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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92)화 (92/159)

92화

‘곧 하소 경이 찾아온다 했으니 그때 부탁해 볼게요.’

난감한 주제에 에블린은 그렇게 말하며 대화의 주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라리사는 찾아왔을 때보다 평온한 얼굴로 돌아갔고, 마차에 오르기 전 다시 한번 그녀에게 이능력에 대해서 당부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에블린은 라리사가 탄 마차가 멀어지는 것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럴 리 없다고 부정하기에는 라리사의 눈이 너무 진지했지.’

라리사의 추론은 그럴싸했으나 에블린은 제 주제를 잘 아는 사람이었다.

‘내가 이능력자라니 말도 안 되지.’

만약 이능력이 있었더라면 애초에 에블린은 지금처럼 지내지 못했을 것이다.

‘에블린 루이사 공작 부인이 아닌 그냥 에블린 루이사가 되어 있겠지.’

그리고 더스틴의 감시 아래 두 형제와 경쟁하며 자라 왔을 테고, 지금과 같은 일상은 꿈도 꿀 수 없었을 것이다.

“나도 참,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네.”

제게 주어진 시간은 얼마 되지 않기에 이런 말도 안 되는 가정으로 소중한 시간을 낭비할 수는 없었다.

라리사가 함께 걷고 싶다고 한 탓에 정문 앞까지 나왔으니 오늘의 산책도 이 정도면 충분했다.

몸을 돌려 다시 저택으로 돌아가던 중, 이곳에 있으리라 생각 못 한 사내를 만나게 되었다.

“……공작 부인?”

에블린이 저도 모르게 멈칫하며 서자 그가 빠른 걸음으로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맞다, 세자르도 기사단의 단장이었지.’

세자르 필베르타 또한 4기사단의 단장이니 회의를 위해서 오늘 공작저에 오는 게 당연했다.

주변에는 그를 제외하고 다른 기사단의 일원은 보이지 않았다.

라리사와 사적인 대화를 나누기 위해 사용인도 물렸다 보니 하필 에블린을 따르는 사람도 전혀 없었다.

이대로 자리를 벗어나고 싶었지만 가까이 다가온 세자르가 반가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맙소사, 정말 부인이군요.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몸은 괜찮으시고요?”

“저야 괜찮지요. 환자는 제가 아니라 제 남편이었는걸요.”

“몇 번이나 병문안을 찾아왔는데 아직 손님을 받을 수 없다고 하더군요. 편지에 답도 없으셔서…… 걱정했습니다.”

긴장감에 한껏 떨리는 목소리와 초췌한 낯.

며칠 잠 못 이룬 듯 피폐한 얼굴이 꼭 저 때문이라고 말하는 것만 같아 부담스러웠다.

‘그리고 저 눈빛…….’

다친 사람은 체이서이건만 세자르의 눈동자는 오로지 에블린에게 향하여 있었다.

딱 세 걸음.

너무 가깝지도, 그렇다고 멀지도 않은 거리 덕에 그의 표정을 자세히 살펴볼 수 있었다.

마치 오래간만에 만난 애인을 보듯 애틋함을 띠고 있는 눈빛에 에블린은 소름을 넘어 불쾌함까지 느꼈다.

“오늘 대책 회의를 위해 기사단분들이 찾아오신다고는 들었어요. 벌써 돌아가시는 건가요?”

“아, 잠시 휴식 시간이라서요. 답답해서 산책 좀 할 겸 돌아다니고 있었습니다.”

“그러셨군요. 그럼 먼저 들어가 볼게요. 좋은 시간 보내시기를 바라요.”

에블린이 매몰차게 등을 돌리자 당황한 목소리가 그녀를 붙잡았다.

“부인! 괘, 괜찮다면 정원을 안내해 주실 수 있으실까요?”

“잠시만 기다리시면 안내해 줄 이를 불러다 드릴게요.”

“아니요, 저는 다른 사람 말고 부인과 함께 산책하고 싶습니다.”

저돌적인 말에 에블린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구슬픈 얼굴로 간절히 바라보니 꼭 자신이 죄인이 된 것만 같이 속이 자꾸만 답답하였다.

그와 동시에 세자르가 전해 주었던 붉은색 러넌큘러스가 떠올랐다.

