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화
블러드윈은 그 말을 끝으로 방을 나섰다.
굳게 닫혀 버린 문을 한없이 바라보던 에블린은 힘없이 자리에 주저앉았다.
더스틴의 말에 의하면 분명 체이서와 블러드윈은 심각한 학대를 받고 자랐을 것이다.
잘못도, 죄도 없는 두 사람이 에블린 대신 살아남았다는 이유로 저주와 학대를 받으며 이 험악한 가문에서 자랐다니, 얼마나 고통스러운 일이었을까.
“어쩌면 내가 받아야 할 고통이었을지도 모르는데.”
힘없는 손을 오랜 시간 붙잡고 있어도 평소와 달리 손은 차갑기만 하였다.
이 모든 상황이 자신 때문에 벌어졌다고 생각하니 숨이 가빠져 오며 머리가 어질거렸다.
“당신이 미웠어.”
체이서가 의식이 없는 상황에서 용기라도 생겼는지 솔직한 마음이 막힘없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정말 미워서 다시는 보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었는데…….”
이상하게도 다시 눈물이 차올라 눈앞이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죽기를 바란 건 아니었단 말이야.”
테라스가 난 창 쪽에서 푸르스름한 새벽빛이 방으로 스며들어왔다.
에블린은 무심코 고개를 들어 올렸다가 빛이 들어오는 창가 앞에 붉은색 러넌큘러스가 담긴 화병을 발견하고 말았다.
“……아, 정말.”
결국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기 시작했다.
에블린이 현재를 뒤로하기 위해 두고 떠난 화려한 꽃은 다른 이의 손을 빌려 두 사람의 공간에 장식되어 있었다.
아무리 이 현실에서 도망치려고 해도 결국 이 방으로 돌아온 에블린처럼 있어야 할 곳으로 온 것이다.
“그냥 당신이 너무 밉고 서운했어.”
제멋대로 날뛰는 감정은 정말 최악이고, 인제 와서 다 부질없는 마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블린의 속삭임은 멈추지 않았다.
“당신이 원망스러웠던 이유는 내가, 내가 그만큼 당신을 믿었기 때문이야. 모든 걸 잃은 내게 당신은 구원자 같아서 그래서 당신 덕에 삶의 의지를 찾을 수 있었으니까. 그런 당신이 의도를 가지고 나를 곁에 두었다는 게 나는 너무나도…….”
목이 막혀 이상의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픈 이 감정은 낯설지 않았다.
‘꼭 수도원 가족들이 죽었을 때와 같아.’
아무도 모르게 인지하고 있던 호감은 에블린조차도 눈치채지 못하게 그녀의 마음속에서 서서히 크기를 키워 갔다.
그리고 결국 사랑이라는 감정을 만들어 내고 말았다.
‘사랑하고 싶지 않아.’
에블린은 이 거대한 감정을 더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어쩌면 지금까지 부정하고 있었지만, 이 감정을 인지하였기에 이 세상에서 자신의 존재를 지우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미 늦은 거겠지.’
혼자 앞질러 간 감정은 결국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져서 이리도 에블린을 괴롭게 만들었다.
“빌어먹게도 나는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나 봐.”
당사자에게 닿지 않기에 내뱉을 수 있는 고백은 그녀를 더욱더 처량하게 만들 뿐이었다.
에블린은 그에게 닿기를 바라며 애원하듯 소원을 빌었다.
“그러니까 죽지 마.”
에블린은 체이서의 손을 꼭 붙잡고서는 간절히 속삭였다.
“당신, 절대로 죽으면 안 돼.”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그럼에도 에블린은 체이서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
어두컴컴한 시험장의 미로는 이제 어린 에블린에게 익숙한 장소가 되었다.
에블린은 익숙하게 소년의 뒤꽁무니를 쫓고 있었는데 언제나처럼 그녀를 무시하던 소년이 무심코 뒤를 돌아보았다가 갑자기 단걸음에 그녀의 앞으로 다가왔다.
“너, 꼴이 왜 그래?”
“뭐가?”
“꼭 누구한테 맞은 것처럼 엉망이잖아.”
