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화
한껏 감동에 취한 사내의 얼굴은 꼭 악귀와도 같았다.
“이제 다른 놈들은 필요 없다! 네가 왔으니 이 가문은 너의 것이 될 거야! 그리고 이 가문에 내 피를 흐르게 하는 거지!”
자신이 얼마나 끔찍하고 추한 짓을 했는지 더스틴은 전혀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어째서 내 인생은 이렇게 엉망인 걸까.’
전생에 나라를 팔아먹은 것도 아닌데 어째서 가족이라 불릴 만한 이들이 이렇게 모두 다 최악인지 모르겠다.
‘……그럼 나 때문에 체이서와 블러드윈은 괴로운 시절을 보내 왔다는 건가? 그걸 내색하지도 않았고?’
그간 체이서는 능력을 사용하였을 때 피곤해 보이는 것 외에 큰 증상이 없었다.
그렇기에 그가 지금껏 고통을 참으며 살아왔음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한 일이었다.
‘나 때문에 말이지……. 아무런 능력도 없는 나를 가주에 앉히고 싶어서? ’
말로는 딸을 보게 되어 기쁘다고 하고 있었으나 더스틴의 진심은 그게 아닐 것이다.
‘자신의 계획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뻐서 그렇겠지. 그렇게 제 피를 루이사에 흐르게 하고 싶었나?’
에블린은 경멸에 찬 얼굴로 더스틴을 노려보았다.
“그래서 트렐로니 백작은 어디에 있느냐? 그가 있어야 네가 다음 공작위 계승을 할 수 있도록 도움을 받을 수 있을 텐데…….”
“트렐로니 백작은 죽었어요. 공작 부인을 멋대로 납치하여 죽이려고 했거든요.”
“공작 부인? 내 아내라면 10년 전에 죽었을 텐데?”
양부모고 친부모고 다 엉망이지만 상관없었다.
‘그래, 그러니 실망할 것 없어. 어차피 내 가족들은 수녀님과 동생들 뿐인걸. 친아버지가 어떤 존재든 나와 상관없다고.’
에블린은 눈을 깜빡이며 좌절이 서린 두 눈동자를 금세 감추었다.
“혹시 이 감옥에 어쩌다 갇히게 되었는지 기억하시나요?”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 분명 마물화에 감염된 인간에게 물렸던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그 후의 기억은 없구나.”
에블린을 먹이로 대하지 않는 모습만 보아도 그가 마물로 지냈을 때의 기억이 없다는 건 알 수 있었다.
‘트렐로니 백작이 어떻게 죽었음을 모르는 것에 확신할 수 있었지만.’
정보를 얻었지만 지금 중요한 건은 이게 아니었다.
“예, 당신은 그 이후로 마물화에 감염되어 이곳에 따로 격리되어 계셨습니다. 보통 마물화에 감염된 이는 사살이지만 특별한 경우였죠.”
“그래, 나는 루이사 공작이니 다른 이들과는 다르지.”
당연하다는 듯한 반응에 에블린은 그를 비웃을 뻔한 것을 삼키고서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치맛자락을 잡고서는 예를 갖춰 그에게 인사하였다.
“처음 뵙겠습니다, 선대 공작님. 얼마 전 체이서와 혼인을 올린 에블린 루이사라고 합니다.”
“선대 공작? 혼인?”
더스틴은 두 눈을 부릅뜨더니 이내 이를 갈기 시작했다.
“나를 이딴 곳으로 밀어 넣고 기어코 체이서 그놈이 작위를 물려받았더냐? 트렐로니 백작은 그놈을 막지 않고 무얼 한 게야!”
분노가 들끓는 목소리에도 에블린은 침착하게 진실을 말해 주었다.
“직접 죽이셨는데 기억하지 못하시는 겁니까?”
“……뭐?”
