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화
에블린이 피곤한 몸을 이끌고 침실로 돌아왔을 때, 체이서는 여전히 약에 취해 잠든 상태였다.
무방비한 낯선 모습에 에블린은 저도 모르게 푸스스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러니 웃음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에블린은 결국 루이사 가주의 반지를 얻지 못한 채 돌아왔다.
그 역겨운 인간을 또 봐야 한다는 사실에 안 그래도 부족한 몸의 기운이 쪽쪽 빠지는 것만 같았다.
에블린은 잠든 체이서의 옆으로 올라가 그가 깨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그의 옆에 자리 잡고 누웠다.
‘그런 인간 밑에서 자라느라 얼마나 많이 고생했을까.’
체이서야말로 루이사 공작가에 어울리는 인물이라 생각했었는데 그보다 더한 이가 존재했다.
단순히 성격의 문제가 아니라 사고와 가치관 모두가 뒤틀려 있는 끔찍한 사내가 제 친부라는 사실은 믿고 싶지 않은 현실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에블린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음에도 그녀는 체이서에게 죄인이나 다름없었다.
‘언젠가 당신에게 진실을 전해야 할 텐데. 과연 내가 이걸 말할 수 있을까?’
이제야 겨우 서로의 마음이 닿을락 말락 아슬아슬 간질거리는 상황에서 이 사실이 밝혀진다면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둘 사이의 관계는 엉망이 되고 말 것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되면 복수하기 위해 나도 죽이겠지?’
그 전까지 반지를 찾아 손에 쥐고 있는다면 어쩌면 그의 복수도 이루고, 자신의 바람 또한 이룰 수 있을지도 몰랐다.
가혹한 현실에 에블린은 생각하기를 멈추었다.
눈물이 핑 도는 것이 지겹지도 않은지 또 슬퍼졌다.
에블린은 체이서의 옆을 파고들어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쿵, 쿵.
규칙적으로 뛰는 심장 소리를 듣고 있자니 복잡한 생각이 모두 지워졌다.
그가 살아서 제 곁에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에블린은 슬며시 눈을 감았다.
아슬아슬한 줄다리기와 같은 일상의 시작이었다.
***
다행히 체이서의 회복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의사도 이건 기적이라며 그의 회복력에 감탄하였고, 무겁게 가라앉았던 저택도 점차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에블린은 정원에 피어 있는 꽃을 품에 한가득 안고 방으로 돌아왔다가 체이서의 옆에 서류를 붙든 채 꿍얼거리고 있는 블러드윈을 발견했다.
“또 함께 일하고 있는 거예요? 아직 체이서는 더 쉬어야 한다니까요?”
에블린이 미리 다듬은 꽃들을 화병 안에 넣으며 말하니 블러드윈이 억울한 목소리로 제 처지를 호소했다.
“……형수님, 저 너무 힘듭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형님은 괴물이에요. 가문의 일과 기사단의 일을 함께 수행하는 건 불가능해요.”
“하지만 체이서는 지금껏 해 왔는걸요.”
블러드윈의 우는소리에 체이서가 피식 웃으며 그의 손에 쥐어진 서류를 거둬 갔다.
그에 블러드윈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가 자신을 기다리는 새로운 서류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서 형님이 가주가 된 거죠. 역시 형님을 당장 일선에 복귀시켜야 해요.”
“말도 안 되는 소리는 거기까지만 하시고.”
에블린은 타이밍 좋게 침실을 찾아온 마야를 반기며 그녀에게서 접시를 받아 들었다.
“간식이라도 조금 드실래요?”
달콤한 향기에 한껏 죽어 있던 블러드윈의 눈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직접 만드신 겁니까?”
“주방의 도움을 받았죠. 두 사람이 열심히 일하니 조금이라도 힘을 주고 싶어서요.”
단 것을 좋아하는 블러드윈을 위해서 여름의 제철 과일을 조려 만든 타르트를 준비했고, 담백한 것을 좋아하는 체이서를 위해서 견과류 타르트를 만들었다.
기분을 전환시켜 줄 디저트와 향긋한 홍차가 함께 놓이자 침실에서 열리는 훌륭한 티파티가 개최되었다.
“형수님이 계셔서 다행이에요. 형님은 이런 거 신경도 안 써 주시는 분이거든요. 디저트를 먹는 걸 이해 못 하시는 분이죠.”
달달한 타르트를 먹으니 기분이 좋아졌는지 블러드윈의 얼굴에 생기가 찼다.
“단 건 몸에 좋지 않다지만 가끔 섭취하는 건 좋다고 생각해요. 일단 이렇게 기분을 좋게 해 주니 나쁜 음식이 아니란 말이죠.”
신나서 대화를 이끄는 모습에 에블린과 체이서가 동시에 웃음을 터트려 버렸다.
“더스틴, 그자도 단 음식을 좋아했죠.”
평화로운 분위기 도중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선대 공작의 언급에 에블린의 어깨가 긴장감에 빳빳이 굳었다.
“어릴 적 훈련 중 하나라며 우리를 쫄쫄 굶기고는 바로 앞에서 달달한 간식을 먹는 모습이 어찌나 얄밉던지. 마음 같아서는 선대 공작 대접도 하기 싫은데……. 조금 더 참아야겠죠?”
천연덕스러운 말을 내뱉던 그가 아차 하며 제 입을 막았다.
“형수님 앞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었는데. 실수했네요.”
