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86)화 (86/159)

86화

로비부터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까지 한눈에 보아도 꽤 많은 핏방울이 이어져 있었다.

에블린은 멍한 눈으로 엉망이 된 로비를 쭈욱 살펴보았다.

급히 뛰어오는 바람에 머리가 헝클어져 엉망이 되고, 눈물이 번진 눈가는 붉게 물들어 있었다.

평정을 잃은 에블린의 모습에 피를 지우던 하녀들이 엉거주춤 굽히고 있던 허리를 세우며 그녀의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하녀들의 모습에 불안함이 거센 파도처럼 밀려왔다.

“……마야, 체이서는 어디에 있지?”

에블린은 최대한 침착하게 물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현재 침실에서 치료 중으로 알고 있습니다.”

마야의 대답이 끝나기 무섭게 에블린은 빠른 걸음으로 계단으로 향했다.

“마, 마님!”

저를 부르는 마야의 애타는 목소리에도 에블린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뛰다시피 계단을 올랐다.

그리고 마침내 침실 앞에 도착했을 때, 익숙한 얼굴의 기사들이 에블린의 앞을 가로막았다.

“비키게.”

“죄송합니다, 마님. 가주님의 치료가 끝나기 전에는 아무도 들이지 말라 하셨습니다.”

“누가 그런 명령을 내렸나? 쓰러진 체이서가? 나를 안으로 들이지 말라 했나?”

에블린은 당장이라도 그들을 뚫고 들어갈 기세로 낮게 읊조렸다.

붉게 충혈된 두 눈에 기사는 차마 더 눈을 마주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명을 내린 이가 누구냐 물었네.”

그때 굳게 닫혀 있던 침실 문의 반쪽이 천천히 열리더니 안에서 예상치 못한 인물이 나왔다.

“제가 그리 명했습니다, 형수님.”

블러드윈이 서늘히 가라앉은 눈으로 에블린을 응시했다.

“정신이 혼미한 와중에도 형님께서 자신이 다친 모습을 보며 여린 형수님께서 혹시나 충격받아 쓰러지지는 않을까 걱정하시길래…… 제가 형님을 대신하여 명령을 내린 것이니 너무 이들을 탓하지 마시지요.”

에블린이 대꾸하지 않고 안으로 들어가려 움직이자 블러드윈은 벽에 몸을 기대고는 그녀가 들어갈 수 없도록 길을 막았다.

“뭐 하는 짓입니까?”

에블린이 블러드윈을 쳐다보지도 않고 말하니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보니 쓸데없던 명령 같군요. 이리도 강인한 눈빛을 지니셨는데 형님께서는 아무래도 사람 보는 눈이 없나 봅니다.”

블러드윈이 쏘아붙이듯 말했으나 에블린의 귀에는 담기지 않았다.

그녀가 제 말에 관심도 주지 않고 침실 안만 들여다보자 블러드윈은 결국 한숨과 함께 몸을 틀었다.

“저는 분명 막았습니다. 무작정 안으로 들어온 건 형수님이십…….”

블러드윈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에블린이 그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섰다.

‘저 모습의 어디가 나약하다는 거야?’

블러드윈은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와중에도 에블린에게 제 모습을 보이지 말라고 신신당부하던 체이서의 모습을 떠올리다 고개를 내저었다.

‘홀려도 단단히 홀렸나 보네.’

체이서가 누군가를 걱정하는 모습은 퍽 낯선 일이었다.

‘형님은 예전부터 저 여자에게 약했었지.’

오랜 시간이 흘렀음에도 선명한 시험장에서의 기억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저 여자애 건들면 아무리 네가 쓸모가 있다고 해도 가만두지 않을 거야.’

체이서의 뒤를 귀찮게 따라다니는 여자애가 있어 선의를 베풀어 쫓아내 주었더니 그걸 뒤늦게 알고서 성을 냈을 때부터 심상치 않았다.