‘아무것도 모르고 받은 나도 어리석지만, 적어도 당신은 그러지 말았어야지.’

체이서가 화낼 때만 해도 당황하여 깊게 생각하지 못하였지만, 위로의 말에 고맙다며 건네준 꽃이 그런 의미를 담고 있다는 건 그녀를 모욕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이런 순진무구한 얼굴로 그러한 짓을 저질렀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 에블린의 얼굴이 싸늘히 굳었다,

“혹시 제가 무언가 잘못했을까요?”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에 세자르가 조심스럽게 그녀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세자르가 아무것도 모르는 척 다가오려 하자 에블린이 그와 가까워지기 싫다는 듯 뒤로 물러났다.

곧바로 떠오른 상처받은 표정에 에블린은 기가 차다 못해 어이없어 실소를 터트렸다.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어요.”

“예, 어떤 것이든 물어봐 주세요. 제가 답해 드릴 수 있다면 얼마든지 해 드리겠습니다.”

다급한 목소리에는 어떻게 해서든 이 분위기를 전환시키고자 하는 마음이 느껴졌다.

“어째서 제게 붉은색 러넌큘러스를 선물로 주셨나요?”

“……예?”

“제가 요양 생활이 길었다는 건 수도의 귀족이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사실이죠. 그래서 제가 사교계의 예법에 미숙할 것을 알고서 일부러 그 꽃을 선물하신 건가요?”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저는……!”

“제게 그러셨죠. 다른 마음이 있는 게 아니라 그저 고마워서 선물하고 싶었을 뿐이라고. 단지 꽃이 아름다워서 그걸 고르셨나요? 아니면 정말로 다른 의도를 가지고서…….”

아무리 가정이라지만 뒷말은 입에 담고 싶지도 않았다.

끝까지 말하지 않았음에도 세자르는 뒷말을 예상한 듯 조금 전보다 더욱 창백한 시선으로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부인, 아무래도 부인께서 무언가 오해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저는 그 꽃이 뭔지 잘 모릅니다. 여인들에게 인기가 많은 꽃을 추천받은 것뿐입니다.”

“정말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맹세하실 수 있나요?”

말문이 턱 막힌 듯한 모습에 무례라는 것을 알면서도 저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저는 필베르타 소공작께서 심성이 다정하시고, 좋으신 분이라 생각했어요. 뜻이 맞는 새로운 친구를 사귀게 되어 기쁘게 생각하였는데……. 모든 게 다 제 착각이었네요.”

숨기지 못한 실망에 세자르의 두 눈이 잘게 떨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우리는 친구가 될 수 없을 것 같네요. 앞으로 소공작께서 보내는 사적인 편지는 받지 않을게요.”

“부인…….”

“그럼 이만.”

에블린이 약식으로 인사를 하고선 등을 돌렸다.

매몰찬 반응에 세자르는 어쩔 줄 몰라 하더니 빠르게 뛰어 에블린의 앞을 막았다.

“이게 뭐 하는 짓인가요?”

“부인, 혹시 체이서에게 무슨 이상한 소리를 듣기라도 한 겁니까? 그래서 이리 냉정히 구시는 건가요?”

“당신이 저를 모욕한 것과 제 남편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모르겠네요. 이만 비켜 주세요.”

“……체이서, 그는 부인이 생각하는 것만큼 그리 좋은 인간이 아닙니다.”

뜬금없는 말에 에블린은 간신히 눌렀던 화가 치솟는 것을 느꼈다.

“제 눈에는 남편이 있는 여인에게 구애하는 사내가 더 나쁜 이로 보이네요. 다른 이들도 그리 생각하지 않을까요?”

“제가, 제가 부인께 호감을 품고 있는 건 사실입니다. ……이런 제 말이 갑작스럽고 물론 미덥지 않겠지만, 체이서를 너무 믿지 마십시오.”

세자르는 땀에 젖은 손바닥을 허벅지에 닦으며 가득 긴장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눈을 굴려 가며 주위를 살펴보는 모습은 꼭 비밀스럽고 은밀한 소식을 전해 주려는 것처럼 조심스러웠다.