블러드윈이 머쓱한 듯 자연스럽게 웃어넘기려 했지만, 에블린은 어쩐지 그 모습이 굉장히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블러드윈은 겉보기와 다르게 꼼꼼한 사람이야. 실수로 이런 이야기를 꺼낼 리가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던 순간, 뒤늦은 깨달음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설마……. 내가 루이사 시험에 참여했다는 걸 기억해 낸 건가?’
“형수님? 무슨 생각을 그리하세요?”
평소와 다를 것 없는 장난스러운 목소리였지만 저 모습이 꼭 에블린의 속내를 떠보기 위해 되묻 것처럼 느껴졌다.
‘아는 척을 해야 할까?’
머릿속으로 수많은 생각이 지나가던 그때, 에블린의 옆에 앉아 조용히 침묵을 유지하던 체이서가 그녀의 손을 불쑥 잡아챘다.
“눈치챘으면 챘다고 솔직히 말하면 되는 것을. 네가 철이 덜 든 애들도 아니고 형수를 놀라게 하면 쓰나.”
체이서가 쯧, 하고 짧게 혀를 차자 평온하게 반응을 지켜보던 블러드윈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아니, 지금 막 말하려고 했어. 형님이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진작 하고도 남았을 거야.”
“퍽이나.”
체이서의 비웃음에 에블린은 크게 뜬 두 눈을 깜빡였다.
“죄송해요, 형수님. 사실 첫 만남에 바로 기억해 냈거든요. 숨기고 싶어 하는 것 같으시길래 조용히 있었지만, 선대 공작이 깨어났으니 계속 비밀을 유지하기는 어려울 것 같아서요.”
“아…….”
긴장감에 빠르게 뛰던 심장이 점차 원래 속도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당신도 알고 있었어요?”
체이서가 붙잡고 있는 에블린의 손가락 사이로 슬그머니 깍지를 끼더니 이내 환히 웃었다.
그답지 않은 반응을 보이니 확실했다.
“알고 있었군요.”
‘물론 꼭 말해 줄 의무는 없다지만 조금 서운하네.’
체이서는 제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을 숨기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에블린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말하면 에블린 네가 신경 쓰일까 봐 조용히 있었어. 내 잘못된 선택이었지. 다음부터는 사소한 비밀도 만들지 않을게.”
‘……그래, 이건 과거의 일이니까.’
에블린이 괜찮다며 살짝 미소를 짓자 체이서도 마주 보며 웃어 주었다.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던 블러드윈이 흠, 흠하고 목을 가다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알고 계실지 모르겠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저랑 형님은 선대 공작을 고통 속에서 서서히 말려 죽일 계획을 하고 있어요. 그 과정에서 형수님의 도움도 필요한지라 밝힌 거예요.”
“제 도움이요?”
“지켜보니 선대 공작이 형수님을 꽤 예뻐하는 것 같더군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선명하게 경멸을 띠고 있었다.
‘……설마 내가 그자의 딸이라는 것까지 눈치를 챈 건 아니겠지?’
그토록 예뻐하는 모습을 보였으니 수상해 보이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갔다.
‘주의를 좀 줄걸.’
에블린이 조마조마한 얼굴로 뒷말을 기다리자 긴장하지 말라는 듯 체이서가 그녀의 손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그자와 친밀하게 군다고 해서 너를 탓하려는 게 아니야. 그자가 에블린, 너를 이용해서 허튼짓을 벌이지 않을까 싶어서 그렇지.”
“형님의 말이 맞아요. 형수님은 착하셔서 괜히 도움을 주다가 이용당할까 걱정이 되니 미리 말씀을 드리는 게 좋을 것 같았어요.”
에블린은 그런 것이었냐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숨기는 게 있으니 마음 편할 일이 없구나.’
두 사람은 더스틴이 얼마나 끔찍한 인간인지에 대해 알려 주기 시작했다.
그는 눈살이 찌푸려질 정도로 끔찍한 일을 행하였고, 그중 가장 끔찍한 것은 역시나 ‘저주’와 관련된 내용이었다.
“위험한 상황에 닥쳐도 능력을 최대로 끌어 올릴 수가 없었어요. 갑자기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이번에 경험해 보니 죽을 정도는 아닌 것 같더군. 한 번 더 이런 일이 생기면 그때는 진짜 위험할 것 같지만.”
덤덤히 내뱉는 말에 에블린은 하필 그런 인간이 제 친부라는 사실이 너무도 원망스러웠다.
“형수님도 시험에 통과했다면 분명 우리와 같이 욕을 내뱉고 있을 거예요.”
“그토록 증오스러운 이니까.”
두 사람의 말을 얌전히 듣던 에블린은 문득 한 가지 의문을 떠올렸다.
“그럼 두 사람은 어떻게 시험장에서 살아남았나요?”
무심코 꺼낸 말에 두 쌍의 시선이 그녀에게 닿았다.
‘아차, 너무 뜬금없었겠다.’
“미안해요, 너무 갑작스러웠죠.”
에블린은 머쓱한 얼굴로 다급히 변명을 늘어트렸다.
“사실 저는 시험장에서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기억이 나지 않거든요. ”
조용하고도 어색한 분위기를 깨트리고 싶은 마음에 말이 횡설수설 이어졌다.
“저는 능력도 없으니 당연히 탈락해서 죽었어야 하는 게 맞는데 살아 있잖아요? 그걸 보면 저택에서 탈출한 것 같은데 그 과정은 기억나지 않아 조금 궁금해져서요.”
지금껏 루이사를 외면하느라 깊이 생각해 보지 않았지만, 말을 하면 할수록 진심으로 그날의 진실이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이 두 사람이라면 알고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