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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91)화 (91/159)

91화

“아. 그럴 수 있겠네요.”

다행히 성격이 좋은 블러드윈이 공감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반응해 주었다.

“기억이 없으니 답답하셨겠는데요?”

“그렇게 답답하지는 않았어요. 이 저택에 오기 전까지는 잊고 살았거든요.”

정확히는 엮이지 않기 위해 숨어서 살았다가 맞았지만 깊게 이야기하지는 않았다.

“두 사람이라면 혹시 제가 어떻게 탈출했는지 알까 싶어 물어본다는 게 너무 뜬금없이 말을 꺼냈네요.”

미안하다며 사과하자 체이서가 그럴 필요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우리도 알려 주고 싶지만 애석하게도 네가 탈출하는 걸 직접 보지는 못해서 말이야. 아무래도 당시에는 정신이 없던 상황이었다 보니.”

“정신이 없었다니요?”

“미로의 탈출을 앞두고 있으니 아무래도 후보자들이 날뛰기 시작해서 말이야.”

열심히 타르트를 먹던 블러드윈 또한 맞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마지막 식사에 쪽지가 함께 딸려 왔거든요. 미로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모두 함구되니 어떤 일이 일어나도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요.”

“그 뜻은…….” 

“아무래도 그 안에 있는 애들은 서로가 라이벌이니 사이가 안 좋았잖아요. 한마디로 서로 죽기 살기로 싸우라는 거죠. 이것도 기억 안 나세요?”

블러드윈의 물음에 에블린은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역시 얼마 전에 꾼 꿈은 그냥 헛꿈이었나?’

에블린은 이상한 꿈을 뒤로한 채, 천천히 기억을 되짚어 보기 시작했다.

“탈출 직전의 일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아요. 그냥 시험이 진행되는 내내 열심히 미로를 돌아다니고, 다른 애들을 피해 숨어다니고, 그리고…….”

생각을 이어 나가는 순간 찌릿하고 머리에 극심한 통증이 느껴졌다.

“윽.”

에블린이 머리를 붙잡고 고통이 섞인 신음을 내니 차를 마시고 있던 체이서가 곧바로 그녀를 살펴보기 시작했다.

“괜찮나?”

“네, 괜찮아요. 갑자기 머리가 아파서.”

다행히 고통은 금방 지나갔다.

“아무래도 긴장이 풀리니 몸이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 같아요. 자랑은 아니지만 제 몸이 조금 약하긴 하잖아요?”

“조금이 아니지.”

걱정스러운 시선이 뭐가 좋은지 에블린은 무해하게 웃으면서 슬쩍 체이서의 어깨에 몸을 기대었다.

“이러고 있으면 금방 괜찮아질 것 같아요.”

해맑은 목소리에 체이서가 못 말린다는 듯 피식 웃었다.

“어깨 정도는 얼마든지 내어 줄 테니 필요하면 언제든지 말해.”

“정말요? 약속했어요?”

에블린과 체이서가 마주 보며 자신들만의 세계에 빠져 화기애애하게 웃었다.

“아무래도 저는 먼저 일어나 봐야 할 것 같습니다. 두 분이서 좋은 시간 보내시기를…….”

블러드윈이 창백한 얼굴로 엉거주춤 일어나자 에블린이 다급히 그의 옷깃을 잡았다.

“아직 일 다 안 끝나셨잖아요?”

“가끔 보면 형수님이 이 집안에서 제일 잔인한 사람 같습니다.”

블러드윈은 나오지 않은 눈물을 닦는 척하며 어깨를 들썩였다.

“형님, 저 조금만 더 쉬고 싶습니다.”

블러드윈의 어리광에 체이서가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보면 정말 친형제나 다름없는 모습이었다.

“참, 데몬스 님도 곧 저택으로 복귀하신다고 연락해 주셨어요. 일주일 안에 도착할 것 같다고요. 오래간만에 가족끼리 함께 식사하면 좋을 것 같아요.”

“아, 벌써 데몬스가 오는 날이 되었군요.”

체이서 대신 하여 타 지역으로 파견을 나갔던 데몬스가 드디어 귀환하게 되었다.

기뻐하는 에블린과 달리 두 사람은 조금 떨떠름한 반응을 보였다.

