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화
에블린의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소리가 너무 커서 체이서에게 들릴까 싶어 붙잡히지 않은 손으로 심장 위를 꾹 눌러도 고동 소리는 잠잠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가, 갑자기 그런 말을 한다고 해도…….”
에블린이 힘겹게 입을 떼다가 체이서와 두 눈이 마주치자마자 다급하게 입을 다물어 버렸다.
“당장 답을 달라는 건 아니야.”
체이서는 고백을 하는 사람답지 않게 여유로워 보였다.
“천천히 생각하고 답을 해 줘.”
‘이렇게 말하면 내 마음이 약해지잖아.’
현실을 버리고 제 목숨을 희생하여 모든 것을 원래대로 되돌리겠노라 한 굳은 결심은 사랑 앞에 너무나도 쉽게 흔들렸다.
홀로 간직하던 사랑이 일방적인 감정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기쁘면서도 착잡한 마음에 에블린은 쉽사리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이래서는 안 되는데, 정말 안 되는데…….’
이 상황이 불편한 건 에블린뿐인지 체이서는 연신 미소를 띤 얼굴로 다정히 말할 뿐이었다.
“강요도 협박도 아니니 부담 가지지 말고.”
온기가 돌아온 따스한 손끝이 에블린의 눈가를 부드럽게 훔쳤다.
그럼에도 에블린의 긴장이 풀리지 않자 그는 씁쓸한 얼굴로 후회 섞인 말을 내뱉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첫 만남에 잘 대해 줄 걸 그랬나 싶군.”
확실히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보이던 모습과는 너무나도 상반되어 꼭 다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반지의 행방도 아직 확신할 수 없고, 체이서도 고백에 대해 천천히 생각해 보라고 했으니까…….’
어차피 죽을 거라면 조금 더 이 평화를 즐겨도 되지 않을까?
사형수의 마지막 만찬과 같이, 짧은 시간이나마 이 순간을 즐기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조금만 이기적이고 싶어.’
서로를 파멸로 이끌 뿐이기에 어차피 두 사람은 절대로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다.
‘체이서는 내 가족을 죽인 원수, 그리고 나는 체이서가 증오하는 이의 딸.’
서로가 원수나 다름없으니 이 순간은 찰나의 시간일 것이다.
‘시간을 돌리면 모두 없었던 일이 될 테니 조금만, 아주 조금만 욕심을 낼래.’
결국 에블린은 자신의 마음을 외면하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의심조차 하지 않고 순진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를 보며 체이서 또한 텅 빈 가슴 속을 가득 채우는 만족감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
약을 먹고 잠든 체이서의 낯은 편안해 보였다
에블린은 체이서의 뺨을 몇 번 쓰다듬다가 아쉬운 손길을 거두고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 식사 시간에 맞춰 별관으로 향해야 했다.
블러드윈의 부탁으로 가게 된 일정이었는데 그는 썩 내키지 않은 얼굴로 조언을 남겼다.
‘일단 형수님을 데려오라며 하도 난동을 부려 어쩔 수 없이 말씀드리기는 하지만 혹 그가 이상한 낌새를 보이면 바로 방을 빠져나오셔야 합니다.’
평소와 달리 진지한 블러드윈의 모습에 에블린은 무어라 덧붙이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쯤 다시 갔다 오기는 해야 했으니까.’
차라리 누가 등 떠밀어 주니 의심도 받지 않고 편하였다.
‘……가기 싫다.’
편한 것과 다르게 발걸음은 무거웠지만 그렇다고 다시 본관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마님께서 저택에 들어오시고 좋은 일들이 계속해서 생기는 것 같아요.”
별관으로 향하는 길, 조용히 옆을 따라오던 마야가 입을 열었다.
“선대 공작 각하께서도 병을 털고 일어나셨고, 마님께서 옆을 지키신 덕에 가주님께서도 의식을 차리셨잖아요.”
“그게 어떻게 내 덕이겠어. 내가 없었어도 일어날 일이었을 텐데.”
“그래도요. 저는 마님께서 이 저택에 들어와 주셔서 너무 기쁘답니다.”
겁에 질린 얼굴로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다며 말리던 마야의 모습은 어디 갔는지.
