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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오만한 구원자에게 (84)화 (84/159)

84화

‘뭐지? 저 사람이 어떻게 내 이름을 알고 있는 거지?’

에블린은 경계 어린 눈빛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마물이었던 이가 갑자기 사람으로 변해 있지, 반지는 보이지 않지, 그 와중에 선대 공작은 분명 처음 보는 에블린을 알아보고 있었다.

“……어떻게 제 이름을 알고 계시죠?”

조심스러운 물음에 선대 공작이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고는 어깨를 파르르 떨기 시작했다.

“푸흐흐, 흐흐.”

굳게 닫힌 입술 사이를 비집고 나오는 작은 웃음소리는 이내 감옥이 쩌렁쩌렁하게 울리도록 커지기 시작했다.

“내가, 내가 성공했어.”

선대 공작은 어깨를 들썩이며 웃더니 에블린의 얼굴을 바라보며 왈칵 울음을 터트렸다.

“내가 누구인지 알아보겠느냐? 내 이름은 더스틴 루이사다.”

“예, 예.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그래, 내가 네 친아버지다.”

에블린이 놀란 마음을 가다듬으며 대답하다 얼어붙었다.

“……예?”

간신히 떨리는 목소리를 내뱉으니 그는 환희에 찬 얼굴로 한껏 웃음을 아끼지 않고 있었다.

“네 친아버지란 말이다! 역시 내 친딸이 그곳에서 죽었을 리가 없지! 암, 누구 딸인데!”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잘…….”

“음? 트렐로니 백작에게 들은 게 없느냐?”

갑자기 죽은 사람을 언급하자 에블린은 상황이 이상해도 단단히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느낄 수가 있었다.

“나 원, 그치도 나이를 먹으니 일하는 게 영 마음에 차지가 않아.”

더스틴은 혀를 차다 말고 에블린을 보며 흐뭇이 웃었다.

“기분이 나빠도 내 딸을 보니 기분이 이리도 좋구나. 네 엄마를 쏙 빼닮았어.”

“설명을, 설명해 주세요! 도대체 무슨 말인가요? 제가 왜 당신의 딸이라는 거죠?”

“그래, 아무것도 모르니 답답하겠지. 루이사에 대해 어디까지 아느냐?”

“……루이사 가문의 진실까지 모두 알고 있어요. 루이사의 시험 또한 마찬가지고요.”

“그렇군. 그나마 어릴 때의 기억은 가지고 있어 다행이구나.”

그는 다 이해한다는 얼굴로 목을 가다듬고서는 충격적인 진실을 입에 담기 시작했다.

“네가 알고 있는 대로 루이사의 후계는 공작의 친족에게 계승될 수가 없다. 오로지 능력을 위주로 다음 후계를 결정하기 때문이지. 아주 오랜 시간 내려온 전통이라지만 나는 그것이 참 불만이었다. 그래서 결심했지.”

퀭한 푸른색 눈동자가 에블린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이 가문을 내 핏줄로 잇겠다고.”

“……불가능한 일이에요. 가신들과 합심하여 전국에서 후계자 후보들을 불러 모으니 그게 가능할 리가 없어요.”

“네 말이 맞다. 가신들은 가주의 명을 따르면서도 가주가 허튼짓하지 않도록 감시하는 역할을 하고 있지. 부인이든 애인이든 잠자리를 가지게 되면 그들에게 보고가 될 정도로 말이야.”

그는 상상만으로도 불쾌한지 눈을 가늘게 뜨고 찡그렸다.

“아주 지긋지긋하고, 불쾌한 일이었지. 하지만 나는 그들의 눈을 피해 여자를 안았고, 네가 태어났단다. 하지만 가신들이 눈에 불을 켜고 있기에 너를 데려와 키울 수는 없었지.”

그가 씨근덕거리며 말을 내뱉을 때마다 목 전체를 덮어 쇄골까지 닿는 푸석푸석한 금발이 움직임에 따라 흔들렸다.

윤기가 없을 뿐 자세히 본다면 에블린의 금발과 비슷한 옅은 색이었다.

“그렇다고 아비가 되어서 너를 버릴 수는 없지 않으냐. 그래서 너를 키워 줄 사람을 몰래 수소문해서 찾아내었다. 그게 바로 바이아르도 백작가였지.”

누군가 머리를 거세게 내리친 것만 같은 충격이 찾아왔다.

더스틴은 뭐가 그리 즐거운지 연신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아낌없이 내고 있었다.

“에블린, 루이사에서 어떻게 훌륭한 이능력자들을 찾아 데리고 오는지 아느냐?”

“……아니요, 그것까지는 모릅니다.”

“이능력은 누구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지. 평범한 이들은 이능력을 하늘이 선택한 특별한 존재들에게 쥐여 주는 힘이라고 생각한단다. 그만큼 귀한 존재들이기에 황실에서는 이능력자를 수색하기 위해 지역마다 국가 공무원을 배치해 놓았단다.”

그는 목이 아픈지 몇 번이고 메마른 기침을 하면서도 성심성의껏 설명을 이어 갔다.

“그들이 배치된 곳에는 신전에서 만든 특별한 거울이 있는데 그곳에 아이를 비추면 이능력자인지 아닌지를 판별할 수 있단다.”

‘그렇다면 적당한 나이에 아이들을 모아 검사를 진행한다는 건가? 하지만 그러면 몰래 데려올 수가 없을 텐데.’

“보통 능력자들은 열 살 남짓한 나이에 각성하고는 한단다. 본격적인 각성이 일어나기 전에 이능력자 주변에는 그치가 가지게 될 능력과 비슷한 현상이 발생하게 되지. 그런 이들을 찾아 거울 앞에 비치면 이능력자인지 아닌지 확인을 할 수가 있단다.”

