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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88)화 (88/159)

88화

맞닿은 손끝에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에블린?”

오랫동안 말을 하지 않아 갈라진 목소리는 일주일간 너무도 듣고 싶었던 목소리였다.

에블린은 울컥한 얼굴로 뒤를 돌았고, 눈을 뜬 채 저를 보는 체이서의 영롱한 금빛 눈동자를 마주할 수 있었다.

“저, 정신이 들어요?”

떨리는 목소리에 그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차갑기만 했던 손끝에 익숙한 온기가 돌기 시작하자 벅차오르는 감정을 이기지 못하고 에블린은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아, 아.”

격앙된 마음에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있으니 블러드윈이 의사를 불러오겠다며 방을 뛰쳐나갔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에블린이 제 얼굴을 감싼 채 울음을 터트리자 체이서가 그녀의 손을 붙잡고 천천히 제게로 이끌었다.

“울지 마. 왜 울고 그래?”

“이건 슬퍼서 우는 게 아니에요. 기뻐서 우는 거지.”

에블린은 소매로 거칠게 눈가를 훔치고서는 체이서에게 몸을 바짝 붙인 채 물었다.

“일어날 수 있겠어요?”

“부축을 좀 해 준다면.”

체이서의 약한 모습이라니 정말이지 낯설어도 너무 낯설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깨어나서 정말 다행이야.’

의사가 말한 최악의 상황이 벌어질까 봐 얼마나 노심초사했는지 모른다.

에블린은 훌쩍이면서 체이서가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을 수 있도록 부축했다.

미지근한 물도 천천히 마실 수 있게 도와주니 그는 조금 전보다 한결 나은 표정으로 편히 미소를 지었다.

“……며칠이나 지났지?”

“벌써 8일이나 지났어요.”

“오래도 누워 있었군.”

체이서가 속 편한 얼굴로 웃고 있는 모습을 보니 에블린은 이상하게 제 속이 타는 것만 같았다.

에블린이 더 그를 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이자 그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래? 내가 쓰러져 있는 동안 무슨 일 있었나?”

“…….”

“응? 누가 너를 괴롭히기라도 했나? 감히 누가?”

에블린이 고개를 들지 않고 묵묵부답이자 체이서의 목소리에 조급함이 담기기 시작했다.

“응, 에블린?”

계속되는 채근에 에블린이 꾹 닫고 있던 입을 열었다.

“……당신이에요.”

“뭐?”

“당신이 나를 괴롭혔다고요.”

에블린이 다시 고개를 들어 올리자 눈물이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뺨 위로 흐르고 있었다.

“절대로 안 다친다면서요.”

“…….”

“그러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면서요. 다음 날 저랑 같이 산책도 하고 식사도 하자고 했잖아요. 그런데 왜, 왜…….”

주르륵 흘러내린 눈물이 턱에 대롱대롱 맺혔다가 뚝, 뚝 소리를 내며 아래로 떨어졌다.

무릎에 올린 주먹 위로 후드득 떨어지는 눈물방울을 보며 체이서는 적잖이 당황한 듯 보였다.

이제 막 일어난 환자에게 이렇게 투정을 부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에블린은 멈추지 못했다.

“내가 얼마나, 얼마나…….”

털어내고 싶은 속마음들은 한가득하였지만 벅차오르는 감정에 아무런 말도 꺼낼 수가 없었다.

“울지 마.”

“안, 안 울어요.”

에블린은 다시금 억지로 눈물을 참으면서 체이서의 손을 소중하게 붙잡았다.

“다행이야, 진짜.”

훌쩍이면서도 금세 진정하는 에블린의 모습에 체이서는 기이한 감정이 피어나는 걸 느꼈다.

‘이상하지.’

에블린은 분명 체이서를 싫어하고, 증오했다.

현실에 체념한 듯싶다가도 감정이 격해질 때 보이는 솔직한 모습은 그에 대한 원망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모습은 꼭…….’

제 부상에 슬퍼하고, 회복에 기뻐하는 에블린의 모습을 보다 보면 자신이 그녀에게 특별한 존재라도 되는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내가 걱정되었나?”

“당연한 소리를 하고 그래요. 그렇게 크게 부상을 입었는데 걱정하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어요.”

“이대로 내가 죽었으면 네게도 좋은 일 아닌가? 굳이 이혼할 필요 없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조용한 곳으로 가서 원하던 삶을 살면 되잖아.”

체이서는 그 말을 꺼낸 것을 곧바로 후회하였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창백하게 질린 에블린의 얼굴에는 지금껏 보지 못했던 감정이 서려 있었다.

‘아니, 딱 한 번 본 적이 있다.’

수도원의 가족들의 처참한 죽음을 보았을 때, 에블린은 저렇게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표정으로 슬퍼하였다.

그녀는 파르르 떨리는 아랫입술을 물고서는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하였다.

“……당신이 죽기를 원할 정도로 이혼을 바라는 건 아니에요.”

이런 대화가 싫어 고개를 돌린 걸 알면서도 체이서는 대화를 넘기지 않고 주제를 이어 갔다.

“하지만 에블린 너는 나를 별로 안 좋아하잖나.”

“…….”

답답함을 숨기지 못한 에블린이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체이서를 응시했다.

“내가 밉지 않아?”

“……미워요, 미워 죽겠어요.”

울분이 섞인 얼굴 위로 여러 감정이 떠올랐다.

분노, 걱정, 안도, 체념, 여러 감정이 순식간에 지나고서 마지막으로 떠오른 건 분명…….

“미워 죽겠는데도 걱정이 되는 걸 어떻게 하라고요.”

에블린은 홧김에 입을 열었다 부끄러움이 몰려왔는지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붉게 달아오른 얼굴은 이제 그녀가 갈무리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것을 보여 주고 있었다.