‘그래도 덕분에 긴장이 조금 풀리네.’
아무리 에블린이 더스틴을 찾아오지 않았다지만 고새를 못 참고 블러드윈에게 저를 데려오라며 억지를 부린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애초에 존재 자체가 반가운 사람은 아니지.’
체이서와 블러드윈의 원수.
그리고 에블린의 친아버지.
이렇게 안 어울리는 수식어도 없을 것이다.
‘정말이지 최악이야.’
꼬여도 이렇게 꼬일 수도 없을 텐데 운명이란 참 잔혹하기도 하였다.
‘이제부터 정신 차려야지.’
어느덧 더스틴이 머무는 침실 앞에 도착하였다.
다른 이에게 눈속임으로 보여 주었던 가짜 병실은 인간으로 되돌아온 더스틴의 침실이 되었다.
에블린은 트레이에 더스틴 몫의 저녁을 올리고선 호위를 서는 기사들에게 눈짓했다.
“루이사 공작 부인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라 해라!”
말하기 무섭게 대답이 빠르게 돌아왔다.
“왔구나, 아가. 어서 들어오렴.”
노골적일 정도로 격한 환영 인사에 기사들마저 놀란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에블린은 굳어 버린 입가에 힘을 주어 싱그러운 미소를 만들어 냈다.
“그간 건강히 잘 지내고 계셨나요, 아버님?”
“잘 지내기는! 이놈들이 나를 이제 완전 뒷방 늙은이 취급하더구나!”
불평불만이 쏟아지는 틈을 타 기사들에게 다시금 눈짓하니 그들이 뒤늦게 침실의 문을 닫았다.
넓은 방 안에 두 사람밖에 남지 않게 되어도 더스틴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그러지 말고 이리 와 보거라. 오래간만에 보는 내 딸 얼굴 좀 보자.”
“그 전에 식사부터 하셔야죠. 몸이 매우 쇠약해지셔서 세끼 건강히 챙겨 드셔야 한다고 주치의가 그랬어요.”
에블린의 말에 더스틴은 불만 어린 얼굴로 식탁 앞에 앉았다.
“약도 드셔야 하니 입맛이 없더라도 드셔 보세요.”
“에블린 네가 권하는 거니 이리 먹는 거다. 다른 놈들이었더라면 당장 식탁을 뒤엎었을 거야.”
깡말라 있는 얼굴은 불만스러움이 가득했지만, 에블린이 곁에 있어서 그런지 그는 천천히 숟가락을 들어 올렸다.
먹기 쉬운 음식들인지라 더스틴은 눈 깜짝할 새 접시를 깨끗이 비웠다.
“자, 식사도 다 했으니 이리 가까이 앉아 보거라. 지하는 너무 어두워서 네 얼굴을 자세히 보지도 못했어.”
아쉬움이 가득한 목소리에 우선 에블린은 그가 원하는 대로 따라 주었다.
“정말이지 네 어미를 빼닮았구나. 아름답게 잘 자랐어.”
차분히 그와의 대화를 이어 가고자 했으나 에블린은 조금 전의 말을 쉽게 넘길 수가 없었다.
“……저는 제 친어머니를 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어요. 제 어머니는 어떤 분이셨나요?”
바이아르도 가족도 더스틴도 엉망이었기에 큰 기대는 없었지만.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매력 있는 이였어. 외면뿐만 아니라 내면도 아름다웠지. 박학다식하여 말을 섞는 것에 거부감이 들지도 않았고, 눈치가 빠른 덕에 주제 파악도 잘하였지.”
적어도 더스틴이 자신의 친어미를 사랑해서 가신들의 눈을 피해 옆에 두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더스틴의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에블린은 제 생각이 틀렸음을 알 수 있었다.
“몰락 귀족인 탓에 높은 자존감도 적당히 꺾여 다루는 맛이 있었단다.”
“……어머니께서 몰락 귀족이셨어요?”
“그래, 루이사의 후계자를 낳을 이가 천한 태생이면 안 되지 않겠니. 외국에 노예로 팔려 나갈 뻔한 걸 구해 주니 감사하다며 뭐든 하겠다고 하더구나. 멍청하게도 내가 제 가문을 몰락시킨 것도 모르고.”