“아카데미 시절, 체이서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제 앞에서 방해하는 이들을 모두 잔인하게 내쳤습니다. 지금이야 달콤한 말로 부인을 속이고 있겠지만 언젠가 실체를 드러내 부인께 상처를 주고 말 겁니다.”

“그래서요?”

“예?”

무슨 말을 하나 싶어 가만히 들어 주었더니 비장하게 말문을 튼 것 치고 전부 쓸데없는 소리였다.

“조금 전 그 말이 저를 위해서 한 충고인가요, 아니면 저와 체이서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서 꺼낸 말인가요?”

“……당연히 부인을 위해서죠.”

“그래요? 이상하네요. 제 귀에는 후자로 들리는데. 저는 필베르타 소공작께서 제 남편과 친구라 하여 예의를 갖추었던 건데 소공작께서는 그리 생각하지 않으셨나 봐요.”

아무리 체이서가 성격이 나쁘다 하더라도 그의 부인 앞에서 이리 말하는 건 옳지 않았다.

세자르 또한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사랑에 눈이 멀어 실수를 범하고 말았다.

“저는 이렇게 뒤에서 험담하는 것이 더욱 비겁한 행동이라 생각이 들어서요. 더는 소공작에게 실망하고 싶지 않으니 앞으로 우연히 만나더라도 사적인 대화는 삼갔으면 좋겠네요.”

에블린의 말의 큰 충격을 받은 듯 세자르는 동상처럼 굳어 버렸다.

더는 상대할 가치도 없어 그를 지나치는데 저택의 문이 열려 있었다.

열린 문 너머 로비에는 체이서가 가만히 서서 에블린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른 아침부터 시작된 회의인지라 얼굴도 제대로 보지 못했는데 고작 반나절이 뭐라고 애틋한 마음이 피어났다.

“회의는 끝났나요?”

에블린은 한걸음에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마땅한 대책이 나오질 않아서 잠시 휴식 시간을 가지기로 했어.”

“그래요? 몸은 좀 괜찮아요? 혹시 어디 아픈 곳은 없고요?”

“내가 말했잖아. 당신만 곁에 있어 주면 나는 금방 낫는다니까.”

그렇게 말하며 팔을 슬쩍 벌리는 것에 에블린이 거부하지 않고 웃으며 체이서의 품에 안기었다.

“밀리오 후작 영애는 잘 만났나?”

“네, 오래간만에 친구를 보니 좋더라고요.”

“다행이네.”

체이서는 그리 말하면서 에블린을 보는 대신 먼 곳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닿는 곳으로 고개를 돌리니 그 자리에는 세자르가 여전히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서 있었다.

“필베르타 소공작께서 산책을 권유하시더라고요.”

“그래서?”

불만이 서린 물음에는 에블린도 눈치챌 수 있는 선명한 질투가 담겨 있었다.

에블린은 대수롭지 않게 그의 질투를 털어 냈다.

“당연히 거절했죠. 사적인 편지도 앞으로 보내지 말라고 했고, 만나더라도 사담을 나누고 싶지도 않다고 했어요.”

“좋은 사람이라며. 그렇게 단번에 연을 끊어도 괜찮겠어?”

체이서가 걱정하는 듯 물었지만 조금 전보다 그의 목소리가 밝았다.

에블린은 체이서를 더욱 꼭 끌어안고는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기대었다.

“더는 당신을 불안하게 하고 싶지 않아요. 나는 당신이 싫어하는 건 안 할래.”

곧 고개를 올려 배시시 웃으니 체이서가 멍한 얼굴로 그녀를 응시했다.

“내가 기다리는 대답은 아직인가?”

에블린이 망설이다가 부끄러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괜히 기다린다고 했나?”

그에 체이서가 홀로 중얼거리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

“그래, 조금 더 기다리면 되지. 에블린, 나를 이렇게 들었다 놨다 하는 건 너밖에 없을 거야.”

그리고선 슬며시 고개를 숙여 에블린의 눈가에 입을 맞추었다.

“이번에는 입에 맞추어도 되나?”

“그런 건 묻지 말고 해도 되는걸요.”

장난스러운 목소리에 체이서의 입꼬리가 만족스럽게 끌어 올려졌다.

두 사람은 그들이 서 있는 장소가 로비라는 것도 깜빡 잊고선 서로의 입술을 탐했다.

달콤하고, 또 감미롭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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