‘어쩜 이리도 한결같은 사람일까.’

“방심해서 그랬어. 부상자가 감염자인 걸 예상하지 못한 내 탓이야.”

“……당신 원래 방심 같은 거 안 하는 사람이잖아요.”

“누구 덕에 마음씨가 조금 넓어져서 말이야.”

그 ‘누구’가 자신을 칭하는 것을 알아차린 에블린의 얼굴이 또다시 일그러졌다.

“그렇다고 네 탓이라는 건 아니야.”

“……다친 건 그것 때문만은 아니잖아요.”

“방심해서 폭발에 휘말린 것 말고? 아, 능력 과부하? 부상자를 줄이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일이었어.”

“……저주 때문이면서 왜 자꾸 거짓말해요?”

청산유수처럼 쏟아지던 체이서의 말문이 턱 하고 막혔다.

“블러드윈에게 들었나?”

차가운 목소리에 에블린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그분께도 들었고, 또…….”

그녀는 긴장된 얼굴로 한참이나 머뭇거리더니 결국 힘겹게 입을 열었다.

“사실 얼마 전에 선대 공작님께서 사람으로 돌아왔어요.”

더스틴이 무사히 사람으로 돌아왔다는 퍽 반가운 소식에 체이서는 웃음을 터트리지 않기 위해 참아야 했다.

“당신이 능력을 사용하면서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어서 그렇게 고통스럽게 살아온 줄 몰랐어요.”

“적당히 조절하면 고통스러울 일도 없어. 이번이 특별한 경우여서 그렇지.”

“하지만…….”

에블린은 꼭 자신이 죄인이라도 된 것처럼 몸을 움츠렸다. 체이서는 그런 에블린의 손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그녀를 다독였다.

“능력을 과하게 사용하면 몸에 이상이 와. 하지만 지금까지 그러지 않았으니 앞으로도 괜찮을 거야. 네가 내 옆에만 있어 준다면.”

“저는 아무 쓸모도 없잖아요.”

‘그럴 리가.’

익숙하고도 반가운 청량한 기운은 계속해서 그녀가 쥔 손을 타고 전해지고 있었다.

체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고개를 저었다.

“지금까지 네가 옆에 있어 주었을 때는 괜찮았어.”

“…….”

“믿기지 않겠지만 정말이야.”

깨어났을 때 속이 틀어지는 것만 같은 고통이 사라진 탓일까?

‘내가 밉지만 죽는 건 보기 싫다고?’

자꾸만 웃음이 터져 나올 것 같아 참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나를 죽였어야지.’

역시 에블린은 루이사가 되기에는 잔혹함이 부족했다.

그럼에도 이런 모습이 에블린다워서 만족스러웠다. 

“왜 웃어요? 내가 우는 게 그리 기분이 좋아요?”

계속해서 자신을 신경 쓰고, 관심을 주고, 걱정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놓치고 싶지 않아.’

“좋아.”

“뭐라고요?”

앞으로도 이런 모습을 제게만 보여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욕심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루이사는 욕심이 많은 가문이지.’

체이서 또한 루이사의 일원이고, 그에 걸맞은 교육을 받으며 자라 왔다.

그러니 원하는 그녀의 시선을 독점하기 위해서는 약간의 거짓말을 내뱉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네가 나를 걱정해 준다는 사실이 기뻐.”

“…….”

“계속해서 나만 봐 주면 좋겠어.”

“……거짓말.”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해?”

욱하는 감정이 얼굴에 선명히 드러나는 것을 보며 체이서는 그녀의 손을 마주 잡으며 웃었다.

“이건 아마도 내가 너에게 특별한 마음을 품고 있어서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맞잡은 손에 긴장한 듯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너는 어떻게 생각해?”

“……어, 어떻게 생각하긴요. 아무래도 헛소리하는 걸 보니 아직도 아픈 것 같네요!”

체이서는 다급히 벗어나려는 에블린의 손에 깍지를 끼며 그녀가 빠져나가지 못하도록 막았다.

“아까도 말했지만 보통이라면 그렇게 방심하지 않았을 거야. 아니, 오히려 다른 이에게 명령을 내려 부상자를 거두게 했겠지.”

“…….”

“너라면 이러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몸이 자연히 움직였어. 그래, 어느 순간부터 내 머릿속에 네가 가득해졌단 말이야.”

“…….”

“처음의 만남이 좋았다면 우리 사이가 이렇게까지 틀어지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자꾸만 들어.”

“그만. 더는 말 하지 마요.”

에블린이 듣기 싫다는 듯 고개를 저었지만, 체이서는 멈추지 않았다.

“지금에 와서 말하기에는 너무 늦었지만, 나는 진심으로 그때의 일을 후회하고 있어.”

“제발, 그만…….” 

“에블린, 더스틴 그자는 마물로 죽기에는 너무 많은 죄를 지은 자야. 나는 그를 인간으로 되돌려 누구보다 끔찍한 죽음을 선사해 주고 싶었어.”

“…….”

“그래서 그를 살려 둔 거였어.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하지 못해서, 너를 속여서 미안해.”

에블린의 두 눈이 사정없이 떨리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바로 앞에서 응시하던 체이서는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

“앞으로는 너를 속이는 일 없을 거야. 내 이름을 걸고 맹세할게.”

“이런다고 달라지는 건 없잖아요. 이미, 이미…….”

가여울 정도로 떨고 있는 에블린을 보며 체이서는 빙긋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 우리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보지 않겠어?”

“…….”

“에블린. 나와 연애해 보지 않을래?”

체이서의 두 눈에 담긴 에블린의 얼굴은 터질 것처럼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몰라볼 수 없는 노골적인 감정.

그래, 에블린이 제게 보이는 저 감정은 사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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