거북함이 목 끝까지 치고 올라왔다.
더스틴은 제 행동에 부끄러움이라고는 모르는 얼굴로 회상에 잠겨 있었다.
“덕분에 내 계획대로 가신들의 눈을 피해 후사를 가지는 데 성공했단다.”
만족스러운 얼굴은 역겹기 짝이 없었다.
에블린은 필사적으로 표정을 관리하며 연신 웃는 얼굴로 물었다.
“그렇다면 어머니는 어디 계신가요? 저를 낳아주신 분이니 한번 만나 뵙고 싶은데요.”
하지만 그 웃음은 오래갈 수 없었다.
“하하하, 어디 있냐니. 당연히 땅 밑에 묻혀 있지. 너를 낳았으니 쓸모가 다하지 않았느냐.”
당연하다는 듯 흘러나오는 말에 에블린의 얼굴이 딱딱히 굳었다.
“이런, 많이 놀랐느냐? 하지만 이보다 더 확실한 입막음은 없었단다. 그래도 너를 낳은 귀중한 책무를 다했으니 양지바른 곳에 묻어 주었단다.”
체이서와 블러드윈의 말이 맞았다.
‘그저 제 계획을 위해서 사람을 도구로밖에 보고 있지 않잖아.’
더스틴 루이사는 에블린이 생각한 것보다 더욱 끔찍하고 악랄한 이였다.
“그랬군요. 아, 맞다. 아버지, 혹시 반지는 찾으셨나요?”
반지만 손에 넣는다면 다시는 이곳을 찾을 이유도, 끔찍하기만 한 이 사내의 비위를 맞출 일도 없을 것이다.
“아니, 아무리 찾아봐도 없더구나.”
하지만 더스틴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말은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는 대답뿐이었다.
‘없을 리가 없어.’
반지가 부서지지 않은 이상 분명 더스틴은 금방 찾아냈을 것이다.
“참, 블러드윈에게 네 이야기에 대해서 들었다. 체이서와 화려한 결혼식을 올렸다지? 과연 네 말이 맞더구나. 내 딸이 정말 공작 부인이라니 믿기지 않아.”
서글서글 웃으며 하는 말에는 뼈가 실려 있었다.
더스틴의 눈은 금방이라도 에블린을 씹어먹을 것처럼 매섭게 빛나고 있었다.
눈을 마주치자마자 알 수 있었다.
‘……이자는 나를 믿지 않아.’
그렇기에 반지를 숨긴 것이다.
‘내가 반지를 원하는 것 같으니 마지막 보루로 여긴다 이거지.’
그렇다면 앞으로도 이곳을 몇 번이고 찾아와야 한다는 소리였다.
끔찍한 현실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런 에블린을 보며 더스틴은 사람 좋은 얼굴로 갑자기 그녀의 손을 덥석 붙잡았다.
“차라리 잘되었다.”
“예? 무엇이요?”
“세기의 결혼식이라고 하더구나. 진실로 사랑하여 올린 결혼식! 그렇다면 체이서가 죽어도 그 누구도 너를 의심하지 않을 것이다.”
에블린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도저히 대화의 흐름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우선 블러드윈과 데몬스를 수도에서 쫓아내고 영지로 보내 둘부터 치워 버리자꾸나. 둘은 독살, 그리고 체이서는 암살자를 보내어 죽이면 딱 맞겠어.”
더스틴은 헛소리를 기막히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체이서가 죽고 네가 공작 대리가 되면 된단다. 누구도 너를 의심치 않을 거다. 의심하는 이가 있다면 이 아비가 치워 주마!”
역겨운 말을 내뱉는 얼굴은 제 꿈을 실현할 수 있다는 희망에 흥분으로 가득 차 있었다.
병약한 중년 사내가 얼굴을 징그럽게 일그러트리더니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
“아니, 모든 걸 이 아비에게 맡기거라! 지금껏 누리지 못한 것들을 모두 누리게 해 주마. 내 너의 원래 자리를 찾아 줄 것이다!”
아주 치가 떨릴 정도로 사악한 모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