에블린의 의문은 빠른 설명 덕에 금방 풀릴 수가 있었다.

“그리고 루이사는 국가 공무원 자리에 가문 쪽 사람을 심어 놨단다. 그들에게서 이능력자에 대한 정보가 전해지면 가신들이 직접 찾아가 아이의 능력을 확인하여 데려오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요?”

“그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나 또한 마찬가지로 그렇게 부모에게 팔려 왔었지! 지금 생각해 보면 참 다행인 일이야.”

더스틴은 과거를 회상하며 즐겁게 웃고서는 다시 본래의 주제를 꺼내었다.

“그래, 내가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아, 바이아르도 백작에게 너를 맡겼다는 것까지 하였구나. 나는 최대한 안전한 곳에 너를 대피시켜야 했다.”

들으면 들을수록 감당하지 못할 정보에 손발이 절로 떨려 왔다.

에블린은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지만, 더스틴의 말을 한 단어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고도의 집중력을 다해 귀를 기울였다.

“바이아르도 백작가가 다스리는 영지는 수도와 멀었고, 사치와 향락이 심한 자들이기에 회유하는 건 어렵지 않았지. 많은 재물을 제공해 주어 너를 부족할 것 없이 키우라 하였다.”

키득키득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바로 귓가 옆에서 들려오는 것 같아 소름이 절로 끼치기까지 했다.

“그들에게는 네가 밖에서 태어난 자식이라고 알려 주고, 적당한 나이에 사람을 보낼 테니 그때 보내라고 하였지. 돈을 주니 흔쾌히 수락하더구나. 그 후 트렐로니 백작에게 체인 령에서 보고가 들어왔다며 너를 데리러 가라고 하였다.”

‘……그래서 내가 아무런 능력이 없는데도 루이사 시험장에 끌려갈 수 있었던 거구나.’

몰랐던 끔찍한 진실에 에블린은 정신이 아찔해짐을 느꼈다.

바이아르도 백작가가 어째서 저를 그런 취급을 했는지 한참의 시간이 지난 지금에서야 그들의 숨겨진 의도를 알 수가 있었다.

“내 딸이니 분명 이능력을 가지고 태어났을 테고, 나도 통과한 시험이니 당연히 너 또한 통과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더스틴은 기분 좋게 이야기하다 말고 빠드득 소리가 날 정도의 분노를 내뿜으며 이를 갈았다.

“시험에 합격한 자는 고작 사내아이 두 명이더구나. 에블린 네가 아니라!”

여기서부터는 에블린도 아는 이야기였다.

운이 좋게도 시험에서 살아남았고, 라사냐에 의해 거두어졌지만 결국 돌고 돌아 루이사에 들어온 게 현재 그녀에게 주어진 삶이었으니까.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려고 했으나 그 둘 외에는 저택에 생존자가 없다더구나. 관리자까지 모두 죽었다고 하는데 정말이지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생존자가 없었다고? 그럼 나는 어떻게 살아남은 거지?’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이라 지금껏 잘 묻고 있었지만 이쯤 되니 정말 의문이 가득하였다.

“내 계획도 실패하고, 나는 소중한 딸도 잃어버리게 된 불쌍한 아비가 되었지. 그래서 나는 그 둘을 용서할 수가 없었다.”

경멸에 찬 눈동자는 에블린이 아닌 더 먼 곳을 내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아마 저 시선을 받은 자는 분명 시험에 통과한 두 사람, 체이서와 블러드윈일 것이다.

“내 혈족이 이 가문을 잇지 못한다면 루이사는 존재할 자격이 없단다. 그래서 나는 두 아이에게 저주를 걸었지.”

“……네? 저주라니요?”

더스틴의 입가가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내 이능력은 저주란다. 내 신체가 감당할 수 있는 조건을 내걸면 대상에게 딱 한 번 저주를 걸 수 있단다.”

끔찍한 탐욕과 증오의 대상에게나 보일 법한 얼굴로 더스틴은 낄낄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루이사에 들어온 이상 그 녀석들의 이능력은 강해져야 했지. 하지만 나는 그 꼴을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었단다. 그래서 그들이 능력을 사용함에 제약을 걸었지.”

에블린은 당장이라도 자리를 박차고 도망치고 싶었다.

곧 듣게 될 진실은 그녀가 감당하기에는 너무도 거대해서, 또 너무나 끔찍할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에블린은 끝끝내 진실을 외면하지 못하였다.

“……무슨 제약인데요?”

“힘을 쓸 때마다 서서히 미쳐 가게 저주를 걸었고, 능력을 사용할수록 그들은 해결할 수 없는 괴로움에 몸부림쳐야 했지. 그렇게 그 녀석들에게 능력에 대한 거부감을 심어 주었단다! 어차피 그 녀석들은 내 계획을 망치고 들어온 쓰레기나 다름없으니 그 정도는 감당해야 하지 않겠느냐!”

더스틴은 피해자인 두 사람을 향해 아낌없이 폭언을 내뱉었다.

“……아.”

드러난 잔혹한 진실에 에블린은 더는 버티지 못하고 자리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그런데 저택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네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하더구나. 분명 네가 어딘가에 살아 있다는 기쁜 소식이었지! 그래서 트렐로니 백작에게 너를 찾아오도록 명하였고…….”

딸의 생존에 진심으로 기뻐하는 아버지의 얼굴을 한 그는 감격을 호소하였다.

“긴 기다림 끝에 내 딸이 나를 찾아와주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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