어린 에블린은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그녀의 상처를 살펴보는 모습에 이를 보이며 해맑게 웃었다.
“넘어졌어.”
엉망이 된 어린 에블린의 모습을 보며 소년이 혀를 찼다.
“넘어져서 생긴 상처는 아닌데. 딱 봐도 누구한테 맞은 상처잖아.”
“어라, 많이 맞아 봐서 아는 거야?”
소년은 그녀의 말을 무시한 채 몸을 살피다 결국 손바닥에 난 상처도 발견해 버리고 말았다.
“와, 네가 손을 잡아 준 건 처음이야.”
평소 이런 식으로 장난을 치면 소년은 질색하는 얼굴로 망설임 없이 손을 놓았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이건 넘어져서 생긴 상처가 맞네. 누가 때려서 도망치려다 넘어졌나 보지?”
정확한 추측에 어린 에블린은 당황하면서도 부러 밝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너도 알다시피 내가 좀 덤벙거리잖아.”
“쯧. 상처 나면 네 손해인 것 몰라? 약은 없어?”
“지난번에 네게 준 게 다인데.”
지금의 소년은 누구도 쉽게 건드리지 못할 정도로 강해졌지만 처음에는 아니었다. 처음 미로에 갇히기 전에 받았던 응급 키트는 금방 다 써 버렸고, 에블린은 다친 소년에게 제 약을 나누어 주었다.
“너 쓸 건 있다며?”
“당연히 거짓말이지. 너 빚지는 거 싫어해서 그냥 주려고 하면 안 받잖아.”
거짓말로 상황을 모면했었다.
에블린의 해맑은 말에 소년의 얼굴이 썩어 들어갔다.
“어차피 너는 나 죽일 거라면서? 그러니 조금 다치면 어때. 결국엔 죽을 건데.”
신랄한 말에 소년의 표정이 더욱더 안 좋아진 것을 보며 에블린은 씨익 웃었다.
“왜? 미운 정이라도 들었어? 그래서 죽이기 싫어졌어?”
“헛소리하지 마. 이 미로에서 빠져나가기 전에 너도 죽일 거니까.”
“아닌데, 걱정하는 것 보니까 정들어서 못 죽일 것 같은데.”
“죽일 거라니까?”
“진짜?”
매섭게 쏘아붙이던 소년은 에블린의 되물음에 이번에는 쉽게 답을 하지 못하였다.
그런 소년의 모습을 보며 에블린은 뭐가 그리 기쁜지 함박웃음을 지으면서 갑자기 소년을 끌어안았다.
“있지, 나중에 나 죽여도 되니까 이제 이름 알려 주면 안 돼?”
“뭐야, 이거 안 놔?”
소년은 살벌한 목소리로 경고했지만 그렇다고 억지로 에블린을 떼어 내지 않았다.
“그때도 말했지만 내 이름은 에블린 바이아르도야. 물론 이제 뒤의 성은 못 쓰는 처지가 되었으니 에블린이라고 불러 줘.”
에블린은 소년이 서서히 제게 마음을 열었음을, 이제는 저를 해치지 않을 것을 알았다.
“…….”
그러니 이렇게 막무가내로 끌어안고 있어도 불로 공격하지 않는 것일 테니까.
에블린은 소년을 껴안은 채 그의 눈에 띄지 않게 웃고 있었다.
소년에게 이름을 알려 달라고 했지만 크게 궁금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마치 소년이 누구인지 이미 알고 있다는 듯.
“응?”
해맑게 되묻는 물음에 소년은 조심스럽게 에블린을 떼어 냈다.
소년은 낮게 한숨을 쉬더니 이내 그녀가 바라고 바라던 이름을 알려 주었다.
“체이서.”
밖과 연결되지 않은 미로 안인데도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소년은 이런 자기소개가 부끄러운 듯 고개를 돌린 채 답할 뿐이었다.
“난 성이 없으니까 그냥 체이서라고 불러.”
***
‘……뭐지?’
누군가가 제 어깨를 붙잡고 흔들자 얕은 수면에서 깨어났다.
“마님, 이곳에서 쪽잠 주무시지 말고 옆방에서 편히 주무세요.”