“에블린, 그때 내가 했던 말 기억해?”

“무슨 말이요?”

“그자를 찾아갈 때 나나 데몬스를 데리고 가라고 했던 것.”

순간이지만 체이서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당부한 날 바로 혼자 별관으로 달려갔던 에블린은 시선을 피하며 어색히 웃을 뿐이었다.

“아, 그럼요. 기억하고 말고요.”

“말썽꾸러기가 따로 없다니까.”

다행히도 체이서는 화를 내기보다는 어이없다는 듯 웃으며 문제를 넘겨 버렸다.

“그때 했던 말 정정할게. 데몬스는 별관에 데리고 가지 마.”

“왜요?”

“그 인간은 우리를 싫어한 것 이상으로 데몬스를 싫어했거든.”

반갑지 않은 이가 대화에 등장하자 에블린의 어깨가 빳빳이 굳었다.

“데몬스에게 있어 그는 트라우마의 대상이야. 마주쳐 봤자 좋을 것 하나 없으니 나나 블러드윈을 데리고 가.”

에블린이 기운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의 평화가 너무나도 좋아 그간 외면하고 있던 거대한 현실이 코앞까지 다가온 기분이었다.

에블린의 표정이 안 좋아지자 그걸 보던 체이서가 쯧, 하고 혀를 찼다.

“아니다. 그 인간이 자꾸 너를 찾는다고 하였지. 그냥 당분간 별관을 찾아가지 마. 가까이해서 좋을 것 없는 이니까.”

“가문의 웃어른 대접해 줄 생각 없으니 네가 괜히 신경 쓸 필요는 없어.”

저를 걱정해서 하는 말이었지만, 시린 바람과 같이 날카롭게 느껴졌다. 노골적인 경멸을 담은 말은 진실은 더욱 무겁게 에블린의 양심을 짓눌렀다.

에블린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게 피해가 가지 않도록 할 테니까.”

그런 표정 지을 것 없다며 어깨를 감싸 주는 손길은 따스했다.

에블린은 그제야 안심하며 웃어 보였다.

두 사람 사이를 감도는 분위기는 어느 때보다 화기애애했으나 금방이라도 깨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건너편에 앉아 있던 블러드윈은 그런 두 사람을 지켜보며 조용히 차를 음미했다.

‘뭘 숨기고 있는 걸까.’

아직 풀리지 않은 의문을 곱씹으며, 그는 에블린에게 향한 의심 섞인 진중한 눈빛을 숨겼다.

*** 

몸이 성치 않은 체이서를 배려하여 이번 사건의 대책 회의는 루이사 공작저에서 열리게 되었다.

총 다섯 기사단의 단장, 부단장이 저택을 찾아왔고, 업무의 연장이기에 에블린은 체이서의 곁에 있을 수가 없었다.

혼자서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하던 중 반가운 편지가 도착했으니.

에블린은 응접실에 앉아 손님을 기다리다가 문이 열리자 반가운 얼굴로 일어났다.

“이렇게 와 주어서 정말 고마워요, 라리사.”

라리사는 저를 기다리고 있는 에블린을 보며 반가운 얼굴로 안에 들어섰다.

“너무 늦게 찾아와서 미안해요.”

라리사가 품에 안고 있던 꽃다발을 건네주자 에블린은 무슨 그런 말을 하냐며 가볍게 웃었다.

‘생각보다 꽤 괜찮아 보여 다행이네. 소문에 의하면 루이사 공작 부인이 공작의 곁에 떨어지지 않아 이러다 두 개의 송장을 치르는 것이 아니냐더니……. 헛소문이네.’

편지를 써 보내는 것도 민폐가 되지 않을까 싶어 며칠 동안이나 고민하던 중, 체이서가 깨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라리사는 재빠르게 에블린에게 편지를 보내고 이렇게 찾아올 수 있었다.

걱정했던 것보다 훨씬 좋아 보이는 모습에 라리사는 안도하며 안내하는 자리에 앉았다.

“공작님께서는 괜찮으신가요?”

“그럼요, 괜찮고 말고요. 그이가 빠르게 복귀하고 싶다는 걸 제가 조금 더 쉬라며 말리고 있는 판국이라니까요?”