‘그 후로 찾지도 않길래 잊어버린 줄 알았더니.’

블러드윈은 울먹이는 얼굴로 체이서를 살피는 에블린을 보며 츠츠 혀를 찼다.

그녀는 엉망이 된 체이서의 모습에 결국 못 참고 눈물을 터트리고 있었다.

그녀는 절망 어린 얼굴로 체이서의 손을 꼭 붙잡고 있다가 막 치료를 마친 의사가 무어라 말하자 곧바로 입을 다물었다.

끅끅거리며 울음을 참는 모습을 보니 시끄럽게 하면 안 된다고 주의라도 받았나 보다.

‘아니, 울면 좀 어떻다고 곧바로 뭐라고 하는 거야?’ 

팍 짜증이 올라와 보다 못한 그가 에블린의 곁으로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괜찮습니다, 형수님. 형님께서는 금방 회복하고 깨어나실 겁니다.”

“하지만 공자님, 현재 가주님의 내상이 너무 심각합니다. 마물의 공격을 간신히 피해 감염이 되지 않았지만, 폭발에 휘말려 장기가 뒤틀릴 뻔하였지 않습니까. 상처의 회복 정도도 더뎌 깨어나셔도 한동안 요양을 하셔야 할 겁니다. 혹시 상처에 마물의 피가 닿았을지도 모르기에 앞으로도 주의 깊게 살펴봐야 하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눈치 없는 의사는 상태의 심각성을 구구절절 읊다가 블러드윈의 눈에 서린 축객령을 읽고선 고개를 꾸벅 숙이고서는 방을 나섰다.

안 그래도 낮게 가라앉은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어진 상황이었기에 둘 사이에는 아무런 대화 없이 침묵이 흘렀다.

“……체이서의 상태가 매우 심각하군요.”

먼저 입을 뗀 건 에블린이었다.

에블린은 처참한 체이서의 모습을 보며 울컥하고 올라오는 눈물을 삼켰지만, 울먹이는 목소리까지 막을 수는 없었다.

“상태가 이렇게 심각한데 감염 여부도 확실치 않다고요?”

복부 전체가 붕대에 감싸인 모습은 의료 지식이 없는 에블린이 보기에도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의사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했을 뿐입니다. 시간이 이렇게 흘렀는데도 마물로 변하지 않았으니 형님께서는 괜찮을 겁니다.”

안심하라는 듯한 말에도 에블린의 심장은 도무지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궁금한 것이 한둘이 아니었다.

하지만 머릿속에 가득 찬 질문을 던졌다가 판도라의 상자를 연 것처럼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절망적인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 같았다.

“기습당했다고 들었어요. 체이서가 기습을 당할 만큼 약한 이는 아니지 않나요?”

“무너진 건물 자제에 깔린 채 도움을 요청했다 하더군요. 평소라면 구조 일은 다른 이에게 맡겼겠지만, 누군가에게 감화라도 되었는지 어려운 이를 외면하지 않고 손수 나섰다더군요.”

블러드윈의 말에 에블린은 낮게 탄식했다.

자세히 말하지 않았지만 분명 ‘그 누군가’는 에블린을 가리키며 하는 말이었기에 더욱 복받친 감정이 밀려왔다.

‘결국 이 모든 게 나 때문이나 다름없는데 끝까지 도망만 치려 하고. 정말이지 난 못났구나.’

결국 에블린은 가장 묻고 싶었던 것을 물었다.

“……마야의 말로는 체이서가 능력을 과도하게 사용해서 의식불명이라고 하던데요.”

“아, 주위에 피해 가지 않도록 폭발해 흩어지는 시체를 모두 태워 버리는 일에 힘을 많이 써서 그랬을 겁니다. 능력 과부하 현상이니 그리 신경 쓸 부분은 아니에요.”