“아, 기억에 없으시다고 하셨죠. 그럼 차근차근 설명해 드려야죠. 트렐로니 백작은 현 루이사 공작의 약혼녀를 납치, 살해미수로 처벌받게 되었습니다. 그는 죽기 전까지 선대 공작님을 보고 싶다고 하였고, 체이서는 그의 소원을 들어주었습니다. 직접 두 분이 만날 수 있게 주선해 주었지요.”
이렇게 모든 진실을 알게 되니 이제야 트렐로니 백작이 벼랑 끝에서 저를 밀어내려고 했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허나, 너는 살아 있으면 안 된다. 살아 있어서는 안 될 존재야!’
체이서를 증오하며 꺼낸 말이 아니라 에블린 존재 자체를 부정했던 것이다.
‘그때 내가 누구인지 알아차렸으니까.’
트렐로니 백작이 아무리 더스틴의 명을 따른다고 한들 그는 루이사의 가신이다.
그러니 아무런 능력이 없는 에블린이 루이사 공작저에 들어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을 것이다.
“트렐로니 백작은 그때 죽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네 말은.”
“제가 체이서의 약혼녀이자 현 공작 부인입니다.”
마찬가지로 굳이 계약에 의한 결혼이라느니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 가지 잘못된 점을 짚어드리자면 저는 아무런 능력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애초에 루이사의 시험에 통과할 수 없었죠.”
“뭐라고?”
경악이 서린 목소리에도 에블린은 그를 진정시킬 생각은 하지 않고 연달아 충격적인 말만 전하였다.
제게 끔찍한 진실을 알려 준 그가 괴로워하기를 바라며.
“또한 그와 자식을 볼 생각도 없으니 루이사 가문에는 당신의 피가 흐를 일이 없을 겁니다.”
말을 내뱉으면 내뱉을수록 에블린의 표정은 처참하게 일그러져 갔다.
“저는 당신의 의지를 따를 생각이 없으니까요.”
이를 악물며 마지막 말을 내뱉자 더스틴이 다급히 무어라 말하려고 하였다.
그때, 복도 너머에서 뜀박질 소리가 들려왔다.
“마님, 이곳에 계실 때가 아닙니다! 지금 본관에……. 맙소사, 공작 각하?”
처음 달려 나갔던 기사는 집사 대신 마야를 이끌고서 나타났다.
“어, 어떻게 공작, 아니 선대 공작 각하께서 다시 사람으로? 치료제 개발에 성공한 건가요?”
‘그러고 보니 이자가 나를 안다는 사실에 놀라서 갑자기 사람이 된 건 신경도 못 썼네.’
에블린은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더스틴의 앞으로 다가갔다.
“에블린……!”
더스틴이 곧바로 목소리를 높이자 에블린은 고개를 살짝 기울여 다른 이에게 들리지 않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낮게 속삭였다.
“하지만 아버지께서 저를 도와주신다면 이 의사를 바꿀 생각도 있습니다.”
“……역시 내 딸은 나를 실망시키지 않는구나!”
“가주의 반지는 어디에 있나요?”
“가주의 반지? 그러고 보니 원래 내 손에 있어야 할 반지가 사라졌구나. 마법이 걸려 있어 체이서 그놈이 강제로 앗아 갈 수도 없었을 텐데.”
“가주의 반지를 찾아서 제게 주세요. 반지를 손에 넣지 못한 이상 체이서는 완벽한 가주가 될 수 없을 테니까요.”
루이사 가문에 처음 들어왔을 때 가장 먼저 시작한 공부는 이 가문에 대한 역사였다.
‘가주의 반지는 가문을 대표하는 증표지. 체이서는 이자가 죽으면 자연스럽게 승계받을 테니 굳이 강제로 뺏을 노력도 하지 않았을 테고.’
이거라면 충분히 더스틴을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에블린의 예상대로 더스틴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로 갔는지 모르지만 내 꼭 찾아주마.”
만족스러운 대답에 에블린은 눈으로 인사를 한 뒤 허리를 바로 세웠다.
