내가 건강해진 모습을 보여 드려야 아버지께서도 안심하지 않겠어?”
‘아, 멀쩡하다는 모습을 보여 주며 약 올리려 가는 거구나.’
더스틴은 체이서의 몸이 망가지기를 바라는 사람이고, 에블린의 존재를 알게 되었으니 더더욱 그의 목숨을 끊어 버리고 싶을 것이다.
체이서가 크게 다친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겠지만, 애석하게도 더스틴의 예상했던 것보다 체이서의 회복이 너무 빨랐다.
‘변수가 생겼으니 어떻게 나오려나. 이번에도 자기가 알아서 다 해 준다고 하려나?’
“아버지께서 기뻐하실 모습을 보니 절로 웃음이 나오네.”
그러고 보니 체이서와 함께 더스틴을 만나러 가는 건 처음이었다.
하소도 함께이기에 가문에 관한 이야기는 나오지 않겠지만, 출생의 비밀 때문인지 체이서와 함께 더스틴을 마주한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불편했다.
언제까지고 숨길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으니 어떻게 이야기를 꺼내야 할지 막막했다.
“아, 맞다.”
잠시라도 마음을 편히 먹고 싶은지라 쓸데없는 생각을 지우다 얼마 전 라리사와의 대화가 떠올렸다.
“하소 경, 혹시 경의 능력으로도 이능력을 검진할 수 있나요?”
“이능력의 힘이 강하다면 가능합니다만 세밀한 분석은 불가능해요. 대신 기관에서 허락받아 이능력을 검진하는 거울을 소지하고는 있어 그걸 통해 세밀한 판정을 하죠.”
“그럼 오늘은 거울이 없는 건가요?”
“아무래도 거울은 쉽게 깨질 위험도 있어서 평상시 휴대하지는 않습니다만……. 무슨 일 있으신가요?”
에블린은 라리사의 추측을 이야기할까 하다가 느껴지는 체이서의 시선에 고개를 저었다.
‘확실해지기 전까지 라리사의 말은 비밀로 하자. 괜히 라리사에게 피해가 가면 안 될 테니까.’
“제 피가 특별하다면 이능력의 영향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안 그래도 체내 분석했을 때 그 부분도 고려해 볼까 싶기는 했습니다. 부인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다음번에는 거울을 가져와서 검진해 볼까 하는데 괜찮으실까요?”
그거야말로 바라던 것이었기에 에블린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로 체이서는 하소가 더스틴을 검진하고 돌아갈 때까지 이에 대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늦은 밤, 함께 침대에 누웠을 때가 되어서야 입을 열었다.
“에블린, 만약 이능력 검사를 해서 능력이 나오면 어떨 것 같아?
“음, 글쎄요. 기분이 어떨까요. 실감이 안 날 것 같은데…….”
머리칼을 쓸어 주는 익숙한 손길에 편히 눈을 감고 있던 에블린이 갑작스러운 질문에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만약 제가 이능력자라면 분명 뒤늦게 각성한 걸 테니 이를 다행이라 여길 것 같아요.”
“다행이라고? 왜?”
“어린 나이에 이능력을 발현했으면 이렇게 함께 누워 있지 못 했을 테니까요.”
에블린의 말에 그녀의 머리를 쓸어 주던 그의 손길이 멈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