걱정을 덜어 줄 생각인지 블러드윈은 가벼운 어조로 답해 주었으나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에블린은 이미 알고 있었다.

상황을 외면할 수 있는 대답이니 그대로 고개를 끄덕이면 되련만 뻣뻣하게 굳은 목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 제발 표정 좀 펴세요. 형님이 깨어나면 저를 질책할 것 같으니.”

이어지는 배려에 에블린은 결국 진실을 외면할 수가 없었다.

“저주가 아니고요?”

“…….”

나지막하게 내뱉은 말에 블러드윈의 목소리가 멈추었다.

에블린은 체이서의 손을 붙잡은 채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평소의 익살맞은 표정 대신 적의가 서린 얼굴의 블러드윈을 마주한 순간, 그녀는 제가 정확하게 짚었음을 알 수 있었다.

‘체이서와 닮았네.’

누가 함께 자란 형제 아니랄까 봐 싸늘히 굳힌 얼굴이 퍽 체이서와 닮아 있었다.

“어디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더스틴 루이사, 그의 짓이죠?”

“……선대 공작의 능력이 저주인 건 맞지만 형님의 상태와는 무관합니다. 괜한 억측하지 마시죠.”

딱딱해진 목소리에는 잔뜩 경계가 서려 있었다.

‘하긴. 약점이 드러나는 거니 당연하지.’

에블린은 눈을 깜빡이며 서글픈 감정을 숨겼다. 그리고 차분히 가라앉은 눈으로 조금 전의 있었던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조금 전 감염된 마물의 상태를 보기 위해 별관을 찾아갔었어요.”

“형님께서 호위 없이 별관에 찾아가게 두지는 않으셨을 것 같은데.”

“……마물의 상태가 궁금해서 멋대로 찾아간 거예요. 멀리서 지켜보기만 할 생각으로 갔었죠.”

작은 거짓말에도 양심이 쿡쿡 찔려 아파 왔다.

‘헛소리하지 말라고 일축하려나?’

에블린은 심장을 짓누르는 무거운 고통을 외면하며 설명을 이어 갔다.

“감옥에는 마물이 보이지 않았어요. 대신 그 안에는 사람이 한 명 갇혀 있었죠. 그는 자신을 더스틴 루이사라고 소개했어요.”

“형수님, 이런 질 나쁜 농담은 저도 받아 주기가 힘듭니다.”

에블린이 예상했던 대로 블러드윈은 믿기 어렵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화를 낼 것처럼 미간을 잔뜩 구긴 것에 에블린이 이해한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일로 장난을 치지는 않아요.”

단호한 그녀의 말에 블러드윈의 표정 또한 심각해졌다.

“어떻게 사람이 된 거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자기소개하고 대화를 시작하려던 도중 갑자기 마야의 부름에 급하게 본관으로 뛰어왔으니까요.”

대화할 시간이 부족했다는 말을 꺼내자 블러드윈이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것 같은 기세로 몸을 틀었다.

“잠시만요!”

에블린이 다급히 블러드윈을 불러세웠다.

“……형수님, 제가 지금 당장 그 사람의 상태를 확인하지 않으면 미쳐 버릴 것 같거든요? 그러니 급한 일이 아니라면 나중에 이야기하죠.”

“딱, 딱 한 가지만 물을게요.”

에블린의 간절한 얼굴에 블러드윈은 문으로 향해 있던 몸을 틀었다.

“알겠으니 그런 얼굴 말고 궁금한 거 물어나 봐요.”

더스틴과 대화를 하기 전에는 체이서가 아무리 그를 싫어해도 선대 공작으로서 예우하기 위해 살려 둔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특별한 이유가 따로 있다면?

“……선대 공작은 어떤 자였죠?”

“다행히 답하기 쉬운 질문이네요.”

블러드윈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산뜻한 목소리로 답했다.

“더스틴 루이사, 그자는 세상에서 제일 끔찍하고 역겨운 버러지입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