“아냐, 깜빡 존 거야. 그리고 다른 방에 가면 오히려 잠이 안 오는걸.”
“간호도 좋지만, 마님의 몸 상태도 신경 써 가면서 하셔야죠.”
걱정스러운 목소리의 주인은 마야였다.
에블린은 괜찮다며 웃어 주고는 엉거주춤 구부려진 허리를 일으킨 뒤 찌뿌둥한 어깨를 매만졌다.
아무래도 간호하다 말고 깜빡 잠이 든 모양이었다.
‘그런데 조금 전의 꿈은 뭐지? 내가 미로에서 체이서를 만난 적이 있었던가?’
예전에도 꿈에서 본 적이 있는 이상한 소년의 정체가 체이서라는 사실은 에블린을 퍽 혼란스럽게 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체이서와 함께 어울렸던 기억은 없는데.’
에블린은 미로 속에서 친한 사람 한 명 없이 홀로 버티고는 했기에 기억과 꿈의 내용은 맞지 않았다.
‘내가 피곤하긴 한가 보다. 이런 이상한 꿈도 꾸다니.’
체이서가 의식을 잃은 지 벌써 일주일이 훌쩍 넘고 8일째가 되었다.
깨어날 기미가 조금도 보이지 않는 이를 간호하는 것은 생각보다 더 괴롭고 슬픈 일이었다.
씻을 때를 제외하고는 옆자리를 떠나지 않으려는 에블린 때문에 저택의 사람들도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그래도 뒷일은 블러드윈과 데몬스가 처리해 줘서 다행이야.’
데몬스는 체이서가 부상을 입은 현장을 더욱더 꼼꼼히 점검한 뒤 마물들을 모조리 사살하였고, 루이사 공작의 업무는 블러드윈이 대신하여 봐주고 있었다.
“이제 당신만 일어나면 될 텐데.”
기적적인 회복력으로 옅은 상처를 제외하고는 외상이 모두 회복되었음에도 체이서는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에블린은 괜히 체이서의 코끝을 톡 건드리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정갈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형수님, 안에 계십니까?”
블러드윈이었다.
‘평소에는 노크만 하고 들어오더니.’
피가 이어져 있지 않아도 꽤 우애가 좋았는지 블러드윈이 매일 병문안을 찾아오고는 하였다.
처음에는 그를 제대로 맞이할 정신도 없었지만, 마야로부터 간호하는 이가 건강해야 한다는 소리를 듣고 애써 힘을 내는 중이었다.
에블린의 눈짓에 마야가 문을 열어 주었고, 블러드윈은 평소와 달리 차분한 얼굴로 안으로 들어오더니 그녀보고 잠시 나가 있으라 명했다.
‘뭐지?’
평소에는 마야가 있어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기에 의아하다고 여기고 있었는데 다가온 그의 표정이 심상치가 않았다.
“……무슨 일 있었나요? 표정이 왜 이렇게 안 좋으세요?”
“형수님, 혹시 더스틴 그 작자와 예전부터 아는 사이였습니까?”
아니나 다를까 그의 갑작스러운 질문은 에블린을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네?”
“이상하게 그자가 자꾸 형수님을 불러오라며 난동을 피우더군요.”
블러드윈은 더스틴을 직접 마주하고서 에블린을 향해 당분간 별관 출입을 자제하라고 말하였다.
에블린 또한 체이서의 간호를 하다 보니 정신이 없었기에 당연히 동의하였고, 더스틴은 일주일 넘게 에블린을 만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아무래도 내가 나타나지 않아 애간장이 타는 모양인데.’
그의 행동이 결국 블러드윈에게 의심을 싹틔우고 말았다.
‘설마 그자가 내 정체에 대해 다 말한 것은 아니겠지? 말했다면 어떻게 하지?’
더스틴을 향한 분노는 분명 자신에게까지 이어질 것이다.
“혹시…….”
넘쳐 오르는 불안감에 에블린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회피해 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뒤의 질문이 무서워 당장이라도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었다.
그때, 무언가가 툭 하고 에블린의 손끝을 건드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