에블린이 입가를 가리며 웃자 라리사 또한 그녀를 따라 미소를 지었다.

“괜찮으시다니 다행이네요. 에블린도 괜찮은 거죠?”

“그럼요, 체이서가 깨어났으니 저는 괜찮아요. 그런데 라리사는 괜찮아요? 얼굴빛이 너무 안 좋아요.”

에블린의 물음에 라리사는 멈칫하더니 어색한 손길로 제 뺨을 감쌌다.

“많이 티가 나나요?”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해 눈가에 짙게 내려온 다크서클을 화장으로 가려 보았지만 금세 들켜 버리고 말았다.

“사실 요새 두통이 심해져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거든요.”

“그 부작용 때문인가요?”

에블린의 시선이 라리사의 팔에 닿자, 그녀가 씁쓸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좀 괜찮아지나 싶었는데 다시 이러니 너무 힘드네요.”

칭얼거리는 목소리에 에블린이 안타까운 얼굴을 숨기지 못했다.

“꼭 이 팔찌를 차야 하는 건가요? 능력을 조절하는 방법이 정말 없어요?”

“네, 수단과 방법을 다 써 봤지만 아무런 효과가 없더라고요. 스스로 능력도 조절하지 못하고……. 이러고도 이능력자라니 참 한심하죠?”

“한심하다니요!”

에블린이 단호한 목소리를 내며 라리사의 손을 움켜쥐었다.

“이능력을 잘 다루는 것 자체가 원래 어려운 일이라고 들었어요. 그래서 이능력자들로만 이루어진 기사단이 따로 있는 것 아니겠어요? 한심하지 않아요, 라리사.”

“……하하, 이런 말 부모님께도 들어 본 적 없었는데.”

라리사가 에블린의 다정한 말에 고맙다는 말을 전하려는 찰나.

머리를 깨트릴 기세로 두드리던 거센 두통이 천천히 사그라들기 시작했다.

‘……또 그 향기가 나.’

기사단에서 처음으로 에블린을 만났을 때부터 시작하여 지금까지.

만날 때마다 풍겨 오는 특유의 청량한 향기에 머릿속에서 날뛰던 고통이 서서히 줄더니 이내 잠잠해졌다.

라리사는 최근에 제 이상을 떠올려 보았다.

에블린을 만난 뒤로부터 깨질듯한 두통의 강도가 줄어들기 시작하였었다.

‘요새 에블린과 자주 붙어 다니기는 했지. 얼굴을 못 보면 서로 편지를 주고받기도 했고.’

지금껏 능력을 억제해 주는 제어구의 부작용이 줄어들었다고만 생각했는데 어쩌면 그게 아닐지도 몰랐다.

“에블린, 갑자기 이런 것을 물어봐서 미안한데 혹시 오늘 향수를 뿌렸을까요?”

“향수요? 아니요, 환자를 옆에 두고 향수를 뿌리는 건 좋지 않을 것 같아서 요새 뿌린 적이 없는걸요?”

혹시 냄새가 나냐며 당황하는 얼굴에 라리사가 그건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향수를 뿌리지 않았다면 어째서 이런 향이 나는 거지? 마치 진정제같이……. 잠깐만, 진정제? 설마…….’

에블린 옆에만 가면 느껴지는 청량감, 제어구와 달리 두통이 가시고 머리가 맑아지는 기분은 분명 단순한 착각이 아니었다.

지금껏 눈치채지 못했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에블린, 혹시 이능력을 가지고 있나요?”

연속되는 뜬금없는 질문에도 에블린은 놀라지 않고 친절히 답을 해 주었다.

“이능력이 있다면 참 좋겠지만 아쉽게도 저는 이능력이 없어요.”

분명 미소를 짓고 있었지만, 어딘가 쓸쓸함이 느껴지는 얼굴이기도 했다,

“에블린, 이건 어디까지나 저의 생각이지만…….”

라리사는 조금 전 제가 생각한 추측을 털어놓았고, 놀라 굳어 버린 에블린을 보며 침착히 말했다.

“흔치는 않지만, 성인이 되고 뒤늦게 각성하는 이도 있다고 해요. 혹시 모르니 검사를 해 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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