어느새 먹을 것을 가져온 다른 기사까지 합류하여 총 세 명이 두 사람을 놀란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선대 공작님께서 자연스럽게 치유된 모양이야. 다만 아직 온전히 안전하다고 판단하기 이르니 본관으로 모실 수는 없고. 별관에 머물 수 있도록 마야가 잘 준비해 줬으면 하는데.”
“예? 아, 예. 그럼요, 당연히 그래야지요.”
마야는 너무 놀란 나머지 멍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왜 그렇게 다급하게 달려온 거야?”
에블린의 물음에 마야는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다는 죄책감에 다급히 소리쳤다.
“아, 다름이 아니라 가주님께서 큰 부상을 입고 저택으로 돌아왔습니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마물로 인해 피해 본 거리를 순찰하시다 마물의 기습으로 인해 크게 다치셨다고……. 또한, 마물을 제압하는 와중에 이능력을 과도하게 사용하셔서 현재 의식불명 상태라 하십니다!”
‘과도한 능력 사용이라고?’
에블린은 설마 하는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철창 틈새로 더스틴이 비릿하게 웃고 있었다.
“저주가 제대로 발동한 모양이구나. 능력을 과도하게 사용했다고? 그렇다면 이 저주의 힘이 아주 지독하게 그 녀석을 괴롭히고 있을 거다.”
“…….”
기다렸다는 듯 설명을 해 주는 것에 에블린은 치가 떨림을 느끼고서는 자리를 박차고 뛰어나갔다.
저주를 걸었다며 낄낄거리던 끔찍한 웃음소리가 자꾸만 귓가에 맴돌며 불안한 마음에 불을 지폈다.
‘어떻게, 어떻게 해!’
걱정하는 에블린을 향해 체이서는 자신이 다칠 일은 절대로 없다고 하였다.
지금껏 위험한 임무를 하여도 크게 다친 적 없다며 안심시켜 주던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와 동시에 엉망인 모습으로 죽어 버린 수도원 가족들의 모습까지 스쳐 지나갔다.
‘체이서가 잘못되면 어떻게 하지……?’
참으로 우습게도 더스틴에게 충격적인 사실을 듣고서 가장 먼저 체이서를 동정했다.
자신의 존재 때문에 핍박받으며 살아온 그의 삶이 얼마나 불행했을지 짐작도 가지 않을 만큼 그가 너무도 가여웠다.
‘내가 없었더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텐데!’
루이사 시험에서 죽었더라면, 아니 애초에 이 세상에서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더스틴이 이런 일을 계획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바이아르도 백작가도 그렇게 처참히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을 것이고, 트렐로니 백작도, 돈만 노리던 재수 없던 제 형제들도 그리 허망하게 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모든 게 다 에블린의 탓이었다.
‘나는 태어나서는 안 됐었어.’
에블린은 자기가 어느새 울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앞만 보며 뛰고 있었다.
체이서의 능력은 감히 짐작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 하였다.
그렇다면 그런 체이서에게 저주를 건 더스틴은 얼마나 더 강한 사람이라는 걸까?
‘제발, 제발.’
에블린은 간절히 바랐다.
‘신께서 계신다면 그의 목숨을 이렇게 허망하게 가져가시면 안 돼요.’
고작 마물의 기습으로 인해 쉽게 죽을 이가 아니다.
그래, 체이서는 그렇게 약한 이가 아니다.
언제나 강압적이고, 자존심이 높고, 고집도 센 좋지 못한 성격이지만 그는 강한 사람이니 괜찮을 것이다.
‘체이서가 언제나 그랬잖아. 걱정하는 건 쓸데없는 일이라고.’
자꾸만 등 뒤를 엄습하는 이 불안한 감각은 무엇인지.
언제나 이런 재수 없는 예감은 들어맞고는 했지만, 이번만큼은 아니길 간절히 바라고 바랐다.
하지만 그녀의 잔혹한 신은 이번에도 그녀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았다.
에블린이 겨우 본관에 도착하자마자 마주한 것은 지독한 혈향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